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사쓰마번 무사 출신인 사이고 다카모리 등과 뜻을 같이하며 "막부 타도 운동"을 이끄는 개혁파의 중심 인물로 성장하였다. 1866년 유신 이후 태정관 정권이 수립된 뒤에 참의(參議)가 되어 과감한 제도 개혁을 단행하였다. 메이지 6년 정변으로 정한론을 주장한 사이고 다카모리 일파가 하야한 뒤는 정부의 핵심 인물로서 지조(地祖) 제도 개혁, 식산진흥책 등을 추진하였다.
사쓰마국(현재의 가고시마현)에서 태어난 그는 일찍부터 정치적 안식을 보여 일본에서 가장 크고 세력있는 봉건 영토이자, 도쿠가와 반대 세력인 사쓰마번의 지도적 인물이 되었다. 또한 다른 봉건 영토 조슈번은 사쓰마 번의 도쿠가와 반대 세력을 분배함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친밀하지 못한 사이가 되었다.
이 상황은 오쿠보와 다른 사쓰마 번 정부의 세력있는 지도자 사이고 다카모리가 양쪽의 군대가 힘을 합쳐 도쿠가와 막부를 물리치자고 결심시킨 교정이었다.
1868년1월 3일, 사쓰마번과 조슈번의 군대가 교토 고쇼를 공략하였으며,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 유신을 선언하였다. 메이지 유신 정부의 구성원이 된 오쿠보는 이와쿠라 도모미를 중심으로 기도 다카요시,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서양 각국을 둘러보았다. 귀국 후에 오쿠보는 일본의 빠른 경제 발전을 납득시켰다. 이를 끝으로 기술 학교들의 설립, 국채의 승인, 개인적 사업의 임시세, 정부에 의한 공장들의 건설과 경영을 후원하였다.
오쿠보, 사이고, 기도의 삼두마차는 과도 정부를 수립했다. 1873년 동료 사이고 다카모리가 조선을 정벌하자는 정한론을 주장하자 이에 오쿠보는 일본 국내의 개혁과 성장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일본 정부가 오쿠보의 편을 들어 1894년까지 정한론을 고수하고 이에 사이고 다카모리는 정부에서 물러나 고향 사쓰마로 되돌아가 불만을 품은 무사들이 일으킨 1877년세이난 전쟁을 주도하였으나 반란은 곧 진압되고 사이고는 자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