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산 김씨(善山金氏)는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선산의 고호가 일선이어서 일선 김씨(一善 金氏) 라고도 불리었다.
신라 대보공 김알지의 후예로 고려 삼중대광 문하시중(三重大匡 門下侍中)인 선주백(善州伯) 김선궁(金宣弓)의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선산을 본관으로 세계를 이어 왔다.
또, 신라 원성왕 김경신(金敬信)의 후예로 좌복야(左僕射) 김한충(金漢忠)의 후손인 화의군(和義君) 김기(金起)가 고려 말 선산으로 낙향하면서 후손들이 선산을 본관으로 삼았다. 이들은 이조(異祖) 동본동성(同本同姓)이다.
우리나라 국내의 성씨 가운데 조상이 서로 다른 데도 불구하고, 같은 지역에 뿌리를 두고 같은 성씨를 쓰며 마치 두 집안이 동성동본(同姓同本)인양 오인을 받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선산 김씨(善山 金氏)도 그중의 하나이다. 선산 김씨(善山 金氏)는 김선궁(金宣弓)계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김한충(金漢忠)계는 남한 인구 조사에서 파악되지 않고 있으며, 다만 김한충 계열 중 일제시대에 경순왕의 8자라는 김추(金錘. 추정)를 시조로 소원시켜 분적한 후손들만 집계되고 있다.[1][2][3]
이 둘을 구분하기 위해 김선궁(金宣弓) 계통을 일선 김씨라 하고, 김한충(金漢忠) 계통 중 김추(金錘. 추정)를 시조로 소원시켜 분적한 계열을 들성 김씨라 한다.[4]
이와 같이 선산 김씨가 이조(異祖) 동본동성(同本同姓)이 일어나게 된 것은, 선산(善山)에 뿌리를 두면서부터이다. 선산(善山)의 고호가 일선(一善)이어서 본관을 일선(一善)으로 사용하다가, 조선조에 들어 선산으로 지명이 바뀌면서 혼동이 발생되었다.
선산(善山)은 본래 신라 눌지왕 때 일선군(一善郡)이라 하였으며, 614년(진평왕 36)에 일선주(一善州)로 승격되었다가 687년(신문왕 7)에 폐지되었다. 757년(경덕왕 16) 숭선군(崇善郡)으로 개칭했다가, 995년(성종 14)에 다시 선주(善州)로 고쳤으며, 1018년(현종 9) 상주의 속현이 되었다.
1143년(인종 21)에 일선현(一善縣)으로 승격되었으며, 다시 지선주군사(知善州郡事)로 승격되었다. 조선시대 군현제 개편에 의해 1413년(태종 13)에 선산군(善山郡)으로 되었다가 2년 뒤 선산도호부(善山都護府)로 승격되었다.
1896년 경상북도 선산군(善山郡)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통폐합에 따라 선산면, 옥성면, 도개면, 해평면, 산동면, 고아면, 구미면, 장천면, 무을면이 되었다. 1963년에 구미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1978년에 시로 승격하여 분리되었다. 1979년에 선산면이 선산읍으로 승격했다. 1995년 전국 행정구역 개편으로 구미시와 선산군이 통합하여 새로운 구미시가 되었다.
시조 김선궁(金宣弓)은 초명이 김선(金宣)이며, 고려조에 삼중대광 문하시중(三重大匡 門下侍中)을 지내고 대승(大丞)에 추증되었다. 선주백(善州伯)에 봉해지고 순충공(順忠公)의 시호가 내렸다.[5]
문헌에 의하면 고려 태조가 백제를 정벌할 때 숭선(嵩善. 지금의 경북 구미시) 지방 전투에 병사를 모집함에 김선궁(金宣弓)이 고을 아전(衙前)으로써 응모하니, 고려 태조는 자신이 쓰던 활 어궁(御弓)을 하사하고 이름도 선궁(宣弓)이라 지어 주었다. 전쟁에서 공을 세워 시중(侍中)에 오르고 선주백(善州伯)에 봉해졌다. 선주(善州)는 일선(一善)의 고호이다. 아들 김봉문(金奉文)도 아버지 뒤를 이어 일선(一善)에서 아전(衙前. 지방 지배자)이 되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관향을 일선(一善)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다가, 조선 태종 때 선산(善山)으로 개칭됨에 따라 선산(善山)으로 하였다. 혹칭 일선 김씨(一善 金氏)라 한다.[6]
김선궁의 《순충공 신도비명》(順忠公 神道碑銘)에도 처음 적(籍)을 일선(一善)에 두어 세계(世系)를 이어 왔으나, 조선 태종 때 지명이 선산(善山)으로 개칭됨에 따라 관향을 선산(善山)으로 하였다고 하였다.[7]
14세 김제(金齊)는 고려 조봉랑 지평해군사로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군청벽에 도해 벽상시 27자를 남기고 바다로 들어갔다. 예조참판에 증직되고 시호가 충개공이며 안동 고죽서원, 고창 운곡서원, 울진 운암서원에 배향 되었다.
