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국외에서 독일의 국명은 세계 각국에서 다양하게 불린다. 대표적으로 영어로 '절머니(Germany)'[k], 프랑스어 '알마뉴(Allemagne)'[l], 폴란드어 '니엠치(Niemcy)'[m], 중국어 '더궈(德国)'[n] 등이 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쓰이는 '독일'이라는 한국어 명칭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어식 한자 음차 표기인 '도이쓰(일본어: 独逸)'[o]를 받아들여 이를 한국식 한자음으로 읽은 것이며, 그 전에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덕국(德國)'이라 불렀다.[13] 해방 후에는 일제강점기의 잔재를 없애고 독일어 원발음에 좀 더 가깝게 하기 위해 '도이칠란트'로 표기했으나 대한민국에서는 이 표기법이 정착하지 못하였고,[14][p] 현재는 대한민국 주재 대사관에서도 스스로를 '주한 "독일" 대사관'으로 일컫고 있다.[15]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쓰이는 문화어에서는 원어의 표기와 비슷한 '도이췰란트'라는 명칭을 사용한다.[10]
인류 이전의 조상인 '다누비우스 구겐모시'[q]는 1,100만 년 전에 독일에 살았으며, 직립보행하는 가장 초기의 사람과 유인원 중 하나로 이론화되었다.[16] 고대 현 인류는 최소한 60만 년 전에 독일에 존재했다.[17] 최초의 현 인류가 아닌 화석(네안데르탈인)은 독일 네안데르 계곡에서 발견되었다.[18]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악기인 약 4만 2천 년 된 플루트,[19] 약 4만 년 된 사자 인간,[r][20] 약 3만 5천 년 된 홀레 펠스의 비너스[21] 등을 포함하여 유사한 연대의 현 인류의 증거들이 슈베비셴 알프(Schwäbischen Alb)에서 발견되었다. 청동기 시대에 만들어진 네브라 하늘원반은 독일 유적지에서 발견되었다.[22]
260년 경에 게르만족이 로마가 지배하는 땅에 침입했다.[31] 375년 훈족의 침공 이후인 395년부터 로마가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게르만 부족들은 남서쪽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그곳에 정착한 게르만족들은 프랑크 왕국을 설립하고 작센과 바이에른을 정복하기 위하여 동쪽으로 이동했으며, 현대 독일의 동부 지역에는 서슬라브족이 거주했다.[28]
카롤루스는 800년 카롤루스 제국을 세웠으나, 이 제국은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분할되었다.[32]동프랑크 왕국의 동쪽의 후대 왕국은 서쪽으로는 라인강에서 동쪽으로는 엘베강까지, 북쪽으로 북해에서 남쪽 알프스 산맥까지 뻗어 있었다.[32] 그 후 신성 로마 제국이 등장하였고, 오토 왕조 시기(919-1024)에 여러 주요 부족공국들을 통합했다.[33] 996년 오토 3세는 자신이 신성 로마 황제로 즉위한 직후 자신의 친척 그레고리오 5세를 교황으로 임명해 그레고리오 5세는 최초의 독일계 로마 교황이 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은 잘리어가 시기(1024-1125)에서 북부 이탈리아와 부르고뉴를 흡수했지만 이 시기에 서임권 투쟁으로 인해 황제는 권력을 잃었다.[34]
호엔슈타우펜가 시기(1138-1254)에서 독일 왕자들은 남쪽과 동쪽으로의 독일인 정착을 장려하는 동방식민운동을 벌였다.[35] 대부분의 북독일의 도시들은 한자 동맹의 일원으로서 무역의 확장을 통해 번영했다.[36] 그러나, 이후 인구는 1315년 대기근으로 인해 감소하기 시작했으며, 뒤따라 1348~1350년 흑사병이 퍼졌다.[37] 1356년에 발표된 금인칙서는 제국의 헌법 구조를 정립하였으며, 7명의 선제후에 의한 황제 선출을 성문화했다.[38]
