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이우는 동유럽의 산업, 과학, 교육과 문화의 중요한 중심지이다. 키이우는 많은 첨단 산업, 고등 교육 기관과 역사적인 랜드마크의 본거지이다. 또한, 키이우 지하철을 포함하여 광범위한 대중교통 시스템과 기반 시설을 갖추고 있다.
키이우의 이름은 이 도시를 창건한 네 명의 전설적인 설립자 중 한 명인 키이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역사적 기간 동안, 동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인 키이우는 여러 번의 부각과 무명을 거쳤다. 키이우는 5세기 초 상업 중심지로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키이우는 스칸디나비아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사이의 거대한 교역로에 위치한 슬라브족의 정착지로, 9세기 중반에 바랑기아인 (바이킹)에게 함락될 때까지 하자르의 지류가 거주하였다.[11] 바랑기아인의 통치하에, 키이우는 최초의 동슬라브 국가인 키예프 루스의 수도가 되었다. 1240년 몽골의 침입으로 완전히 파괴된 이 도시는 이후 수 세기 동안 영향력을 거의 상실하였다. 처음에는 리투아니아, 다음에는 폴란드, 그리고 결국 러시아와 같은 강력한 이웃 국가가 통제하는 영토 외곽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던 지역 중심지였다.[1]
키이우는 19세기 후반 러시아 제국의 산업혁명 기간 동안 다시 번영했다. 1918년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이 러시아 공화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후, 키이우는 수도가 되었다. 1921년부터 키이우는 붉은 군대에 의해 선포된 우크라이나 SSR의 도시였으며, 1934년부터는 수도가 되었다. 키이우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심각한 파괴를 겪었지만, 전후 몇 년 동안 빠르게 복구되어 소련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로 남아 있었다.
1991년 소련의 붕괴와 우크라이나의 독립 이후, 키이우는 우크라이나의 수도로 남아 다른 지역에서 온 우크라이나인 이주자들의 꾸준한 유입을 겪었다.[12] 우크라이나가 시장 경제 체제와 선거 민주제로 전환하는 동안, 키이우는 계속해서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도시였다. 군비 의존적인 산업 생산량은 소련 붕괴 이후 감소하여 과학 기술에 악영향을 미쳤지만, 서비스와 금융과 같은 새로운 경제 부문은 키이우의 급여와 투자의 증가을 촉진하고 주택과 도시 기반 시설의 개발을 위한 지속적인 자금을 제공하였다. 키이우는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친서방적인 지역으로 부상하였고, 유럽 연합과의 긴밀한 통합을 지지하는 정당이 선거 기간 동안 지배적이었다.
명칭
어원과 역사
키이우는 우크라이나어로 'Ки́їв'라 표기하며, 키릴 문자를 로마자로 옮기면 'Kyiv'가 된다. 'Kyiv'는 우크라이나 정부가 지정한 로마자 표기로서, 정부 문서나 법률 등에 공식적으로 사용되고 있다.[13]
키이우란 명칭은 키이우를 세웠다고 전해져 내려오는 신화 속 인물인 키이(우크라이나어: Кий)에서 유래하였다. 이 '키이의 성'을 슬라브조어로 옮기면 '키예부 고르두'(*Kyjevŭ gordŭ)가 되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어원으로 추정된다.[14]고대 동슬라브어로는 '키예부'(Kыѥвъ, Kyjevŭ)라고 적었으며, 로렌시아 연대기나 노브고르드 연대기 같은 옛 동슬라브 지역의 고문헌에서는 'Києвъ', 'Къıєвъ', 'Кїєвъ'라는 표기도 발견된다.[15]
러시아어로는 '키예프'(러시아어: Киев)라 부르며, 이를 로마자로 옮기면 'Kiev'가 된다. 'Kiev'는 영미권에서 일찍이 19세기부터 자리잡은 전통적인 표기로, 여러 문헌과 매체에서 사용되었다.[16] 하지만 1991년에 우크라이나가 소련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우크라이나 정부는 러시아어 표기를 버리고 각 지명을 우크라이나어 본연의 발음대로 재구하는 로마자 표기법을 1995년 10월부로 법제화하였다.[13] 이렇게 마련된 표기법은 우크라이나의 지명과 주소는 물론 인명과 거리 표지판에 이르기까지 여러 부문에 적용되어 정착되었다.
