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 도생(道生: ?~434)) ·혜관(慧觀: fl. 401~430) 등 구마라습(鳩摩羅什: 344~413) 문하의 뛰어난 승려들이 《열반경》을 부처 설법의 귀결(歸結)이라고 결론을 내린 이후 《열반경》은 수나라(隨: 581~618) 시대까지 중국 남북 각지에서 통용되었다.[1] 특히 "법신상주(法身常住)"나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의 교의는 그 후의 중국 불교사상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혜관(慧觀)에 의한 열반종오시교(涅槃宗五時敎)의 교판(敎判)은 후세 교판의 초석(礎石)이 되었다.[1]
수나라(隨: 581~618) 시대에 이르러 천태(天台)의 지의(智顗: 538~597)가 "법화열반동일제호미(法華涅槃同一醍好味)"의 설을 세우게 되자 열반종은 천태종(天台宗)에 병탄(倂呑)되었다.[1]
삼국시대백제의자왕대에 보덕(普德: fl. 650) 화상이 전주에서 열반종(涅槃宗)을 개종하여 백제 멸망 뒤 신라무열왕(武烈王: 재위 654~661)대에 번성하였다.[3] 열반종은 시흥종(始興宗)이라고도 불리었다.[4]
보덕은 본래 고구려 용강현(龍崗縣) 사람으로 고구려의 반룡사(盤龍寺)에서 주석하였다.[3] 당시 보장왕(寶藏王)이 도교를 혹신(惑信)하였다.[3]도교를 신앙하면 국조가 위태하다고 보덕이 간청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으므로 비래방장(飛來方丈)으로 백제완산주 고달산(孤達山)으로 이주한 후 경복사(景福寺)를 창건하여 열반종의 근본도량을 세웠다.[3]
보덕화상의 제자 중에 11인의 상수제자가 8대 가람을 창건하였는데 금취(金趣)는 금동사(金銅寺), 적멸(寂滅)과 의융(義融)은 진구사(珍丘寺), 지수(智藪)는 대승사(大乘寺), 일승(一乘) 및 그의 제자 심정(心正)은 대원사(大原寺), 수정(水淨)은 유마사(維摩寺), 사대(四大)와 계육(契育)은 중대사(中臺寺), 개원(開原)은 개원사(開原寺), 명덕(明德)은 연구사(燕口寺)를 지었다.[3]
조선세종 6년(1424)에 7종을 폐합하여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개편할 때 조계종(曹溪宗) ·천태종(天台宗) ·총남종(摠南宗)의 3종을 합하여 선종이라 하였다.[3] 또한 화엄종·자은종·중신종(中神宗) ·시흥종(始興宗: 열반종의 다른 이름)의 4종을 합하여 교종이라 하였다.[3] 시흥종(열반종)의 근본도량은 경복사를 삼아 18사를 내렸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