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부터 민델로 항은 대서양 횡단 항해의 중요성을 상실했다. 석탄에서 선박 연료로 석유로 전환, 다카르와 카나리아 제도와 같은 경쟁 항구의 부상, 항만 인프라 투자 부족 등이 그 원인이었다.[2] 대체로 건조한 기후 때문에 카보베르데는 1580년대와 1950년대 사이에 가뭄과 관련된 일련의 기근에 시달렸다. 카보베르데의 역대 최악의 기근은 1941~43년과 1947~48년에 두 차례 발생하여 약 4만 5천 명이 사망했다.[3] 예를 들어 포르투갈령 상투메 프린시페의 코코아 농장에서 계약 노동력을 받는 등 수천 명의 섬 주민이 이주했다.[4]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을 앞두고 그리고 전쟁을 계획하고 싸우는 사람들은 종종 기니비사우 해방의 목표를 카보베르데 해방의 목표와 연결시켰다. 예를 들어, 1956년 아밀카르와 루이스 카브랄은 기니비사우-카보베르데 아프리카 독립당(PAIGC)을 설립했다. 그러나 카보베르데에는 무력 충돌이 없었고, 결국 1974년 4월 카네이션 혁명 이후 포르투갈과의 협상으로 카보베르데의 독립이 이루어졌다.[5] 1974년 8월, 포르투갈 정부와 PAIGC 사이에 알제에서 기니비사우의 독립과 카보베르데의 독립권을 인정하는 협정이 체결되었다.[6] 1975년 7월 5일, 프라이아에서 포르투갈의 총리 바스코 곤살베스가 국회의장 아빌리오 두아르테에게 권력을 이양했고, 카보베르데는 독립했다.
카보베르데 섬 주민들은 더 높은 교육 수준을 가졌고 종종 포르투갈 영토의 낮은 수준의 행정 직책에 임명되었다. 이로써 그들은 리스본에 대한 충성심의 명성을 얻었다.[7]
↑António Costa Pinto, "The transition to democracy and Portugal's decolonization", in Stewart Lloyd-Jones and António Costa Pinto (eds., 2003). The Last Empire: Thirty Years of Portuguese Decolonization (Intellect Books, ISBN978-1-84150-109-3) pp. 22–24.
↑Alexander Keese, "The role of Cape Verdeans in war mobilization and war prevention in Portugal's African empire, 1955-1965." International journal of African historical studies 40.3 (2007): 497-511 onl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