1740년부터 합스부르크 군주국과 프로이센 왕국 사이의 이원론이 독일의 역사를 지배했다. 1772년, 1793년, 1795년에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러시아 제국과 함께 폴란드 분할에 동의했다.[47][48]프랑스 혁명 전쟁, 나폴레옹 전쟁 이후 제국 의회의 최종 회의 기간 동안 대부분의 자유제국도시는 왕조의 영토에 합병되었고, 교회의 땅도 마찬가지로 세속화되고 합병되었다. 끝끝내 1806년 제국은 해체되었다. 프랑스, 러시아, 프로이센, 합스부르크(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 전쟁 동안 독일 내의 패권을 놓고 경쟁했다.[49]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황위 계승자를 암살한 사라예보 사건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를 침공하여 제1차 세계 대전을 개전할 구실을 제공했다. 약 2백만 명의 독일인이 사망한 4년 간의 전쟁 끝에,[62]일반적인 휴전이 전쟁을 종식시켰다. 1918년 11월 독일 혁명에서 빌헬름 2세와 집권 제후들은 직위를 포기했으며 독일은 연방공화국을 선포했다. 독일의 새로운 지도부는 1919년 연합국으로부터의 패배를 인정하는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했다. 독일인들은 이 조약을 굴욕적이라고 생각했고, 역사가들은 이러한 분위기가 아돌프 히틀러의 부상에 영향을 끼쳤다고 보았다.[63] 독일은 유럽 영토의 약 13%를 잃었고 아프리카와 태평양에 있는 모든 식민지 영토를 승전국에 할양했다.[64]
나중에 홀로코스트로 알려지게 되는 나치 독일 정부의 정책은 독일 내의 소수 민족들을 유럽 전역의 강제 수용소와 절멸 수용소에 억류하는 것과 같이 소수 민족을 박해했다. 총 1,700만 명이 조직적으로 살해당했는데, 여기에는 유대인 600만 명, 롬인 최소 13만 명, 27만 5천 명의 장애인, 수천 명의 여호와의 증인, 동성애자 수천 명, 정치와 종교적인 반대자 수십만 명이 포함된다.[86] 독일 점령지에서 독일의 정책으로 인해 폴란드인 약 270만 명,[87]우크라이나인 130만 명, 벨라루스인 100만 명, 소련의 전쟁 포로 350만 명이 사망했다.[88][84] 독일군의 사상자는 530만 명으로 추산되며,[89] 독일의 민간인 약 90만 명이 사망했다.[90] 약 1,200만 명의 독일인들이 동유럽 전역에서 추방되었고 독일은 전쟁 전 영토의 약 4분의 1을 잃었다.[91]
나치 독일이 항복한 후 연합군은 베를린과 남은 독일의 영토를 4개의 점령 지역으로 분할했다. 프랑스, 영국, 미국이 통제하는 서부 지역은 1949년 5월 23일 독일 연방공화국(독일어: Bundesrepublik Deutschland)이 형성되면서 하나로 합쳐졌고, 1949년 10월 7일 소련이 점령한 지역은 독일 민주공화국(독일어: Deutsche Demokratische Republik)으로 재편되었다. 이 국가들은 각각 비공식적으로 '서독'과 '동독'으로 불렸다.[93] 동독은 동베를린을 수도로, 서독은 본을 임시 수도로 선택하여 두 국가 분할은 일시적인 것임을 강조했다.[94]
서독은 '사회적 시장경제'를 가진 연방 의회 공화국으로 설립되었고, 1948년부터 서독은 미국의 마셜 플랜에 따라 재건을 위한 원조를 받는 주요한 국가가 되었다.[95]콘라트 아데나워는 1949년 독일의 첫 연방총리로 선출되었으며, 독일은 1950년대 초부터 장기적인 경제 성장(Wirtschaftswunder)을 누렸다.[96] 서독은 1955년에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에 가입했고 유럽 경제 공동체(EEC)의 창립국이었다.[97] 1957년 1월 1일, 자르는 서독에 가입하여 연방의 일원이 되었다.[98]
동독은 소련으로부터 점령군과 바르샤바 조약 기구를 통해 정치적, 군사적으로 통제받는 동구권 국가였다. 동독이 자신이 민주주의 국가임을 주장했지만 모든 정치적 권력은 비밀 정보 기관인 국가보안부의 지원을 받는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지도부(폴리트뷰로)에 의해서만 행사되었다.[99] 동독의 선전이 동독의 사회 프로그램의 혜택과 서독의 침략 위협에 근거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동독의 시민들은 자유와 번영을 위해 서독을 찾았다.[100] 1961년에 세워진 베를린 장벽은 동독 시민들이 서독으로 탈출하는 것을 막았고 나중에 이 장벽은 냉전의 상징이 되었다.[101]
동독과 서독 사이의 긴장감은 1960년대 후반 빌리 브란트 총리의 동방 정책(Ostpolitik)에 의해 완화되었다.[102] 1989년 헝가리는 철의 장막을 해제하고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을 개방하기로 결정했고, 이로 인해 수천 명의 동독의 시민들이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를 거쳐 서독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것은 정기적인 대중 시위들이 점점 더 많은 지지를 받고 있던 동독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동독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의 일부로 동독 당국은 국경 제한을 완화했지만, 실제로는 독일이 완전한 주권을 되찾은 2+4 조약으로 분수령이 되는 개혁 과정이 가속화되었다. 이로 인해 1990년 10월 3일 구 동독의 재건된 5개의 주가 독일 연방공화국에 가입하면서 독일의 재통일이 허용되었다.[103]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공산주의의 몰락, 소련의 붕괴, 독일의 재통일과 전환점(Die Wende)의 상징이 되었다.[104]
