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5년(성종 6)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지평, 교리를 거쳐 동부승지, 좌부승지, 이조참판, 예조참판, 대사헌, 우승지, 좌승지를 지내고 한 때 전라도관찰사로 선정을 베풀기도 했다. 연산군 때 형조참판, 병조참판을 하다가 무오사화 때 좌천되어 경상도관찰사로 있다가 병조참판, 호조참판, 형조참판, 이조참판으로 특진관을 겸하고 이조판서 등을 지냈다.[2] 당대의 유명한 학자인 신종호, 조위, 유호인 등과 함께 학문과 덕행으로 이름을 떨쳐 세자(연산군)의 신임을 받았다. 1489년에 《삼강행실》을 정리하였으며, 1504년에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이 되었다. 성종 때 윤비 폐위를 반대했기 때문에 갑자사화 때에는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는 연산군의 옳지 못한 정치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하였으나 이를 이루지 못하고 병으로 사망하였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