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역 시절에는 최고의 2루수로 꼽혔다. 선린상고 시절부터 활약하기 시작해 실업 무대에서 특히 두각을 나타냈다. 해병대 소속으로 실업 무대 MVP를 수상했다. 도루상과 득점상을 타는 등, 발 빠른 야구를 구사했던 선수였다. 제일은행 야구단에서 선수 생활을 했으며, 은퇴 후 신일고등학교, 충암고등학교 감독을 역임했다. 신일고등학교 감독을 맡았을 때 그의 손을 거쳤던 대표적인 선수로는 외야수 박흥식이 있다.[1]
이후 MBC 청룡의 코치를 시작으로 1986년 청보 핀토스에 이적했으며 1987년 후 팀이 태평양으로 넘어가면서 친정인 MBC 코치로 자리를 옮겼고[2] 1989년 말 부임한 김진영 감독의 부름을 받아 롯데 자이언츠 코치를 맡았지만 김진영 감독이 1990년 시즌 중 성적부진으로 경질된 데다 같은 해 말 강병철 감독이 재부임하면서 소위 '김진영 라인' 지우기의 일환에 따라 물러난 후[3] 한동안 현장을 떠났다가 1992년 시즌 뒤 쌍방울 레이더스의 수석코치로 합류하게 되나 외국인 선수 영입과정에서 불화를 보인 끝에[4] 결국 신용균 감독이 퇴진하고, 1994 시즌부터 팀을 지휘하게 된다.
여기에 더해 프런트, 특히 구단의 실세인 이용일과의 갈등이 심했다고 했는데 매년 유망주들을 쌍방울과 1992년11월 3일부터 자매결연을 맺은[5] 일본프로야구 팀인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가을 캠프에 보내던 관례를 거부한 것이[6] 대표적이었다.
게다가, 한동화 감독의 전임인 신용균 감독과 마찬가지로 일본통이었던 이용일 당시 구단주 대행은 쌍방울의 첫 감독이었던 김인식 감독과도[7]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 결과 1995 시즌 연패를 거듭하며 하위권으로 추락. 결국 1995년5월 16일 감독에서 해임되었고[8] 프런트에게도 책임을 물어 사장과 단장이 동시에 해임되었다.
해임된 뒤, 신일고 감독으로 20년 만에 복귀했으며 프로야구 감독 출신이 고교 야구 감독을 맡는 첫 번째 사례였다. 1997년 신일고의 전국대회 3관왕을 이끌면서 지도력을 보였다. 그 당시 밑에 있던 선수들이 봉중근, 현재윤, 안치용, 김광삼이었다. 그리고 휘문고등학교 감독도 이어서 역임했다.
한동안 야구계에서 떠나 있다가 중국 프로야구 베이징 타이거스의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다시 야구계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하지만 곧 그만두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