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복 (丁復, ? ~ 기원전 183년 )은 초한전쟁 기 ~ 전한 초기의 군인이다. 전한 건국 후 개국공신 서열 17위로 양도후(陽都侯)에 봉해졌다.
생애
본래 월나라 사람으로, 설 (薛)에서 거병하여[ 1] 패상(霸上)에 이르렀고, 누번(樓煩)의 부장이 되어 한나라 에 들어갔다. 삼진(三秦)을 평정하고 적왕(翟王) 동예 를 항복시켰고, 여택 의 휘하에 들어가 팽성 에서 용저 를 죽이고 대사마 가 되었다. 이후 섭(葉)에서 항우 의 군세를 무찌르고 장군이 되었고, 공로를 인정받아 열후 에 봉해지고 식읍 7,800호를 받았다.
고후 5년(기원전 183년)에 죽으니 시호 를 경 (敬)이라 하였고, 아들 정녕 이 작위를 이었다.
출전
각주
↑ 이는 《한서》의 기록으로, 《사기》에는 조나라 출신에 업 에서 거병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전임(첫 봉건)
전한 의 양도후 기원전 201년 정월 무신일 ~ 기원전 183년
후임아들 양도조후 정녕
1 ~ 10위 11 ~ 20위 21 ~ 30위 31 ~ 40위
비어후 진하 (31)
평도후(32) 패가(沛嘉)|공사희(工師喜)
무강장후 장불식(33)
여려[ 2] 애후 주조(34)
대정후 대야(35)
세제후 여박 (36)
해양제신후 요무여(37)
척구의후 당려 (40)
41 ~ 50위
동무정후 곽몽(41)
고원제후 병천 (41)
악성절후 정례(42)
선곡제후 정의(43)
위기장후 주정 (44)
창무정신후 선녕(45)
강양제후 화무해(46)
곡역헌후 진평 (47)
동모경후 유조(48)
균장후 장평(48)
복양강후 진서 (49)
의씨경후 진속
51 ~ 60위 61 ~ 70위 71 ~ 80위
청간후 질중동
강간후 유승(留勝)|강어후 유힐(留肹)
영릉이후 여신
축아효후 고읍(高邑)|고색(高色)
자조단후 적|극주
오제후 양성연
당양애후 손적
영장후 위선(魏選)|위속(魏遬)
장절후 모택
기신광후 진창
81 ~ 90위 91 ~ 100위
순경후 온개
역간후[ 5] 정흑(92)
고릉어후 왕주(92)
무원정후 위거
오방장후 양무
번장후|평엄후 강첨(彊瞻)|장첨사(張瞻師)
분양(장)후 근강(96)
심택제후 조장야(趙將夜)|조장석(趙將夕)(98)
송자혜후 허치
알지절후 풍해감(馮解敢)|풍해산(馮解散)
101 ~ 110위 111 ~ 120위 121 ~ 130위 131 ~ 137위 열외 ※ 번호가 없을 때에는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순서가 내려간다. 이름이나 시호, 봉작의 표기가 《사기》와 《한서》가 다를 때에는 (《사기》의 표기)|(《한서》의 표기)로 쓴다. 이탤릭체는 고조 사후 봉해졌으나 위계가 기록된 경우다.
↑ 《사기》에서는 21위, 《한서》에서는 22위라 한다.
↑ 상제를 피휘해 융려라고도 한다.
↑ 《사기》에는 순위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 《사기》에서는 '양하제애후'에 이름은 기록이 없고, 《한서》에서는 '양하제후 기석'으로 기록되어 있다.
↑ 《사기》에서는 봉읍을 마(磨)라 했으나, 《사기색은》에서는 이를 오류라고 했다.
↑ 《사기》에서는 116위, 《한서》에서는 126위라고 한다. 《사기》를 따를 경우, 척새와 순위가 중복된다.
↑ 원래는 항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