통일 독일은 서독의 확장된 연장선으로 여겨지며 각종 국제 조직의 회원 자격들을 유지했다.[105] 1994년 '베를린-본 법'에 의거하여 베를린은 다시 독일의 수도가 되었으며, 본은 일부 연방 부처를 유지하는 연방직할시(Bundesstadt)라는 독특한 지위를 얻었다.[106] 정부 이전은 1999년에 완료되었고, 동독 경제의 현대화는 2019년까지 지속되었다.[107][108]
독일의 해발고도는 남쪽의 고도가 높은 알프스 산맥(최고점: 추크슈피체산의 2,962m)에서 고도가 낮은 북서쪽의 북해 해안과 북동쪽의 발트해까지 다양하다. 독일 중부에 숲이 우거진 고지대와 북부의 저지대(최저점: '빌슈테르마르슈, 노이엔도르프-작센반데', 3.54m[119])에는 라인강, 다뉴브강, 엘베강 등의 주요한 여러 강이 가로지른다. 독일의 주요한 천연 자원들에는 철광석, 석탄, 칼륨, 목재, 갈탄, 우라늄, 구리, 천연 가스, 소금과 니켈 등이 있다.[118]
기후
독일은 북쪽과 서쪽의 해양성 기후부터 대륙성 기후에 이르는 다양한 종류의 온대 기후를 가지고 있다. 겨울에는 일반적으로 강수량이 많지 않은 흐린 날씨로 남쪽의 알프스의 추운 날씨부터 서늘한 날씨가 있으며, 여름에는 덥고 건조한 날씨부터 시원하고 비가 오는 날씨까지 다양하다. 북부 지역은 북해에서 습한 공기를 받아 기온을 낮추고 강수량을 증가시키는 편서풍이 우세하다. 반대로, 남동부 지역은 더 극단적인 일교차를 보인다.[120]
2019년 2월부터 2020년까지 독일의 월평균 기온은 2020년 1월 최저 온도 3.3 °C (37.9 °F)에서 2019년 6월 최고 온도 19.8 °C (67.6 °F)까지 다양했다.[121] 월 평균 강수량은 2019년 2월 4월 제곱미터당 30리터에서 2020년 2월 제곱미터당 125리터까지 다양했다.[122] 월 평균 일조시간은 2019년 11월 45시간에서 2019년 6월 300시간까지 다양했다.[123]
생물
독일의 영토는 대서양 혼합림, 발트 혼합림, 중앙유럽 혼합림, 알프스 혼합림과 서유럽 활엽수림 등으로 5개의 생태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124] 2016년 기준으로 독일 국토의 51%는 농업 지역으로, 30%는 숲으로, 14%는 주거지와 기반 시설들을 포함한 도시로 덮여 있다.[125]
독일의 국립공원은 모두 16개[t]이다. 이에 더해 17개의 생물보전지역,[130] 105개의 자연 공원[131]과 400개 이상의 동물원[132]이 독일에 위치해 있다. 1844년부터 운영된 베를린 동물원은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동물원으로,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종의 동물을 가지고 있다.[133]
독일은 의원내각제와 대의 민주제를 채택한 연방공화국이다. 연방공화국의 입법권은 독일 연방의회(Bundestag)와 독일 연방상원(Bundesrat)[c]으로 구성된 의회가 가지고 있다. 연방의회는 직접 선거를 통해 혼합형 비례대표제를 실시하고, 연방상원은 16개 연방주 정부에 의해 임명되며 각각의 연방주를 대표한다.[118] 독일의 정치 체제는 독일 기본법(Grundgesetz)으로도 불리는 1949년 제정된 헌법에 명시된 틀에 따라 운영된다. 기본법 개정안은 일반적으로 연방의회와 연방상원 모두의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야 이루어지며, 기본법에서 인간의 존엄성, 권력 분립, 연방공화국의 구조와 법치주의를 보장하는 조항은 영원히 유효하다.[134]
현재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 국가를 대표하는 책임과 권한을 부여받는다. 대통령은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서만 소집되는 연방총회(Bundesversammlung)에 의해 선출된다.[118] 연방공화국의 두 번째로 높은 지위에 있는 공무원은 연방의회 의장(Bundestagspräsident)으로, 연방의회에서 선출되며 연방의회의 각종 회의를 감독하는 책임을 갖는다.[135] 세 번째로 높은 지위에 있는 공무원이자 정부수반은 총리로, 연방의회에서 가장 많은 의석을 보유한 정당이나 연립정당에 의해 선출되어 임명된다.[118] 현재 올라프 숄츠 총리는 정부수반으로서 연방내각을 통해 행정권을 행사한다.[118]