2018년부터는 우크라이나 외무부에서 '#CorrectUA'(우크라이나어 바로잡기), '#KyivNotKiev'(키이우는 키예프가 아닙니다)라는 표기 정정 캠페인을 개시해, 세계 각국에서 여전히 사용되고 있는 소련 시절의 우크라이나 지명 표기를 바꾸자는 운동에 나서기도 했다.[17][18][19][20] 이 같은 우크라이나 정부의 요청에도 남아 있던 'Kiev'라는 러시아어 표기 관행은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군사 개입을 계기로 우크라이나측 입장에 동조하는 움직임에 따라 자취를 감추었다.[21]
한국어 표기
한국어권에서는 러시아어 표기인 '키예프'가 보편화되어 있었다. '키예프'는 1920년대부터 사용된 관용적 표현으로,[7] '키에후', '키프', '키에프' 등으로 표기하다 1980년대에 들어 대한민국에서 '키예프'로 자리잡았다.[참고 1] 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도 러시아어에서 유래된 '끼예브'라는 문화어 표기가 사용되었다. 1998년 12월에는 대한민국 국립국어원이 정부·언론 외래어 심의 공동위원회 제25차 회의를 통해, 각국 수도 명칭의 한글 표기를 확정하는 가운데서 우크라이나 수도명을 '키예프'로 공식화하였다.[27] 이후 '키예프'란 표기는 표준국어대사전 표제어를 비롯하여 정부와 언론에서 두루 쓰이는 관행으로 자리잡아 왔다.[28]
하지만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군사 개입 이후 우크라이나 지명을 러시아어로 쓰는 문제에 대해서 우크라이나 정부 측이 도시명 표기 변경을 요청하였다.[29] 3월 1일,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관은 삼일절 축하 SNS 게시글에서 우크라이나 지명이 "침략국인 러시아 발음으로 한국에서 표기되는 사실은 우크라이나인에게 큰 상처와 아픔"이라는 뜻을 전하면서, 수도 명칭을 '키예프'가 아닌 '크이우'로 표기할 것을 제안하였다.[7]
대사관에서 제안한 '크이우'라는 한글 표기에 대해 국립국어원 측은 '키이우'가 적합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국립국어원은 "'Київ'의 'и'은 우크라이나에서 (한국어의) '으'와 '의' 사이로 발음되는데 한국인이 이해하기엔 어렵다"며, 외래어 심의위원회에서 마련한 〈우크라이나 외래어 표기지침〉에서 и은 '이'로 표기하도록 되어 있기에 '키이우'로 옮긴다고 설명했다.[7] 우크라이나 대사관 측 역시 키이우라는 표기와 발음에 대해서 "그것도 맞다"는 입장을 밝혔다.[30]
2022년 3월 2일, 대한민국 정부는 우크라이나 지명을 러시아어 발음으로만 표기하던 관행에서 벗어나 우크라이나어 발음이나 기존 표기를 병기하는 것을 검토한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이는 러시아의 침공에 맞서 싸우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연대성을 표하고, 우크라이나의 국민 정서까지 고려한 조치로 해석되었다.[29]국민일보의 기사에 따르면 국립국어원은 '키예프'는 관용적 표기에 해당하며, 우크라이나어식 표기와 러시아어식 표기가 모두 가능하다고 밝혔다. 또한 '크이우'는 틀린 표기이며 '키이우'가 맞는 우크라이나어식 표기라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31]조태용 의원에 따르면 정부, 언론, 외래어 심의위원회가 회의를 열어 기존 러시아어식 표기인 '키예프'를 우크라이나어식 표기인 '키이우'로 변경할 계획이라고 하며,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관이 '크이우' 표기를 계속 원할 경우 이 역시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32]
이런 한글 표기 논쟁에 대해 언론은 3월 1일 KBS 뉴스 9에서 앵커가 우크라이나의 지명은 우크라이나어 기준의 표기로 보도할 것[33]을 전한 이후, 키예프(키이우)나 키이우(키예프) 등의 병기 방식이 여러 언론사에서 사용되고 있다. 3월 2일에는 YTN[34], 경향신문[35]이 키예프 대신 키이우라는 표기를 사용할 것이라고 잇따라 선언했다.
