하지만 이 공화국은 허울뿐이었으며 혁명 후에도 초 인플레이션과 세계에서 2번째로 물가 인상률(100,000,000,000,000배[1])[2][3], 뿌리깊은 군주제와 관료제의 피폐함으로, 밖으로는 여러 열강들의 감시와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독일은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가 되고 말았다.
나치당 집권 전
그 후 1923년부터 경제가 안정되면서 극우나 극좌파는 지지율이 매우 약했지만, 바이마르 공화국의 뿌리인 민주주의는 뿌리가 대단히 약해서 세계 대공황이 불이닥치게 된다. 이에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이 집권되면서 여러 계층들에게 지지를 받았으며 중산층들도 "위대한 독일 건설"이라는 슬로건을 내걸면서 전 계층에게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나치당은 독일 경제의 어려움이 공산주의자들과 유대인 때문에 일어났다고 주장하고 민족불평등론을 내세우며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내놓기에 이른다.
나치당 집권 후
나치당은 집권 전에는 보수주의자들이 도움을 주었으나, 집권 바로 후부터 도움이 필요없어졌고, 1933년 1월 히틀러가 총리에 취임되자 정치는 비밀경찰과 집단수용소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1934년 7월에는 나치 돌격대(SA)가 장검의 밤이라고 불리는 숙청작업이 이루어졌다.
히틀러의 계획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소는 프랑스였기 때문에, 프랑스는 방위를 확고히 하고 러시아와 폴란드과도 동맹을 맺었으나 국토 방위의 근본이 마지노선이였고, 국내외 혼란으로 인해 독일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던 프랑스는 점점 마지노선과 영국의 유화 정책에게 의지하게 된다. 이는 독일의 매우 빠른 프랑스 점령이 가능하게 되었다.
영국에서는 독일은 유화 정책으로 전쟁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고, 이미 라인란트 재무장과 오스트리아 합병, 수데텐란트 영토의 합병을 허락하여 독일을 중재하고, 또 무솔리니의 독일에게 중재를 활용하였으나 무솔리니도 독일과 동맹을 맺자 영국의 체임벌린 수상은 재무장을 하고, 폴란드, 루마니아, 그리스의 안전보장을 약속하고 소련과의 대화를 시작하였으나 영국, 프랑스, 러시아는 서로간의 큰 악감정으로 인해 대화는 원만히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