[ 平海海上 ] 평해해상
呼船東問魯連津(호선동문노연진) 배를 불러 동쪽 노중련의 나루를 물으니, 五百年今一介臣(오백년금일개신) 오백년 고려조의 한사람 신하로다. 可使孤魂能不死(가사고혼능불사) 외로운 이 영혼이 죽지 않고 남는다면, 願隨紅日照中垠(원수홍일조중은) 붉은 해를 따라가 님 계신곳 비추리.
14세 김주(金澍)는 김제(金齊) 아우로 고려조에 등과하여 벼슬이 예의판서로 하절사로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조선이 개국하자 서신과 의복을 아내에게 보내고 돌아오지 않았다. 선산 월암서원에 배향 되었다.
[ 鴨綠江別書狀官 ](압록강별서장관) 서장관에게 보낸 압록강 고별 편지
隴樹蒼蒼塞日昏 (롱수창창새일혼) 언덕위의 푸른나무 해를 막아 어둡고,
白山雲雪照離樽(백산운설조이준) 백두산의 구름과 눈 이별의 술잔에 비취네
君行莫恨天涯別(군행막한천애별) 그대는 가서 천애의 이별을 한탄마오
我是歸人亦斷魂(아시귀인역단혼) 나는 이에 살아서 돌아가나 혼은 죽었네
김선궁의 손자 김흥술(金興述)은 삼사우윤(三司右尹) 김봉문(金奉文)의 아들로, 호장(戶長)을 역임하고 일파를 이루었다. 특히 김흥술의 13세손 김숙자(金叔滋)와 그의 아들 김종직(金宗直)은 가문을 빛낸 인물이 되었다.
김숙자(金淑滋)는 야은(冶隱) 길재(吉再)로부터 조선 성리학의 정통을 이어 받았으며,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 등을 역임하고, 낙향해서는 조선 성리학 발전에 큰 업적을 쌓았다. 낙봉서원에 배향되었다.
김종직(金宗直)은 조선 초기 성리학적 정치질서를 확립하려 했던 사림파의 사조(師祖)로 공조참판·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낙향해서는 성리학적 향촌질서를 수립하는 데 주력하면서,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김일손(金馹孫) 등 여러 제자들을 가르쳐 중앙 관료로 대거 진출시켜 사림파를 형성해 훈구파와 대립하다 무오사화를 당하여 엄청난 화를 입었다. 문충공(文忠公)의 시호가 내려지고, 영남 사림파의 종장(宗匠)이 되었으며, 금오서원(金烏書院)등에 배향되었다.
김흥술의 후손 김교(金嶠)는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서(判書)였으며, 공신으로서 선산부원군(善山府院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양양공(良襄公)이다.
김선궁의 후손 김광발(金光發)은 벼슬이 경력(經歷)이었으며, 일파를 이루었다.
시조 김한충(金漢忠)은 신라 대보공 김알지의 후예로,[8] 시호는 원평공(元平公)이다.
경순왕의 당제(堂弟)로 931년 2월 고려 태조가 신라를 방문하고 귀국할 때 볼모가 되어 고려 왕건을 따라가 고려조에 공신이 된 김유렴(金庾廉)의 고손이다.[9]
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차례 승진하여 1087년(선종 4) 합문인진사(閤門引進使) 상경차도위(上輕車都尉)가 되어 요나라에 다녀오고, 이어 형부시랑·예부상서를 거쳐 추밀원사·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역임하였다.
