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현 태생으로 양조업자 이케다 고이치로와 우메 사이에서 태어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1] 타다노우미(忠海) 중학교를 졸업한 뒤 도쿄 제1고등학교의 입학 시험에 응시했으나 2년 연속 낙방하여, 삼수 끝에 구마모토 제5고등학교에 진학했다.[1] 친구들보다 두 살 연상이었던 이케다는 동기생과 어울려 수업을 빠지고 술을 마시러 다니곤 했고 그 결과 4년만에 고등학교를 졸업했다.[1] 교토제국대학(현 교토 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이케다는 1925년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대장성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2년 뒤인 1927년에는 하코다테 세무서장이 되었고, 1929년에는 우츠노미야 세무서장이 되었다. 이들 자리는 출세 코스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고, 설상가상으로 이케다는 낙엽성천포창이라는 희귀병에 걸려 5년간의 투병 생활을 해야 했다.[2] 투병 중 아내 나오코가 죽고 이케다는 고향 히로시마로 돌아와 가족들의 보살핌을 받았고 기적적으로 병에서 회복했다. 1934년 대장성에 복직한 이케다는 1941년 주세국 국세과장의 자리에 올랐다. 1947년에는 도쿄대학 법학부 출신이 지배하던 대장성에서 최초로 교토대학 출신의 사무차관이 되었다.[3] 이케다는 관직에서 물러난 뒤 고등학교 동창생 사토 에이사쿠의 권유로 1949년 중의원 총선거에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어 정치권에 입문하였다. 같은해 요시다 시게루 내각에서 대장 대신으로 취임, 1950년2월 17일부터 4월 11일까지 통상산업대신 겸임과 동시에 제4차 요시다 내각에서 대장 대신으로 유임되었다.
1964년 10월 25일, 도쿄 올림픽 폐회식 다음날에 사의를 표명, 후임 자민당 총재에 사토 에이사쿠를 지명했고 같은해 갑작스런 건강상의 이유로 병원에 입원하여 12월에 퇴원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65년 8월에 병세가 점점 악화되어 수술을 받은 이후인 8월 13일폐렴에 의해 사망했다. 향년 65세.
그는 사토 에이사쿠와 함께 요시다파(吉田派)의 대표적 인물로서, 요시다 시게루의 최측근으로 연합국과의 강화, 냉전 하의 미·일 관계 구축과 동시에 전후 일본 경제의 재편성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전임 총리인 기시 노부스케 시절의 주요 정치적 쟁점이었덙 미일안보조약 개정 문제과 헌법 개정 문제 등으로 격화된 정치적 쟁점에서 한 발짝 물러나, 경무장·경제성장노선을 주요 정책으로 삼아, 10년 안에 국민의 평균소득을 2배로 늘린다는 소득 배증 계획을 통한 고도 경제 성장 정책을 추진하였다. 기시 내각시절에 격화된 보혁 갈등을 완화시키고, 소위 '정치의 계절'에서 '경제의 계절'로 사회 분위기를 전환하는 등, 현재 일본의 고도 경제 성장 진전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정치가 중 한 명으로 여겨지고 있다.
가족 관계
이케다는 1927년메이지 유신의 주역 중 한 사람인 히로사와 사네오미(広沢真臣)의 손녀이자 히로사와 킨지로(広沢金次郎) 백작의 셋째딸 히로사와 나오코(広沢直子)와 결혼했다.[4] 나오코는 이케다가 투병 중이던 1929년 급사했다. 이후 이케다는 어머니 쪽의 친척으로 의사의 딸인 오오누키 미츠에(大貫満枝)와 결혼했고 세 딸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