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 대전 기간의 불가리아 역사는 크게 1941년 3월 1일까지의 초기 중립국 시기, 1944년 9월 8일까지의 추축국과의 동맹 시기, 전쟁 말 연합국과의 동맹 시기 3개로 나눌 수 있다. 불가리아는 1878년 산스테파노 조약에 근거해 대불가리아 민족주의자가 주창했던 그리스 왕국과 유고슬라비아 왕국 일부 지역을 독일의 동의 하에 편입했다.[1][2] 불가리아는 1941년 6월 22일 시작된 소련과의 전쟁에 참전하라는 추축국의 압력엔 저항했지만 1941년 12월 13일 영국과 미국에 각각 선전포고했다. 1944년 9월 8일에는 붉은 군대가 불가리아에 진주했고 다음 날 불가리아가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나치 독일의 동맹국이었던 불가리아는 홀로코스트에도 가담하여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 점령지에서 유대인 11,343명을 학살했다. 전쟁에서 48,000명의 유대인이 살아남았으나 계속 차별받았다.[3] 하지만 전쟁 기간 불가리아는 본토 지역에서는 유대인을 추방하지 않았다. 불가리아는 게오르기 쿄세이바노프, 보그단 필로프, 도브리 보질로프, 이반 바그랴노프 등 친독 전시내각을 꾸렸다. 1944년 9월 초 콘스탄틴 무라비에프 총리가 연합국 참여를 선포했다가 일주일 후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후 키몬 게오르기에프 내각이 친소 정책을 펼쳤다.
중립국 시기 (1939년 9월~1941년 3월 1일)
게오르기 쿄세이바노프총리 하의 불가리아 왕국은 제2차 세계 대전 발발과 동시에 중립국임을 선언했다. 불가리아는 종전까지 이를 준수하기로 결심했지만, 불가리아 내에서는 제2차 발칸 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잃은 영토를 다시 회복하고 주변 국가 중 불가리아인 인구가 많은 지역을 확보하기 위한 무혈 영토 확장을 희망했다. 불가리아는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 중 유일하게 1939년까지 영토를 단 하나도 확장하지 못한 국가였다.[4] 하지만 발칸반도에서 불가리아의 지정학적 위치 상 제2차 세계 대전 중 양 진영이 강력하게 압박을 가해 올 것이 분명했다. 튀르키예와는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이를 통해 불가리아의 영토 회복은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더라도 다른 영토 문제 해결을 통해 가능할 수 있다는 불가리아의 희망을 더했다.
1939년 8월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의 잠재적 수혜국이었던 불가리아는 반유대주의법을 입법하는 모습을 보여 나치 독일의 호감을 얻기 위해 타국과 경쟁했다. 불가리아는 1939년 기준 전체 무역의 65%를 독일이 차지할 정도로 독일에 경제적으로 의존했고, 군사적으로도 무기 거래가 독일에 묶여 있었다.[5][6] 불가리아의 극단적 민족주의자들은 1878년 산스테파노 조약 시기 확장된 국경으로 돌아가기 위해 로비했다.[7] 불가리아 장교단은 주로 친독계였지만 나머지 민간인은 주로 친러였다.[4] 1940년 8월 있었던 제2차 빈 중재의 결정으로 1940년 9월 7일에는 1913년 부쿠레슈티 조약을 통해 루마니아 왕국 영토로 넘어갔던 남도브루자 지역을 독일의 압력으로 크라이오바 조약을 통해 공식적으로 불가리아로 다시 반환했다.[5] 1940년 11월 21일에는 불가리아에 시민권법이 제정되어 약 500명의 유대인을 포함한 합병한 영토 내 롬인, 그리스인, 튀르키예인, 루마니아인 등의 국적이 불가리아인으로 바뀌었다.[8][5] 불가리아는 1916년~1918년 일시 점령 시기 이후 다시 남도브루자를 점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