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산영우(潙山靈祐, 771~853)는 중국 당나라 시대의 선사로 위앙종의 만든 앙산혜적의 스승이다. 또한, 위산영우 자신은 위앙종과 임제종의 9대 조사인 백장회해, 임제종의 10대 조사인 황벽희운의 제자였다.[1]
제자로는 앙산혜적이 있다.[2] 그래서 위산영우의 "위"와 앙산혜적의 "앙"을 따서 위앙종이 된 것이다.[3]
15세에 건선사에서 승려가 되었다. 23세에 백장회해의 제자가 되었다.[4]
당나라 원화 말년(806~820)에 백장회해의 명을 받아 장사로 가던 중에 대위산을 지날 때였다. 군민이 다투어 모여들었다. 여기에 절을 짓고 40여년 불법을 설하였다.[5]
당나라 대중 7년(853) 정월에 아무런 병도 없이 앉아서 입적했다. 나이는 83세였다.[6]
제자인 앙산혜적이 위산영우에게 참 부처가 어디에 머무느냐고 물었다. 위산영우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생각하되 생각함이 없는 묘로써 신령한 불꽃의 무궁함을 돌이켜 생각하여 생각이 다하고 근원에 돌아가면성품과 형상이 항상 머물며 이치와 현상이 둘이 아니며 참 부처가 여여하니라
앙산혜적이 문득 깨달았다.[7]
위산영우(山靈祐, 771~853) 선사는 황벽 선사와 함께 백장 선사의 제자로서 선종의 5종중에서 위앙종을 창시한 조사다.
그의 제자 혜적 선사는 앙산에서 선을 선양하여 위산영우와 앙산혜적의 파를 위앙종이라 부르게 되었다.
스승 위산과 제자 앙산의 선사상을 말하는데, 위산의 ‘위(쓳)’자와 앙산의 ‘앙(仰)’자를 따서 ‘위앙종’이라고 한다.
15세에 건선사의 법상(法常)에게서 스님이 되고, 23세에 백장회해 선사의 제자가 되었다.
원화 말년(806~820)에 백장 선사의 명을 받아 장사로 가던 도중에 대위산을 지나다가 잠간 머무르니 군민이 다투어 모여 들었다. 드디어 절을 짓고 선과 교를 40여 년 동안 설하다가
대중 7년(853) 정월에 아무런 병도 없이 앉아서 입적하니 세수가 83세였다.
위산 선사에게 앙산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참 부처가 머무는 곳입니까?” 위산 선사가 말씀하였다. “생각하되 생각함이 없는 묘로써 신령한 불꽃의 무궁함을 돌이켜 생각하여 생각이 다하고 근원에 돌아가면 성품과 형상이 항상 머물며 이치와 현상이 둘이 아니며 참 부처가 여여하니라.” 앙산스님이 그 말을 듣고 몰록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