1097년(숙종 2) 동북면병마사로 덕원(德源) 지방을 노략질 하던 여진을 토벌하여 공을 세우고, 1107년(예종 3 윤관(尹瓘)이 여진을 정벌할 때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로 출정하여 공을 세웠다.[10]
그러나 그의 부인이 문종(文宗) 비첩의 딸이었으므로 대성(臺省) 같은 청요직에는 취임하지 못하였다. 3남 2녀를 두었다.[11]
이후 세계가 실전되고 고려말 화의군(和義君) 김기(金起)를 1세조(世祖)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그는 중서령 김성원(金成元)의 아들로 고려말 출사하여 광주목사(廣州牧使)를 역임하고 화의군(和義君)에 봉해졌다. 기울어져 가는 고려의 사직을 개탄하여 관직을 버리고 불사이군(不事二君) 정신으로 낙향하여 선산군 옥성면 포상동(浦上洞) 하송산(下松山) 아래에 터를 잡고 살다 여생을 마쳤다. 화의(和義)는 선산(善山)의 별호인 관계로 후손들이 본관을 선산(善山)으로 하였다.
후손들이 번성하면서 비좁은 골짜기를 벗어나 청룡산과 당산 줄기가 사방 20리나 병풍처럼 둘러싸인 남쪽 들판으로 옮겨 평성(坪城)이라 명하고, 정착하여 500여년 세거지로 명성을 드높였다. 혹칭 평성 김씨(坪城 金氏) 또는 들성 김씨라고도 한다.
화의군 김기(金起)의 5대손 김취문(金就文. 1509 ∼ 1570)은 호가 구암(久菴)으로 청백리에 선정되고 강원도 관찰사 대사간을 역임하였는데, 그의 저서 《구암집》에 선산 들성 김씨의 먼 조상의 휘가 김한충(金漢忠)이라 하였다.[12]
김선궁계 선산(일선)김씨 대동보 경오보(庚午譜, 1690년)에 의하면 판서공 김원로의 사위 김기(金起)는 경주인(慶州仁)으로 고려 추밀사 김한충(金漢忠)의 후손으로 선산(善山)으로 개본(改本)하였다고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 말엽에 검교중랑장을 지낸 16세 '김문'(金文)은 슬하에 네 아들 김성원(金成元), 김성부(金成富), 김성룡(金成龍), 김성여(金成呂)를 파조로 하여 4대파로 분파하였다.
시조 김추(金錘)는 경순왕과 고려 태조의 맏딸인 낙랑공주 왕씨 소생의 7자로 상서령(尙書令)을 지내고 일선군(一善君)에 봉해졌다고 한다.[15]
조선 후기 1784년 개성 어느 산기슭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는 《김은열 묘지명》에 경순왕의 8자가 김종(金鐘)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후 경주 김씨 일문 족보류에 경순왕의 8자들이 등재되기 시작하였는데, 족보에 옮기는 과정에 서차가 바뀌고, 이름을 개명하고, 시호를 작호하는 등 가필을 심하게 하였는다. 8자 김종(金鐘)도 7자라 하고 이름도 김추(金錘)로 개명하고, 시호를 일선군(또는 삼척군)으로 작호하는 등 가필을 심하게 하였다.
이러한 《김은열 묘지명》 및 경순왕의 8자들에 대해서 『고려사』 등의 문헌은 물론이고, 그 어떤 금석문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삼척 김씨(三陟 金氏)에서는 시조 김위옹(金渭翁)의 아버지가 경순왕의 8자 삼척군(三陟君)[또는 일선군(一善君)] 김추(金錘)라 한다.
그러나 《증보문헌비고》·《조선씨족통보》등의 문헌에 김추(金錘)를 시조로 하는 김씨(金氏)계는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김추(金錘)를 시조로 하는 김씨 계에 대해서는 각종 자료 및 견해가 난무하는 관계로 좀더 고증을 거쳐야 될 것으로 보인다.[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