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타 회담( - 會談, 영어: Yalta Conference, Crimea Conference, 러시아어: Ялтинская конференция, 독일어: Konferenz von Jalta) 또는 암호명(코드네임) 아르고넛(영어: Argonaut)은 1945년2월 4일부터 2월 11일까지 소련흑해 연안에 있는 크림반도의 얄타에서 미국·영국·소련의 수뇌자들이 모여 나치 독일의 제2차 세계 대전의 패전과 그 관리에 대하여 의견을 나눈 회담이다.
이승만은 1945년 4월부터 열린 UN 창립총회에 참관인 자격으로라도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 보장을 받으려 했으나, 중국은 물론 미국조차 극심하게 분열된 한인들의 대표성에 의문을 가졌기 때문에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이에 임시정부 구미위원부는 사무국과 각국 대표들에게 카이로 선언의 기본정신에 따라 임시정부를 즉각 승인할 것을 요청하는 진정서를 보냈으나 이 또한 소용이 없었다.
이후 이승만은 에밀 구베로(Emile Gouvereau)[5]라는 공산주의에서 전향한 소련인 내부자가 제공한 소스에 기반하여 '얄타 회담에서 전후 한반도를 소련의 영향력 하에 두기로 했다'는 미·영·소 3국 간의 이른바 얄타 밀약설을 주장하였고 이것은 당시 국제 여론에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다.[6]
에밀 구베로라는 인물이 제공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한국을 태평양전쟁 후까지 소련의 세력하에 두되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미영 양국은 한국 독립에 대해 아무 공약도 하지 않기로 약속되어 있다. 미국이 소련의 요구에 제한을 가할 것을 결정짓지 않는다면 한국의 운명은 명백히 소련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다. 스태디니어스 미 국무장관은 오히려 연립정부안에 대해 반대 의사를 표명한 한국 대표들의 배후 관계를 조사하기 위해 분망하고 있다.[6]
이 폭로 이후 세계 언론과 미영 정계에서는 이 문제가 새로운 파문으로 등장하였다. 보도기관이 이 사실을 반복하여 기사화하자 결국 영국 하원이 이 문제를 추궁하기에 이르렀다. 그 사실 여부를 따지는 한 의원의 질문에 대해 처칠 수상은 얄타에서 비밀 협정은 없었고 많은 문제가 토의되긴 했으나 모두가 일반적인 것 뿐이었다고 애매모호하게 답변하였다.[6] 또한 이승만은 한국이 가쓰라-태프트 밀약에 이어 또다시 비밀 협약의 희생물이 되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1945년5월 14일, 이승만은 미 상원의원 오웬 브루스터, 월터 F. 조지와 미 하원의원 클레어 E. 호프만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電文)을 보냈다.
나는 귀하가 친우가 한 조언에 의하여 귀하에게 다음과 같은 정보를 보내니 용기있는 정치가가 이 사실을 미국 국민에게 폭로할 것을 호소합니다. 트루먼 대통령이 한국을 소련의 지배에 맡긴다는 비밀 협정에 관하여 보고를 받았다는 것은 얄타 협정에 관한 정보의 근거로 보아 확실합니다. 이 비밀 협정은 미·영·소에 의하여 서명되고 대일 전쟁이 종결할 때까지 한국을 소련에게 맡기고 미·영 양국은 한국 독립에 대한 공약을 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나는 우리 나라에 자유를 약속한 카이로 선언과 대조될 수 있는 이 협정의 중요성에 대하여 귀하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바입니다. 이 비밀 협정이야말로 우리나라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국제연합의 일원이 되는 것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위에 폭로한 사실은 소련이 극동에 있어서 민주주의를 원하지 않는 것을 여실히 나타내는 것입니다. 미국이 소련의 요구에 제한을 가하지 않는 한, 소련의 정책은 한국의 운명을 종식시킬 것입니다. 스터티니어스 국무장관은 이와같이 버림받은 한국 문제의 토의를 거부하고 배후 조사를 위한 시간만을 요구하였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당초 이 협정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 대통령은 백악관을 통하여 겨우 사실을 알았고 자유를 사랑하는 미국민은 한국이 국제연합 총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조정하여야 한다고 권고 받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일순, 일각도 소홀히 할 수 없으며 이와같은 과오를 바로잡기 위하여 힘을 다할 것을 미국민의 정의감에 호소하는 바입니다.[7]
또한 그는 신문 기자들을 모아 이 '내밀한 약속'을 공공연하게 비난하였다.[7] 당시 유엔에 관한 뉴스가 적었으므로 기자들은 이것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였고, 그에 대하여 국무성은 정식으로 부인하는 성명을 발표하였으나 계속하여 반복되는 비난으로 인해 백악관에서도 성명서를 발표했다.[7]
설령 이승만의 폭로가 근거가 빈약하더라도 그는 이 효과를 통해 최소한 강대국들이 자기들 맘대로 카드게임하는 것에 어떻게든 브레이크를 걸어보려고 최대한 시끄럽게 이슈화 시켜볼 작정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이 당시 이승만은 또 미국이 소련과 뒷거래로 한국을 소련 치하에 넘기는 것을 가장 크게 우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