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백만 (兪百萬, 1942년9월 20일 ~ )은 전 KBO 리그의 야구 감독이자, 골프 선수인데 본래 이름은 유병언(兪秉彦)이었으나[1] 나중에 개명했다.
울산 출신으로 부산상고를 졸업하였으며 초등학교 6학년 때 부산으로 이사를 했고[2] 중학교 때 야구를 시작했는데 본인(유백만)의 고등학교(부산상고) 1년 선배인 김응룡은 피란 오기 전 축구선수였던 삼촌을 따라다니면서 축구를 했고[3] 중학교(부산 개성중) 초창기 때도 축구선수로 활동했다가[4] 나중에 야구선수로 전향했다.
고등학교 시절 투수와 3루수를 번갈아 맡았다가[5] 이후 상업은행 등 실업 팀에서 투수로 활약하였다. 실업 야구 시절 노히트 노런을 4차례나 기록하는 등 팀의 에이스로 활약하였는데 최초 실업 야구 노히트 노런과[6] 실업 야구 최초 100승[7] 투수이기도 했다. 30대 초반 때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바로 상업은행 팀의 감독으로[8] 취임하였다.
KBO 리그가 출범하자 백인천 감독 아래에서 MBC 청룡의 창단 코치로 부임했다. 1983년 4월, 백인천이 간통 혐의에 따른 구속으로 MBC 청룡에서 해임되었을 때 감독 대행을 맡았다. 동년 5월 김동엽이 감독으로 부임하자 야구 철학이 다르다는 이유로 같은 해 6월 9일 팀을 떠났다가[9] 27일부터 삼성 라이온즈의 코치로 이적했으며[10]1985년 1군-2군을 별도로 분리함에 따라 2군 투수코치로 자리를 옮겼다[11].
한편, 삼성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유백만 투수코치가 1985년 1군-2군을 별도로 분리함에 따라 2군 투수코치로 자리를 옮겨[12]정동진 수석코치가 투수코치까지 겸임했으며 이 같은 부담감을 덜기 위해 원년 개막전 선발투수 황규봉을 1986년 시즌 뒤 투수코치로[13] 승격시켰다.
하지만, 삼성은 황규봉의 코치 승격[14], 김일융의 일본 복귀[15], 성준의 방위복무[16] 때문에 투수진이 부실해져 1987년 한국시리즈에서 4패로 준우승에 머물렀고 이에 장명부 전 빙그레 투수를 1988년2월 16일부터 2군 투수코치(1년 전속계약)로[17] 영입했다.
아울러, 김동엽이 1983년 한국시리즈의 부진으로 물러났다가 1986년 다시 MBC 청룡 감독으로 복귀했을 때 유백만도 청룡으로 복귀하여 코치직에 취임했다. 이후 김동엽이 1987년 성적 부진으로 다시 사임하자, 유백만이 감독 대행을 맡았고 1988년에는 정식 감독으로 승격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부산상고 후배인 강병철을 타격코치로 영입할 예정이었으나[18] 빙그레행 열차를 타는 바람에 좌절됐다.
아마추어식의 강압적인 지도가 대세였던 당시 선수들의 자율성을 최대한 존중하는 등의 시대를 앞선 면모를 보였으나 세이브전문투수 김용수를 개막전에 선발등판시켰다가 0-3으로 무너진 후[19] 마운드 전체가 앞뒤를 가릴 수 없을 만큼 흔들려 시즌개막 5연패를 당하는 등 전기리그 최하위, 후기리그 5위에 그쳐 성적 부진으로 1년 만에 경질되었는데 에이스 김건우의 부상결장으로 투수력이 붕괴된 데다[20]이광은의 부상으로 인한 부진, 2루수와 포수 자리에서 취약점을 드러낸 게 컸다. 하지만 그의 지도 스타일에 비해 극과 극으로 강압적이었던 후임자 배성서가 감독을 맡은 해에는 선수들이 잘 적응하지 못해 전지훈련 때 투수정삼흠이 배성서 감독에게 항명한 사건이 있을 정도로 대조적이었다. 이후 야구계를 떠났다가 1990년삼성 라이온즈 코치로 프로야구 복귀를 했는데[21] 같은 해 골프계에 입문하여 1999년에는 한국프로골프 시니어 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골퍼로서 활약했으며 1993년 시즌 뒤 삼성과의 계약이 종료된 후 같은 팀에서 인스트럭터(94~95년)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1989년 시즌 후 고향 팀인 롯데 자이언츠 감독 물망에[22] 한때 거론됐다.
한편, 삼성은 원년 선수 출신의 코칭스태프가 경험 부족 때문에 1989년 부임한 정동진 감독을 보필하기 어렵다고 구단 측에서 판단하여[23] 본인(유백만)을 수석코치로 영입했으며 이 과정에서 원년멤버이자 1987년 선수에서 승격한 황규봉 1군 투수코치가 일본 야구 연수를 위해[24] 삼성에서 재계약을 포기했고 그 이후 프로야구계와 작별했다.
그를 거친 골프 선수 중 대표적인 선수가 배상문이다[25].
이와 함께, 상업은행 농구선수 출신 박신자가 본인(유백만)과 마찬가지로 14번을 달았으며[26] 유백만이 한국화장품 감독을 맡았을 때 당시 투수이자 본인(유백만)의 삼성 코치(1차) 시절 선수였던 황규봉은 대학(고려대) 1학년 때인 1973년 필리핀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 국가대표로 발탁됐지만 대회 도중 숙소에서 불이 나 3층에서 뛰어내리다 부상을 입은 뒤 한동안 성인 국가대표팀을 떠났다가 1976년 콜롬비아 세계야구선수권대회를 통해 성인 국가대표팀에 복귀했으나[27]1977년8월 고소공포증으로 쓰러져 또다시 국가대표팀을 떠났다가[28]1979년9월 다시 마운드에 섰고 1980년8월 세계야구선수권대회부터 성인 국가대표팀에 복귀했으며[29]1976년 콜롬비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와 1980년 이후 성인 국가대표팀에서 뛸 당시에는 자신의 고유번호였던 1번을 이해창이 달고 있었던 터라[30] 유백만의 등번호인 14번을 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