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크로아티아어: Zbor narodne garde 즈보르 나로드네 가르데, ZNG)은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기간 1991년 4월에서 5월 사이 크로아티아가 수립한 군사이다. 법적인 이유 때문에 크로아티아 내무부 산하에 있었으나 실질적으로는 크로아티아 국방부의 직접 지휘를 받았다. 크로아티아의 국경과 영토를 보호하고 보통 경찰과 관련된 임무를 수행했다. 1991년 5월 크로아티아 특수경찰부대 일부가 국가방위군으로 이관되면서 4개 전문여단이 창설되었고 5월 28일 자그레브에서 열린 군사 퍼레이드를 통해 공개되었다. 국가방위군은 마르틴 슈페겔 국방장관이 지휘하다 8월 초 사임했다. 이후 슈피겔의 후임으로 크로아티아 공화국군(9월 21일 창설)의 첫 참모총장이 되는 안톤 투스가 이어받았다.

국가방위군은 창설 과정에서 무기와 탄약 부족, 군복 부족, 부족한 훈련과 훈련된 장교의 전반적인 부족, 열약한 참모업무와 지휘 구조(여러 부대의 움직임을 잘 통솔하지 못함) 등 여러 문제를 겪었다. 이런 문제는 높은 사기, 명확한 전략 목표, 높은 수준의 동원령으로 상쇄되었다. 막사 전투 이후 국가방위군은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으로부터 노획한 무기를 통해 국가방위군이 크게 확대되었다. 10월 말까지 60개 여단과 독립대대가 창설되었고 11월 3일에는 크로아티아군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

배경

1990년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열린 민주 총선에서 크로아티아 민주연합(HDZ)이 대승을 거두자 크로아티아 내 크로아트인세르브인 사이 민족 갈등이 심화되기 시작했다.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은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해 크로아티아 내 영토방위군(TO)의 무기를 전부 압수했다.[1] 8월 17일에는 민족 분쟁이 세르브계 크로아티아인대대적인 반란으로 번져[2] 주로 세르브계가 다수 거주하는 달마티아고원 내륙 크닌(스플리트에서 동북쪽으로 60 km 떨어짐) 주변 지역,[3] 리카, 코르둔, 바노비나, 크로아티아 동부 일부 지역에 반란이 일어났다.[4] 1991년 1월 몬테네그로와 세르비아의 보이보디나, 코소보 메토히야 자치주의 지원을 받은 세르비아가 크로아티아 보안군의 무장 해제를 위한 유고 인민군 파병을 유고슬라비아의 대통령직에 승인을 얻기 위해 두 차례 시도했으나 실패했다.[5] 3월에는 세르브계 게릴라와 크로아티아 특수경찰 사이 유혈 충돌이 발생한 후[6] 세르비아와 그 동맹의 지지를 받은 유고 인민군이 연방 대통령직에게 전시 권한을 부여하고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해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3월 15일 이 요청도 거부되었고 1991년 여름 들어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붕괴되면서 유고 인민군은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대통령 하에 놓이기 시작했다.[7]

1991년 초 크로아티아에는 군대가 없었다. 크로아티아는 국방력 강화를 위해 경찰 수를 2만명으로 증원했다. 크로아티아 경찰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부대는 사실상 군사 부분을 따라 조직된 12개 대대 3천명 인원의 크로아티아 특수경찰이었다. 또한 16개 대대, 10개 중대로 된 9천~1만명 규모의 각 지역별 예비경찰부대도 있었으나 무기가 부족했다.[8]

각주

  1. Hoare 2010, 117쪽.
  2. Hoare 2010, 118쪽.
  3. The New York Times & 19 August 1990.
  4. ICTY & 12 June 2007.
  5. Hoare 2010, 118–119쪽
  6. Ramet 2006, 384–385쪽
  7. Sell 2002, 373쪽
  8. CIA 2002, 86쪽.

참고 문헌

서적
저널 논문
뉴스 르포
기타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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