3월 11일, 국립국어원은 그동안 관행적으로 사용했던 러시아어식 표현인 키예프도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기로 했다.[36]
기후
키이우는 대륙성 습윤 기후이다. 가장 따뜻한 달은 6월부터 8월 사이로, 기온은 평균적으로 13.8도에서 24.8도 사이이다. 가장 추운 달은 12월부터 2월까지로, 평균적으로 -4.6도에서 -1.1도 사이의 기온을 나타낸다. 가장 더웠던 때는 1936년 7월 31일에 기록된 39.4도이고, 가장 추웠던 때는 1929년 2월 7일과 2월 9일에 기록된 -32.2도이다.
눈은 보통 11월 중순부터 3월말까지 쌓여 있으며, 무상일수(無霜日數)는 연평균 180일이나, 최근에는 200일을 넘는다.
출처 1: Pogoda.ru.net (평년값: 1991년~2020년),[37] 우크라이나 중앙지구물리관측소 (극값: 1881년~현재)[38][39]
출처 2: 세계기상기구 (상대습도: 1981년~2010년),[40] 덴마크 기상학회 (일조시간: 1931년~1960년)[41]
역사
키이우는 동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의 하나로 5세기경 동슬라브인들의 무역기지로 역사를 시작했다. 10세기에서 12세기까지 키예프 루스의 수도로 동슬라브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도시는 1240년 몽골의 침입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 후 리투아니아 대공국, 폴란드를 거쳐 러시아 제국의 영토가 되었으며, 19세기 말 러시아 산업 혁명의 한 중심지가 되었다. 소련이 수립되자 키이우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내에서 중요한 도시가 되었으며, 1934년에 우크라이나의 수도가 하르키우에서 이 곳으로 옮겨왔다. 이 기간 중에 인구는 급속도로 팽창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도시는 크게 파괴되었으나, 전후 급속한 복구를 이룩했으며, 소련 연방 내에서 제3의 대도시가 되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터졌을 때, 사고 현장은 키이우에서 불과 100km 북쪽으로 떨어진 곳이었으나, 마침 북쪽으로 바람이 부는 덕분에 키이우는 다량의 방사능 오염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대신 인접국인 벨라루스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2001년의 인구 조사에서 키이우 인구는 261만 1300명으로 나타났다. 이 조사에서 121만 9000명이 남자(46.7%), 139만 3000명이 여자(53.3%)였다. 우크라이나 전체의 인구는 1992년 이래 계속 줄어들고 있지만, 키이우시의 인구는 조금씩 증가하고 있다.
이 조사에 의하면 키이우에는 130개 이상의 민족이 거주하고 있다. 키이우에서 가장 큰 민족은 우크라이나인이다. 키이우의 우크라이나인은 211만 0800명으로 키이우 인구의 82.2%를 차지한다. 러시아인이 그 다음으로 33만 7300명 (13.1%), 유대인 1만 7900명 (0.7%), 벨라루스인 1만 6500명 (0.6%), 폴란드인 6,900명 (0.3%), 아르메니아인 4,900명 (0.2%), 아제르바이잔인 2,600명 (0.1%), 타타르인 2,500명 (0.1%), 조지아인 2,400명 (0.1%), 몰도바인 1,900명 (0.1%) 순으로 차지하고 있다.
언어는 우크라이나어와 러시아어가 키이우에서 주로 쓰이고 있으나, 러시아어가 주민의 생활에서 더 일상적으로 쓰인다.