1949년 이후 정당 체제는 기독교민주연합(CDU)과 독일 사회민주당(SPD)이 장악한 채로 유지되었으며, 지금까지의 모든 총리는 이 두 정당의 하나에 속해 있었다. 그럼에도 소규모 정당인 자유민주당(FDP)과 동맹 90/녹색당(GRÜNE) 등은 연립정부의 하급 구성 파트너로서 정부에 속했다. 반면 2007년 이후에 연방의회에서 주요한 세력으로 자리잡은 민주사회주의 정당인 좌파당은 정부에 속한 적이 한 번도 없다. 2017년 독일 연방의회 선거에서는 우익 포퓰리즘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독일 연방의회에서 처음으로 의석을 얻어낼 만큼 많은 표를 얻었다.[136][137]
독일은 연방제 국가이며 전체적으로 16개의 연방주(Länder)로 구성되어 있다.[138] 각 연방주는 각각 자체 헌법을 가지고 있으며,[139] 연방주 내의 조직과 관련해 주로 자율적인 권한을 갖는다.[138] 2017년 독일은 401개의 군(Kreise)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군은 294개의 지역군(Landkreis, 농촌 지역)과 107개의 군급시(Kreisfreie Stadt, 도시 지역)로 나뉜다.[140]
형법은 독일 형법(Strafgesetzbuch)으로, 사법의 경우 독일 민법(Bürgerliches Gesetzbuch)으로 연방 차원에서 성문화되어 있다. 독일의 처벌 제도는 범죄자의 재사회화와 공익 보호를 추구한다.[147] 한 명의 전문 판사 앞에서 재판을 받는 경범죄와 심각한 정치범죄를 제외하고, 모든 혐의는 참심원(Schöffen)과 전문 판사가 재판하는 참심제를 통해 재판이 이루어진다.[148][149]
2016년 기준 독일의 인구 10만 명 당 살인율은 1.18명으로 낮은 편이다.[150] 2018년에는 전체 범죄율이 1992년 이후에 가장 낮은 수준으로 감소하였다.[151]
독일은 227개의 해외 외교 사절단을 보유하고 있으며,[153] 이 중에서 190개국 이상의 국가와 대외 관계를 가지고 있다.[154] 또한 독일은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G7, G20, 세계은행과 국제 통화 기금(IMF)의 회원국이다. 독일은 유럽 연합의 창립 이후 유럽 연합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1990년 이후로 프랑스를 포함한 모든 주변국들과 강력한 동맹을 유지해 왔다. 독일은 보다 통합된 유럽의 정치, 경제와 안보 기관의 창설을 촉구한다.[155][156][157] 독일 정부와 미국 정부는 긴밀한 정치적 동맹국이며,[158] 문화적 유대감과 경제적 이해 관계로 인해 형성된 두 나라 사이의 관계는 대서양주의가 만들어지는 데에 큰 역할을 맡았다.[159] 1990년 이후 독일과 러시아는 에너지 개발을 중요한 목표로 삼는 '전략적 파트너십'을 구축하기 위해 협력했다. 이 결과로 독일은 자국에서 소비하는 대부분의 천연가스와 원유를 러시아로부터 수입하게 되었다.[160][161] 또한 1955년 독일 정부와 대한민국 정부가 양국을 상호 승인함으로써[162][163] 우호적 관계가 시작된 한국과 독일은 현재까지도 양국 간 수입, 수출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긴밀한 협력국이다.[164]
독일의 경제발전정책은 외교정책의 독립된 영역으로, 이 일은 연방경제협력개발부가 수행한다. 독일 정부는 경제협력의 발전 정책을 국제 사회의 공동의 책임으로 보고 있다.[165] 2019년에 독일은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해외 원조를 한 국가가 되었다.[166]
독일의 군대인 독일 연방방위군(Bundeswehr)은 독일 육군(Heer), 독일 해군(Marine), 독일 공군(Luftwaffe), 중앙구호업무군(Zentraler Sanitätsdienst der Bundeswehr), 전력기반군(Streitkräftebasis)과 사이버정보군(Cyber- und Informationsraum)으로 구성되어 있다. 절대적으로 독일의 군사비 지출은 전 세계에서 7번째로 높다.[167] 2018년 독일의 군사비 지출은 495억$로, 국내총생산의 약 1.2%를 차지했으며 이는 NATO의 목표였던 2%보다 훨씬 낮았다.[168][169] 그러나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응하여 올라프 숄츠 총리는 군사비 지출을 NATO의 목표치인 2%를 초과하여 2022년에 일시적으로 1,000억€를 투입할 것이라고 발표했는데, 이는 2021년 국방예산인 530억€의 거의 2배에 달한다.[170][171]
