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에서 19세기는 조선의 순조부터 대한제국의 고종에 이르는 시기이다. 정조의 사망으로 1800년 순조가 1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정순황후는 노론 벽파에 속하였으며, 정치적 입지 강화를 위해 당시 남인 사이에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전파되고 있던 천주교를 박해하여 신유사옥이 일어났다.[8] 순조는 1804년부터 친정을 하였으며 정순왕후의 세력을 견제하고자 노론 시파인 김조순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고, 이후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이 비변사를 장악하여 세도정치가 이루어졌다. 이후 헌종, 철종 시기에 이르기까지 세도정치가 계속되었다.[9] 19세기 조선은 지역 차별과 삼정의 문란 등으로 인해 각종 민란이 끊이지 않았다. 1811년 일어난 홍경래의 난은 서북 지역에 대한 차별이 주요 원인이었고[10], 이 외에도 가혹한 수탈을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산으로 숨어 화전민이 되거나, 심할 경우 명화적이나 수적이 되는 일이 많았다.[11]조선 후기 민란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으며[12], 특히 1862년 삼남지방의 임술농민항쟁은 매우 큰 사회적 충격을 가져왔다.[13]1863년 철종이 후사없이 사망하자 인조의 후손인 고종이 즉위하였다.[14] 즉위 초기에는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하였으나, 일본의 대정봉환에 따른 국교 수립 요청과 운요호 사건 이후 강화도 조약 체결을 즈음하여 친정을 하였다.[15] 1897년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로 즉위하여 연호를 광무라 하였다.[16]
한편, 19세기는 과학의 여러 분야에서 중요한 발견이 이루어진 시기이기도 하다. 찰스 다윈은 1859년 《종의 기원》을 발표하여 생물 진화의 사실을 제시하고, 진화의 원인으로 자연 선택을 제시하였다.[17]루이 파스퇴르는 1861년 《자연발생설 비판》을 출간하여 발효와 부패는 미생물에 의한 것임을 증명하였고, 백신을 통한 전염병 예방법을 확립하였다.[18] 생물학의 발전에 힘입어 서양의 의학역시 발전하여 사망률이 감소함에 따라 인구가 증가하였다. 유럽의 인구는 19세기 동안 2억여 명에서 4억여 명으로 두 배가 되었다.[19] 물리학 분야에서는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이 맥스웰 방정식을 수립하여 전기와 자기가 동일한 현상임을 입증하고 전자기 복사를 예견하였다.[20]조사이어 윌러드 기브스는 열역학의 여러 법칙의 확립에 기여하였다. 그가 도입한 기브스 자유 에너지 개념은 오늘날에도 중요한 기초 과학 법칙으로 사용되고 있다.[21]
↑자연 선택은 생물의 진화 과정에서 환경 요인이 압력으로 작용하여 결국 생물이 자연 환경에 적응하게 되는 진화의 과정이고, 스펜서의 적자생존은 우월한 민족이나 국가가 결국 다른 약소 민족이나 국가를 지배하는 것이 자연의 섭리라는 주장이다.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자신의 작업에 대해 평가하면서 “마르크스는 사회적 현실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직접적인 인식에서 떠나 사회를 하나의 체계를 통하여 보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보여준 최초의 사람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 기 소르망, 강위석 역, 《20세기를 움직인 사상가들》, 한국경제신문사, 2003년, ISBN8947520438, 133쪽
참조주
↑김인기, 《이야기로 풀어 쓴 세계사 4》, 지경사, 2008년, ISBN8931920466, 228 - 230 쪽
↑이른바 인간의 적자생존을 주장한 우생학과 관련해서는 다음 문헌을 참조할 것: Kevles, D (1998). In the Name of Eugenics: Genetics and the Uses of Human Heredity. Harvard University Press. ISBN978-0674445574
↑Cody, David. The growth of the British Empire. The Victorian Web, University Scholars Program, National University of Singapore, November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