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주가 있던 지역은 유사 이래 마한의 북쪽지역이었다. 그 이북에는 고조선, 낙랑군이 있었다. 기원전 1세기 후반에 온조왕이 이끄는 부여족 일파가 한강 유역으로 남하하자 낙랑과 말갈의 침입으로부터 방패막이로 사용하려는 마한의 의도[1]로 서울 송파구, 강동구를 중심으로 백제를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백제는 한강 일대를 손안에 넣고 급속히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해 마한 연맹체를 노령산맥 남쪽으로 밀어냈다.
314년고구려미천왕이 낙랑군에 이어 대방군을 병합함으로써, 고구려와 백제는 예성강(백제의 패수)에서 국경을 접했다. 두 나라는 백제 근초고왕이 371년평양성을 공격해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이후 서로 영토를 뺏고 뺏기면서 항쟁을 벌이다가,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한성(漢城, 하남위례성)을 점령하고 백제를 현재의 경기도 지역에서 완전히 밀어내기에 이르렀다. 그 후 백제는 551년 한성 지역을 잠시 회복했지만 이내 신라가 점령해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한산주
한산주의 치소 일대는 고구려장수왕 이후 고구려가 점령하여 한산군(漢山郡)을 설치하였고, 백제 성왕 때 일시 회복했다가 553년 신라 진흥왕이 백제와의 동맹을 깨고 이 지역을 취하였다. 진흥왕은 이곳에 신주(新州)를 설치하여 백제로부터 빼앗은 지역을 관할하게 하였다.[2]557년(진흥왕 18년) 신주를 북한산(北漢山, 현 서울의 한강 이북 지역)으로 옮겼는데,[3] 이후에는 전세(戰勢)에 따라 치소(治所)가 이동해 568년(진흥왕 29년)에는 남한강의 남천(현 경기도이천시)으로 옮겼다가[4]604년(진평왕 26년)에 다시 한산정(漢山停, 현 경기도하남시 일대)을 설치하였다.[5][6]660년에 백제가 멸망한 후 주의 거점과 명칭이 한산주로 정리된 것으로 보인다.[7]757년(경덕왕 16년)에 전국의 행정구역 명칭을 중국식 한자어로 고치면서 '한산주'도 '한주'로 개칭되었다. 혜공왕 때 행정구역 명칭을 원래 명칭으로 되돌렸다고 한다. 고려 때에 광주(廣州)로 개칭하였다.
한산주는 삼국 통일 전쟁 및 나당 전쟁 시기에도 영역이 계속 변화하였는데, 황해도 지역은 나당 전쟁 직후까지 군·현이 설치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가 이후 영역을 정리하고 군·현을 설치하였다. 694년(효소왕 3년)에 송악성(松岳城 : 개성시)과 우잠성(牛岑城)을, 703년(성덕왕 2년)에 개성(開城)을 쌓았고, 748년(경덕왕 7년)에 14개 군·현을 설치하였으며, 762년에도 6개의 성을 쌓았다. 헌덕왕 때 취성군(取城郡)을 설치하고 826년패강에 길이 300리의 장성(長城)을 쌓아 한산주의 북쪽 경계가 완성되었다.
신라는 황해도지역을 영토화하면서 이를 방어하고 동시에 적극적으로 북방으로의 진출을 꾀하고자 고구려의 옛 수도인 평양 부근[8]에 패강진을 설치했다. 이로써 신라는 살수(薩水)유역까지 가시권에 넣게 되었고 발해와는 평북일대를 중립지대로 두고 접했다.[9] 나중에 신라가 쇠퇴하면서 이 지역은 무주지(無主地)가 되어 황폐화되었다가 후삼국시대에 고려의 영토가 되어 서경(西京)으로 승격되었다.
한산주 이후
신라말이 되자 군웅의 할거와 토착호족에 의한 지방자치가 시작되었다. 지금의 안성일대인 죽주에서는 기훤(箕萱)의 세력이 웅거하고 있었고 패서일대에서는 박지윤과 유천궁, 용건 등의 호족들이 군집하고 있었다. 특히 박지윤은 그 출신이 신라왕실의 후손임에도 고구려의 장군인 대모달(大模達)을 자칭하고 있을 만큼 이 지역은 반(反)신라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중에 궁예는 자신의 새나라를 세우면서 이점을 적극 활용해 고려를 칭했다. 궁예는 처음에 패서일대인 개성을 중심으로 나라를 세워 한반도의 중부지역을 차지했다가 나중에 철원으로 옮겨 마진, 태봉으로 바꾸고 과도한 중앙집권제를 추구하는 등 패서호족의 반감을 사서 결국 왕건에게 나라를 뺐기고 명성산(鳴聲山)에서 패사했다. 왕건의 고려는 다시 패서지역에서 후삼국 통일의 기반을 닦았다.
983년(고려 성종 2년)에 12목이 설치되면서 옛 한산주에는 양주(楊州)·광주(廣州)·해주(海州)·황주(黃州)의 4주가 설치되었고, 995년(성종 14년)에 10도를 두면서 관내도(關內道)가 설치되었다. 5도 양계로 이행한 후 관내도는 개경일대의 경기를 제외하고 양광도와 서해도로 분할되었다. 조선시대에 각각 지금의 경기도와 황해도가 되었다.
소속 군현
757년 경덕왕이 지명을 고쳤을 당시 한산주에는 1개 소경, 27개 군, 46개 현이 소속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지리지〉에 전하는 한주 조에는 1개 소경, 28개 군, 49개 현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헌덕왕 때 설치된 취성군과 그 소속 현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삼국사기》〈지리지〉에는 한산주 소속 군현의 옛 지명을 옛 백제 땅이었던 곳도 고구려 시기의 지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즉, 《삼국사기》나 《세종실록 지리지》 등에서 쓴 "本高句麗"는 해당 지역이 신라가 영토로 흡수하기 전 고구려 땅이었다는 뜻이지, 그렇게 쓴 지역이 전부 본래부터 고구려 땅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아래 표에서 특별한 표시가 없는 옛 지명은 모두 고구려의 지명이다.
↑18년(기원전 1년) 겨울 10월, 말갈이 습격을 하여 임금이 병사를 거느리고 칠중하(임진강)에서 맞아 싸웠다. 추장 소모(素牟)를 사로잡아 마한으로 보내고 나머지 적들은 모두 묻어 죽였다. 11월, 임금은 낙랑의 우두산성(牛頭山城)을 공격하려고 구곡(臼谷)에 이르렀는데, 폭설을 만나 돌아왔다. (원문: 十八年 冬十月 靺鞨掩至 王帥兵 逆戰於七重河 虜獲酋長素牟 送馬韓 其餘賊盡坑之. 十一月 王欲襲樂浪牛頭山城 至臼谷 遇大雪 乃還)《삼국사기》 제23권 백제본기 제1 시조 온조왕
↑14년 가을 7월,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를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 무력을 군주로 삼았다.(十四年 秋七月 取百濟東北鄙 置新州 以阿飡武力爲軍主)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4 진흥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