2020년 1월 기준으로 독일 연방방위군은 184,001명의 현역 군인과 80,947명의 예비군을 가지고 있다.[172] 예비군은 군대에 투입될 수 있으며 방어 훈련과 해외 배치에 참여했다.[173] 2011년까지 독일 남성들은 18세부터 의무적으로 군에 복무해야 했으나, 2011년 이후 공식적으로 이를 유예하고 모병제로 전환했다.[174][175] 2001년부터 독일 여성들은 제한 없이 군대에 자원으로 복무할 수 있다.[176]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에 따르면, 독일은 2014년부터 2018년까지 세계에서 네 번째로 많은 양의 무기를 수출한 국가였다.[177]
평소에 연방방위군은 국방장관의 지휘를 받으며, 방어 상황(전시 상황)에서는 총리가 군 통수권자가 된다.[178]독일 기본법에서는 연방방위군이 국가 방어의 역할만을 맡는다고 성문화되어 있다. 그러나 1994년 연방헌법재판소의 판결 이후 '방어'라는 용어는 독일 국경의 보호뿐만 아니라 위기 대응과 분쟁 예방, 더 광범위하게는 전 세계 어디에서나 독일의 보안을 수호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2017년 독일 연방방위군은 이슬람 국가(IS)에 대한 지원 작전에 약 1,200명, NATO가 주도하는 확고한 지원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에서 980명, 그리고 코소보에 800명을 포함하여 국제 평화 유지군의 일부로 약 3,600명의 병력이 해외에 주둔하고 있다.[179][180]
독일의 과학과 기술은 길고 빛나는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독일은 다양한 분야, 그 중에서도 특히 물리학, 수학, 화학, 공학에서 저명한 연구자들의 국가이기도 했다.[203]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독일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으며,[204][205]독일어는 19세기부터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과학에서 주요한 언어였다. 비록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것만으로 독일은 과학 분야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u][206] 현재까지 독일은 3번째로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였다.
중앙 유럽에 위치한 독일은 유럽 대륙의 교통 허브로,[228] 도로망이 유럽에서 가장 밀집되어 있다.[229] 독일의 고속도로 아우토반은 일부 차량에 대해 일반적으로 연방적으로 규정하는 속도 제한이 없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230]인터시티익스프레스(ICE) 열차 노선은 최대 300km/h(190 mph)의 속도로 독일의 주요 도시를 포함해 주변국들의 목적지까지 연결되어 있다.[231] 독일에서 가장 큰 공항은 프랑크푸르트암마인 공항과 뮌헨 공항이며,[232]함부르크 항구는 세계에서 20번째로 큰 화물 항구이다.[233]
2019년에 독일은 세계에서 7번째로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 국가였다.[234] 독일의 모든 원자력 발전소는 2023년에 단계적으로 폐쇄되었다.[235] 독일은 전체 전력 수요를 40%의 재생 가능 에너지를 사용해 충족하여 태양광과 해상풍력발전의 '선두주자'로 여겨졌다.[236][237] 독일은 생물다양성, 저배출, 수자원 보호를 촉진하는 파리 협정 등의 여러 조약을 준수하기 위해 여러 노력을 하고 있다.[238][239][240] 독일의 가정 내 재활용률은 약 65%로 세계 최고 수준이며,[241] 2018년 1인당 온실가스 배출량은 유럽 연합에서 9번째로 높았으나, 현재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242][243] 독일에서 에너지 전환(Energiewende)은 에너지 효율성과 재생 가능 에너지 등을 포함하여 이는 '지속 가능한 경제'로의 전환으로 인정받고 있다.[244][237]