9세기 이후 키이우는 동유럽에서 지적 발달의 중요한 중심지였다. 17세기 이후, 키이우의 Mohyla 아카데미는 많은 유명한 학자들을 준비했다. 그리고 오늘날 키이우에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큰 과학교육센터가 하나 있다. 키이우에는 많은 수의 학교, 체육관, 학회, 약 70개의 대학교가 있는데 그 가운데에는 국가항공대학을 포함한 국가교육대학, Dragomanov, 키이우 국립 대학인 타라스 셰우첸코 대학, 키이우 국립 음악학교, 키이우 국립 경제대학, 키이우 Mohyla 아카데미, 우크라이나의 국가기술 대학, 우크라이나 국립 과학 아카데미, 건축/건설 아카데미, 농업 정부과학 아카데미, 키이우 내부업무 국립대학, 키이우 예술 아카데미, 그리고 국립 의과 대학의 이름을 딴 Acad. Bogomolets, 국제 솔로몬 대학 등이 있다.
1991년 우크라이나의 독립 이후 키이우는 우크라이나의 수도로서 새 단장을 시작하였다. 시내 중심가, 특히 흐레샤티크 거리와 독립광장(Maidan Nezalezhnosti) 주변은 잘 정돈되고 개보수되었으며 옛 건물들이 복원되었다. 독립광장은 2004년 말 오렌지 혁명 때 시위 현장으로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스뱌토고소피아 대성당 (세계문화유산): 성 소피아 수도원은 키이우를 대표하는 사원으로 11세기에 원형이 만들어졌으나 17세기에 이르러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내부는 5개의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모자이크와 야로슬라프 공의 아내와 딸의 일상생활을 그린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다. 또한 공의 대리석관도 그대로 안치되어 있다. 여러 성상들도 내부장식이 한몫을 하고 있다.[44]
중앙공원에서는 형제애 아치(Arch of Brotherhood) 부근에서 드니프로강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이 공원에는 ‘용감한 축구선수 기념비’라는 다소 색다른 기념비가 있는데 이것은 나치 독일 점령군이 이 지역의 축구 팀에게 독일 팀을 상대로 ‘죽음의 시합’을 벌일 것을 강요했으나 향토애에 자극받은 선수들은 온 힘을 다하여 뛰었고 그 결과 3 : 0으로 이겼으나 결국 처형되었다는 이야기를 지닌다.[45] 성 안드레이 교회는 외부장식이 뛰어난 교회이며, 중앙의 큰 돔은 높이가 60m 정도 되고 이곳을 중심으로 네 귀퉁이에 녹색의 둥근 지붕이 각각 금으로 장식되어 있다. 또한 벽면은 밝은 파란색을 기조로 하고 있어서 하얀 기둥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교회는 바로크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내부의 벽화 색깔 등이 선명하여 신선함이 느껴진다.[46] 오페라 발레 극장은 1894∼1897년에 걸쳐 빈의 건축가 페르너와 게르너가 설계하여 건설된 극장으로 내부구조는 5층으로 되어 있으며 빈의 바로크 양식과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양식을 함께 감상할 수 있는 건물이다. 정면에는 음악과 무용, 희극과 비극의 신을 나타내는 조각상이 서 있으며, 고골리와 푸슈킨의 흉상도 있다.[47]
각주
내용주
↑1920년대 이후 언론에서 '키예프'란 표기가 자리잡기 전까지 사용한 표기는 다음과 같다.
↑Cappelen, John; Jensen, Jens. “Ukraine – Kyiv”(PDF). 《Climate Data for Selected Stations (1931–1960)》 (덴마크어). 덴마크 기상학회. 332쪽. 2013년 4월 27일에 원본 문서(PDF)에서 보존된 문서. 2016년 4월 1일에 확인함.
↑Vilenchuk, S. R.; Yatsuk, T.B. (eds.) (2009). 《Kyiv Statistical Yearbook for 2008》. Kiev: Vydavnytstvo Konsultant LLC. 213쪽. ISBN978-966-8459-28-3.
↑Kudritskiy, A. V. (1982). 《KIEV entsiklopedicheskiy spravochnik》. Kiev: Glavnaya redaktsia Ukrainskoy Sovetskoy Entsiklopedii. 3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