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닐라 전투(Battle of Manila, 타갈로그어: Laban ng Maynila ng 1945)는 미국-필리핀 연합군과 일본 제국 간의 전투이다. 이 전투의 결과 3년에 걸친 일본군의 필리핀 지배는 막을 내렸다.
전투 계획
맥아더는 휘하부대중 최정예인 6군을 7함대의 지원 하에 링가옌만으로 상륙할 계획을 세웠고 예정일은 1945년 1월 9일이었다. 한편 제14방면군장 야마시타 도모유키 대장은 루손섬 확보를 위한 결전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나머지 예하 병력을 3개 집단으로 나누어 최대한의 지구전을 실시하기로 결심했다. 쇼오부 집단은 카라발로 산악지대의 방어에 주력하고, 켐부 집단은 클라크 비행장 일대를 방어하며, 심부 집단은 남부 루손을 방어하기로 하였다. 일본군의 병력은 쇼오부 집단이 140,000명, 켐부 집단이 30,000명, 심부 집단이 80,000명 등 총 250,000명이었고, 150대의 항공기가 이를 지원하였다.
경과
1월 4일, 850척의 대함대는 레이테섬을 출발하였다. 항해 도중 가미카제의 공격을 받아 17척이 격침되었으나, 예정된 시간에 링가옌만을 엄습하였다. 이 작전은 거의 무저항 속에 이루어졌으며, 저녁까지 68,000명의 병력이 상륙하였다. 이후 1 군단이 카라발로 산악 방면을 견제하는 동안, 14 군단은 신속히 남진하여 1월말까지 클라크 비행장 일대를 장악하였다. 일본군은 해군 측의 주장에 따라 마닐라 방어를 결심하였고, 한달간의 치열한 시가전끝에 미군은 마닐라를 점령하였다. 켐부 집단은 병력이 적었던 탓에 미국 14 군단의 맹공을 받아 쉽게 격파되었으나, 심부집단과 쇼오부집단은 끈질기게 버텼다. 그들의 전투 중에서 특히 발레테 고개와 살락삭 협로에서의 전투는 매우 치열하였다. 미군은 점차 일본군의 근거를 박탈해 나갔지만, 종전까지도 저항을 종식시키지 못했다. 7개월에 걸친 루손 지구전에서 미군은 38,000명이 피해를 입었으나, 일본군은 확인된 수만도 170,000명에 달했다.
결과
일본군의 전사자는 약 12,000명, 미군의 피해는 전사자 1,020명 부상자 약 5,600명이었다. 시민의 피해자는 약 10만 명으로 추정된다. 마닐라 해군 방위대의 잔존 병력은 남부를 탈출하여 진무집단의 지휘 하에 코세 부대(지휘관 : 코세 키키 해군 대령)로 개편되었다.
마닐라 소재의 포로수용소 2곳에서 해방된 연합군 포로는 약 5,800명이었고, 필리핀 죄수 약 3,800명이 무사히 미군에 수용되었다. 제14방면군홍사익 중장 등은 포로를 석방하는 방침을 결정하고, 연합군 침공 이전의 조기 석방도 검토하고 있었지만, 식량 확보 등을 걱정 한 포로의 반대가 있었기 때문에 연합군 부대의 도착을 기다려 인도를 했다.
연합군은 바탄반도와 코레히도르섬의 일본군도 제압하면서, 마닐라만의 안전을 확보하고 재정비한 마닐라의 항구를 병참 기지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전투의 결과, 마닐라시의 건물의 대부분이 피해를 받았다. 인트라무로스 지역의 옛 미국 대사관 앞에 남아있는 철제 깃대에는 엄청난 수의 탄흔이 새겨진 당시의 격전을 연상할 수 있다. 손상된 건물은 전후 복구 과정에서 거의 해체되어 버렸다.
또한 정부 청사나 대학, 교회 등에 담겨 있던 마닐라 시 창건 이래의 역사적 유물도 건물과 함께 파괴되어 버렸다. 아시아, 스페인, 미국의 문화가 섞여 ‘동양의 진주’라고 불렸던 아시아 최초의 국제도시의 유산, 건축물, 미술품도 완전히 소멸했다. 이것은 지금도 필리핀의 국가적 비극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