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위나라의 오대부기장(五大夫騎長)이었다가 당시 패공(沛公)이던 고제를 섬겼으며, 진나라와의 싸움에서 공을 세워 경의 작위를 받았다. 기원전 206년, 고제가 한나라 왕[漢王]으로 봉해지자 공덕군(共德君)의 봉호를 받았고, 고제가 한중에 도착하자 우기장(右騎將)이 되었다. 한왕이 옹 · 새 · 적 삼진을 평정하자 조음(雕陰)을 식읍으로 받았다. 이후 항관(項冠) · 주란(周蘭) · 용저 격파에도 종군해 식읍이 늘었다. 한신 · 조참 등이 이끄는 제나라 정복 전쟁에 참여해 공적을 세워 식읍이 늘었고, 제나라가 완전히 평정되자 한왕 6년(기원전 201년)에 양릉[1]후(陽陵侯)에 봉해져 식읍 2,600호를 받고 이전 식읍은 제했다. 또 이때 제나라 왕 한신을 초나라로 이봉하고 제나라 왕에는 고제의 서장자 유비를 임명하면서, 부관은 제나라의 우승상이 되어 아직 항복하지 않은 제나라 왕 전횡 때문에 제나라를 수비했다. 고제 11년 곧 제도혜왕 5년(기원전 196년), 제나라의 상국이 되었다. 4월에 주발에 속해 진희의 난 진압에 나섰고, 1월에는 대나라의 상국으로 전임했다.[2] 2년 후, 혜제 원년(기원전 194년), 제후국에 상국을 두지 못하게 하면서 대나라 승상으로 전임됐다. 혜제 5년(기원전 190년)에 죽어, 시호를 경(景)이라 했다.[3][4][5]
각주
↑하상군의 속현으로, 기원전 201년 당시에는 익양현이었으며 경제가 경제 5년(기원전 152년) 이곳에 자기 능을 조성하면서 개명했다. 그러나 사기나 한서의 공신표에서는 익양이 아니라 양릉으로 나오며, 양릉후국이 폐지되는 것도 경제 사후인 원수 원년(기원전 121년)이고 이유도 양릉후 부언이 회남왕 유안의 반란에 연루된 것이지 경제의 능과는 연관이 없다. 《초한춘추》에서는 음릉(陰陵)으로 나오며, 이곳은 회남국내사지(후의 구강군)의 현이다.
↑원래 제나라 상국인 조참은 같은 해에 일어난 영포의 난 때에 제나라 상국으로서 도혜왕을 따라 반란 진압에 종군했고, 혜제 2년 곧 제도혜왕 8년(기원전 193년)에 한 제국의 상국이 되어 제나라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