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비무장 지대 분쟁은 6.25 전쟁 휴전 이후 1966년부터 1969년까지 DMZ에서 벌어진 대한민국 국군 및 미군 그리고 북한군과의 군사적 충돌을 의미한다.
상세
한국전쟁이 정전협정 체결 이후 휴전 상태에 진입하면서 전쟁은 일시적으로 정지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군사적 긴장과 충돌이 비무장지대에서 발생하게 된다.[1][2] 비무장 지대 내 분쟁은 대한민국 국군과 북한군 사이에서 발생하기도 하였고[3], 때로는 북한군과 미군의 직접적인 충돌도 여러 존재하였다.[4] 비무장지대 내 명확하지 않은 군사분계선 표식으로 인해 우발적인 충돌의 가능성도 높았다.[5]
1960년대 북한은 비무장지대와 더불어 한반도 이남의 후방 지역에서도 게릴라 작전을 수행하였는데, 비무장 지대 분쟁은 주로 소규모 국지전 형식으로 이뤄졌다.[6] 대한민국 국군과 미군 측 사상자는 1천2백명 정도가 나왔고, 대략 1000건의 교전이 발생하였다.[7] DMZ 군사충돌은 1960년대 및 1970년대 초반에 집중되었으며, 이후 급격히 줄어들게 된다.[8]
이러한 북한의 지속적인 도발에 대해서 한국은 한국과 미국은 이를 대응하기 위해서 임진스카우트를 창설하여 비무장 지대 내 북한 특수군에 대한 정찰 및 격퇴 작전을 실시하였다.[9] 미군은 비무장 지대에 고엽제를 대량으로 살포하였으며,[10] 1960년대의 비무장지대 내 군사적 충돌은 역설적으로 비무장지대의 무장화를 초래하였다.[11]
연혁
1960년대
1960년대 중후반부에 접어들어 북한은 특수작전군을 활동하여 무장 도발을 감행하였다.
1964년 조선중앙통신사 부사장 이수근이 망명하는 과정에서 북한군이 총격을 가하는 일이 있었다.[12]
1968년 유엔군사령부 소속 트럭에 대하여 북한군이 기습공격하여 미군 2명이 전사하고 한국군 2명이 전사하였다.[13][14]
1970년대
베트남 전쟁이 시작한 가운데, 북한군은 비무장 지대에서 산발적이고 소규모적인 군사 도발을 실시하였다.[15] 이에 대한민국과 미국은 비무장지대에 임진스카우트를 배치하여 경계 및 정찰 임무에 투입하였다. 1976년에는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 발생하여 북미 간 긴장이 매우 심화되기도 하였다.
1980년대
소련 출신 판문점 여행가이드였던 바실리 마투조크가 급작스래 판문점 남측으로 망명하면서 남북 및 북미간 총격전이 발생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장명기 상병이 전사하였다.[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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