독일은 2017년 3,740만 명이 방문하여 세계에서 9번째로 방문객이 많은 국가가 되었다.[245] 국내, 해외의 여행과 관광을 합하면 독일 국내 총생산에 직접적으로 1,053억€가 넘는 기여를 하며, 관광을 통해 간접적으로 만들어지는 일자리는 약 420만 개가 넘는다.[246]
2011년 독일의 인구 조사에서 독일의 인구는 8,020만 명이었으며,[249] 2022년 조사에서 8,370만 명으로 증가하였다.[250] 독일은 유럽 연합 내에서 인구가 가장 많고, 유럽 전체에서는 러시아 다음으로 두 번째로 많으며, 전 세계에서는 19번째로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다. 독일의 인구 밀도는 km² 당 227명(mi² 당 590명)이다. 합계출산율은 1.57명[v]으로 인구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대체출산율인 2.1명보다 낮아 세계에서 출산율이 낮은 편에 속한다.[118] 1970년대부터 독일의 사망률은 출생률을 넘어선 채로 유지되었으나, 2010년대 이후로 출생률과 이주율이 증가해 인구가 여전히 증가하고 있다. 독일의 중위 연령은 47.4세로 세계에서 세 번째로 중위 연령이 높은 인구를 가지고 있다.[118]
독일은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인기 있는 이민지이다.[252] 2015년 유럽 난민 위기 이후 유엔 경제사회국은 독일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국제 이민자들을 수용하는 국가임을 발표했으며, 이는 전체 국제 이민자 2억 4,400만 명 중 약 5%인 1,200만 명에 해당한다.[253] 이러한 이민자들의 이주로 인해 독일의 인구는 크게 증가했다. 그 예시 중 하나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우크라이나 이민자들의 유입으로 인해 2023년 4월 기준 독일에서 우크라이나 출신 이민자들이 106만 명이 기록되었다.[254] 2019년 독일은 인구 중 이민자 비율이 13.1%로 유럽 연합 국가 중 7위를 차지했으며,[255] 2022년 조사에서는 전체 인구의 28.7%인 2,380만 명이 가정에 이민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256]
독일은 대도시가 많이 위치해 있다. 공식적으로 인정된 11개의 대도시권이 있다. 이 중 가장 큰 도시는 베를린이고, 면적이 가장 넓은 도시권은 루르이다.[257]
2011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기독교는 독일에서 가장 큰 종교이며, 응답자의 66.8%가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답했고 이 중 3.8%는 자신이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고 말했다.[259] 전체 인구 중 31.7%가 독일 개신교회[w]와 자유 교회(Evangelische Freikirchen)의 교도들을 포함한 개신교 신자라고 응답했으며, 31.2%는 자신을 로마 카톨릭교회 신자라고 응답했고 1.3%만이 동방 정교회 신자라고 답했다. 2016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독일의 인구에서 가톨릭 교회 신자들과 개신교 신자들이 각각 28.5%와 27.5%를 차지했다.[260][261]독일에서 이슬람교는 두 번째로 큰 종교이다.[262]
2011년 인구 조사에서 응답자 중 1.9%(152만 명)만이 자신의 종교가 이슬람교라고 응답했지만, 이슬람교와 유대교 등 독일에서 소수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 수치는 신뢰하기 어렵다고 여겨진다.[263]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튀르키예 출신의 수니파와 알레비파이지만, 시아파, 아흐마드파 등의 소수 종파들도 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를 제외한 나머지 종교들은 독일 인구의 1% 미만을 차지한다.[262]
2018년 연구에 따르면 독일 인구의 38%가 어떤 종교 조직이나 종파에 소속되어 있지 않지만,[264] 최대 인구의 3분의 1은 여전히 자신이 종교적이라고 생각했다. 국가 무신론주의가 시행되기 전에 독일의 무종교인들은 주로 구 동독 지역과 개신교를 믿던 주요 대도시에서 살았다.[265][266]
