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군(東海郡)은 중국의 옛 군이다.
진나라의 담군(郯郡)을 고제가 개명해 설치했으며, 초왕 한신의 봉토였다. 한신이 모반혐의로 회음후로 격하되고 초나라를 초나라와 형나라로 나누었을 때 동해군은 초나라에 속했다.[1][2] 경제 3년(기원전 154년) 초왕 유무의 죄를 빌미로 동해군을 설군과 함께 초나라에서 뺏어 한나라의 직할 군으로 삼았고 이는 오초칠국의 난의 원인이 되었다.[3] 무제 원정 3년(기원전 114년), 동해군의 남부 3만 호를 떼어 사수국을 세워 사수사왕 유상을 봉했다.[4] 원시 2년(2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35만 8414호, 155만 9357명이 있었다. 무제가 13주를 두면서 서주자사부에 속했다. 아래의 속현 목록은 한서 지리지를 따른 것으로 원연·수화 지간(기원전 8년)의 현황으로 여겨지며, 일반적으로 첫 현이 군의 치소이다. 대략 현재의 린이 시 대부분, 롄윈강 시, 쉬저우 시 동부, 짜오좡 시 동부 등지에 해당한다.
노안왕의 아들 유방산의 후국으로, 유방산이 감로 4년(기원전 50년) 윤월에 봉해져 노국에서 동해군으로 옮겨졌다.
짜오좡시 남?
[1][8]
군의 이름을 기평(沂平)으로 고치고 다음 현의 이름을 고쳤다.
13현 148,784호 706,416명을 거느렸다.[9] 198년(후한 헌제 건안 3년) 10월, 여포를 격파하고 서주를 점령한 조조에 의해 이성군(利城郡), 창려군(昌慮郡)이 분리신설되었다. 동해군의 속현중 어떤 현이 이 2개 군에 편입된 것인지는 자료가 없다. 206년(후한 헌제 건안 11년) 창려군(昌慮郡)이 폐지되었다.[10] 212년(후한 헌제 건안 17년) 유돈(劉敦)이 동해왕으로 책봉되면서 동해국으로 승격되었다.[11]
225년(위 문제 황초 6년) 6월, 이성군 출신 병사 채방(菜方)이 군을 점령하고 태수 서질(徐質)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졌다. 조정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둔기교위 임복(任福)과 보병교위 단소(段昭)를 보냈고, 이 둘은 당시 청주자사와 함께 채방을 진압했다. 이로 인해 이성군은 동해군에 통폐합되었다.[12] 232년(위 명제 태화 6년) 조림이 동해정왕(東海定王)으로 책봉되면서 동해국으로 승격되었다.[13]
서진대 동해군은 12현 11,100호를 거느렸다. 291년(진 혜제 원강 원년) 난릉현과 그 서쪽에 있는 현이 난릉군으로 분리되었다. 영가의 난이후 석륵에 의해 함락되면서 북조로 편입되었다.[14]
동진초기 석륵의 침공을 피해 동진으로 들어온 동해군 주민들을 통치하기 위해 장강 하류일대에서 동해군이 교치되었다. 이렇게 교치된 동해군은 남동해군 문서를 참조할 것.
동진말엽, 비수 대전에서 승리한 남조가 회수이북의 서주를 수복하면서 동해군은 남조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명제시기 송나라가 북위의 침공으로 회수이북의 모든 땅을 상실하면서 송나라의 동해군은 지금의 롄윈강시 인근을 제외한 군 전역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곳에 청주, 기주가 교치되었다.
유송말 동해군은 2현 2,411호 13,941명을 거느렸다. 당시 기준 서주까지 수로로 1천리, 육로로 800리 거리였으며, 건강까지 수로로 1천리, 육로로 670리 거리였다고 한다.[15] 또한 이렇게 롄윈강시 일대에 교치된 동해군은 전장시 일대에 교치된 남동해군과 구분하기 위해 북동해군(北東海郡)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남제시기 교치된 기주의 속군으로 편제 되었다.[16] 북동해군은 양나라때 북해군(北海郡)으로 개명되었다.
468년(진 명제 태시 4년), 북위는 회수 이북전역을 점령하면서 동해군의 상당부분을 점령했지만 옛 동해군의 중심지였던 담현지역에는 담군을 따로 두었다. 현재 《위서》 지형지에 기록된 동해군은 양나라에게서 빼앗은 청주의 북해군을 549년(동위 효정제 무정 7년) 동해군으로 개명한 것이다. 북해군이 동해군으로 개명될 때 동해군을 통치하던 주인 청주는 해주로 개명되었다. 동위 때 동해군은 4현 1,242호 5,904명을 거느렸다.[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