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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재기가 풍부해, 1200년 4월에 황태자가 되었고 1210년 11월, 고토바 천황의 강한 의향에 의해 쓰치미카도 천황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온화한 쓰치미카도 천황과는 반대로 격렬한 천성의 소유자라고 기록되어 있고 고토바 상황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양위한 쓰치미카도 상황에게는 권력이 없었고 고토바 상황에 의한 원정이 계속되고 있었다.
직접 정무를 맡지 않은 천황은 왕조 시대의 유직고실(옛날의 조정이나 무가의 관직·법령·의식·의상·집기 등을 연구하는 학문) 연구에 심취했고 막부에 대항해 조정의 위엄을 나타내려는 목적으로 "금비초"를 저술했다. 또 아버지의 영향으로 단가나 시에도 열심이었고 후지와라노 사다이에를 스승으로 삼고 시를 짓는 법을 배웠으며 후지와라노 도시나리나 후지와라노 다메이에와도 친교가 있었다. 가집으로서는 "준토쿠 원가집"이 있고 시 평론서로는 당시의 시 평론을 대성한 "팔운어초"가 알려져 있다.
부상황(쓰치미카도 천황)의 막부 토벌 계획에 참가했고 이를 위해 1221년 4월에 아들인 가네나리 친왕(주쿄 천황)에 양위해 상황으로 물러났다. 부상황 이상으로 가마쿠라 막부 타도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5월에 조큐의 난을 일으켰지만 막부를 쓰러뜨리는 것은 실패했다. 난 이후 7월 21일, 상황은 교토에서 쫓겨나 사도가섬에 유배되었다. 유배된지 21년 후인 1242년 9월 12일에 사도가섬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