독일어는 독일의 공식적인 언어이자 가장 많이 사용되는 언어이다.[267] 이에 더불어 독일어는 유럽 연합의 24개의 공식적인 업무 언어 중 하나로, 유럽 위원회에서 사용하는 3개의 언어 중 하나이다.[268] 또한 약 1억 명의 사람들이 독일어를 모국어로 삼으며, 이는 유럽 연합에서 가장 널리 모국어로서 이용되는 언어 중 하나이다.[269]
독일에서 교육 감독과 조직의 책임은 기본적으로 각 주에 있다. 3~6세 사이의 모든 어린이들은 선택하여 유치원 교육을 받을 수 있고, 그 이후 주에 따라 최소 9년 동안 학교에 의무적으로 출석해야 한다. 초등교육은 보통 4~6년 과정이다.[270] 중등교육은 학생이 학문적 교육을 원하는지, 직업에 대한 교육을 원하는지에 따라 여러 트랙으로 나뉜다.[271] 이중 교육 시스템(Duale Ausbildung)이라고 불리는 견습 시스템은 학업 학위와 거의 비슷할 수준의 숙련도를 만들어내는데, 이를 통해 직업 훈련을 받는 학생들은 기업이나 국립 직업학교에서 직업에 대해 교육받을 수 있다.[270] 이러한 교육 모델은 전 세계적으로 호평을 받았으며 여러 나라의 교육 시스템에 큰 영향을 끼쳤다.[272]
독일에서 대학의 대부분은 공립 시설이며, 학생들은 전통적으로 등록금을 내지 않고 공부한다.[273] 일반적으로 대학 진학에 필요한 것은 아비투어(Abitur)이다. 2014년 OECD 보고서에 따르면, 독일은 세계에서 3위의 국제 연구 참여국이다.[274] 독일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 여러 곳이 있는데, 대표적으로는 하이델베르크 대학교(1836년), 라이프치히 대학교(1409년), 로스토크 대학교(1419년) 등이 있다.[275] 자유주의 교육 개혁가 빌헬름 폰 훔볼트가 1810년에 설립한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는 많은 서양 대학의 학문적 모델이 되었다.[276][277] 독일은 우수대학육성정책을 통해 11개의 우수 대학을 지정했다.
의료
독일의 의료 시스템(Krankenhäuser)은 중세부터 시작되었으며, 현대 독일은 1880년대 비스마르크의 사회법을 기반으로 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보편적 건강보장의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279] 1880년 이후 개혁과 규정을 통해 균형 잡힌 의료 시스템이 보장되었다. 전체 인구는 법령에 따라 제공되는 건강 보험 계획의 적용을 받으며, 일부는 민간 건강 보험을 선택하여 계약할 수 있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독일의 의료 시스템은 2013년 77%가 정부 자금으로, 23%가 민간 자금으로 운영되었다.[280] 2014년 독일은 국내총생산의 11.3%를 의료 분야에 지출하였다.[281]
2019년 세계보건기구(WHO) 기준 독일은 기대수명이 남성 78.7세, 여성 84.8세로 세계 21위에 올랐으며, 영아 사망률도 1,000명당 4명으로 매우 낮았다. 2019년 전체 사망 원인의 37%는 심혈관 질환이 차지했다. 독일에서는 비만이 중요한 건강 문제로 조명되기 시작했으며, 2014년 연구에 따르면 독일 성인 인구의 52%가 과체중, 혹은 비만이었다.[282]
문화
독일의 문화는 유럽의 종교적, 세속적인 주요 지식과 대중의 흐름에 따라 변화되고 형성되었으며, 독일의 여러 과학자, 작가와 철학자는 서구 사상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283]BBC의 2013-2014년 전 세계 여론 조사에 따르면, 독일은 세계에서 가장 긍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인정받았다.[284][285]
독일 디자인의 경우 현대 제품 디자인의 시초를 마련했으며,[294]베를린 패션 위크와 패션 트레이드쇼인 Bread & Butter가 1년에 두 번씩 열린다.[295] 독일 건축에는 로마네스크 건축의 영향을 받은 카롤링거(Carolingian)와 오토(Ottonian) 양식이 있으며, 이들은 후에 중세 독일에서 발전한 특유의 고딕 양식(Backsteingotik)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르네상스와 바로크 건축은 베저 르네상스(Weser Renaissance)와 같이 지역적이고 독일의 전형적인 요소에 영향을 받았으며,[293] 독일 토속 건축의 특징은 목재 프레임 구조(Fachwerk)를 먼저 지은 후 그 사이에 벽토를 채워넣어 만드는 것이다.[296] 산업화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독일에는 그륀더차이트(Gründerzeit)라고 불리는 고전주의, 역사주의적 양식이 발달했으며, 1910년대에 발달한 표현주의 건축은 아르데코와 같은 근대 양식에 영향을 끼쳤다. 근대 건축 운동을 선도한 것도 독일 지역이었는데, 헤르만 무테지우스가 만든 독일 공작연맹(Werkbund)과 발터 그로피우스가 설립한 바우하우스(Bauhaus) 운동의 본고장이다.[293]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유리로 뒤덮인 초고층 건물을 구상한 루트비히 미스 판 데어 로에는 세계에서 가장 명성 있는 건축가 중 한 명이 되었으며,[297] 오늘날 독일의 유명 건축가로는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고트프리트 뵘과 프라이 오토 등이 꼽힌다.[298]
독일에서 국제적으로 운영되는 가장 큰 미디어 회사에는 베르텔스만 엔터프라이즈, 악셀 스프링거 AG, 프로지벤자트(ProSiebenSat.1 Media) 등이 있다. 독일의 TV 시장은 약 3,800만 가구가 속하는 유럽 최대 규모의 시장이며,[306] 독일 가구의 90%가 다양한 공영 방송과 민영 방송 채널을 시청할 수 있는 케이블이나 위성 TV를 보유하고 있다.[307] 독일에는 300개가 넘는 공영 라디오와 민간 라디오가 있다. 독일의 공영 라디오 방송은 도이칠란트라디오(Deutschlandradio)이고, 공영 도이체 벨레는 외국어를 제공하는 라디오이자 TV 방송사이다. 독일의 신문/잡지 인쇄 시장 또한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307] 독일에서 가장 많이 발행되는 신문으로는 빌트, 쥐트도이체 차이퉁,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 디 벨트 등이 있으며,[307] 가장 큰 잡지로는 ADAC 모터벨트(ADAC Motorwelt)와 데어 슈피겔 등이 있다.[307] 독일에는 전국적으로 약 3,400만 명의 플레이어가 있는 대규모 비디오 게임 시장이 있으며,[308] 독일에서 개최되는 게임스컴은 세계 최대 규모의 게임 컨벤션이다.[309]
독일의 영화는 기술적, 예술적으로 큰 공헌을 세웠다. 스클라다노프스키 형제의 첫 작품은 1895년 관객들에게 공개되었으며, 포츠담의 스튜디오 바벨스베르크는 1912년에 설립되어 세계 최초의 대규모 영화 스튜디오가 되었다. 초기 독일 영화는 로베르트 비네, 프리드리히 빌헬름 무르나우와 같은 독일의 표현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또다른 표현주의자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는 최초의 주요 SF 영화로 여겨진다. 1945년 전쟁 직후의 많은 영화들은 '잔해 영화'[y]라고 불리는 장르에 속한다. 동독의 영화는 국영 영화 스튜디오 'DEFA'가 절대적으로 지배한 반면에, 서독의 지배적인 영화 장르는 '고향 영화'[z]였다.[310] 1970년대와 1980년대 폴커 슐뢴도르프, 베르너 헤어초크, 빔 벤더스,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와 같은 신독일 시네마 감독들은 서독의 영화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독일에서 제작된 1979년작 《양철북》(Die Blechtrommel), 2002년작 《러브 인 아프리카》(Nirgendwo in Afrika), 2007년작 《타인의 삶》(Das Leben der Anderen)은 아카데미 국제영화상을 수상했다. 많은 독일인들이 해외 영화에서의 연기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하였으며, 유럽 영화상 시상식은 유럽 영화 아카데미가 위치한 베를린에서 격년 주기로 개최된다. 베를린 국제 영화제는 '황금곰상'을 수상하는 '베를리날레(Berlinale)'로 유명하며 1951년부터 매년 개최된 전 세계를 선도하는 영화제 중 하나이다. '롤라(Lola)'라고 불리는 상은 매년 베를린의 독일 영화상에서 수상된다.[311]
빵은 독일 요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독일의 제빵업계에서는 약 600종의 주요 빵과 약 1,200종의 페이스트리와 롤빵(Brötchen 브뢰트헨[*])을 생산한다.[312] 독일의 치즈는 유럽에서 생산되는 전체 치즈의 22%를 차지한다.[313] 2012년 독일에서 생산된 모든 육류의 99% 이상이 돼지고기, 닭고기, 소고기 중 하나였고, 독일은 브라트부르스트와 바이스부르스트 등을 포함해 거의 1,500가지 종류의 소시지를 생산한다.[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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