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민주당에서 유일하게 4번이나 총재로 뽑혔으며, 총리 재임기간은 역대 총리중 2위, 연속 재임기간은 역대 총리중 가장 긴 7년 8개월(2,798일)이라는 최장수 재임 기록을 세웠다.[주 1] 퇴임 후 1974년에 "핵무기를 만들지도, 갖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라는 비핵 3원칙을 내세운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뒤로는 비밀리에 독일에 핵무기 공동개발의사를 타진했다.[1]
이케다 총리가 건강 악화로 인하여 사임을 한 후, 사토는 그를 총리로서 뒤를 이었다. 그의 정부는 많은 이들보다 더욱 장기간 동안 집권하였다. 그는 번창하는 경제로 인하여 인기 있는 총리였고 미국과 중국의 이해관계 속에서 균형을 이루며 결단력 있는 외교 정책을 펼쳤다.
총리로서 3개의 임기 후에 사토는 더 이상 4선을 위하여 나가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그의 후임인 후쿠다 다케오가 다음의 국회 선거에서 사토파의 후원을 이겼으나 더욱 인기 있는 통상대신 다나카 가쿠에이가 투표를 이겨 사토파의 지배를 끝냈다.
중화인민공화국과 타이완과의 관계
사토는 자신의 임기 중에 타이완을 방문한 마지막 일본 총리이다. 1965년 사토는 타이완에 미국의 1만 5천 달러를 대부하는 데 찬성하였다. 그는 1967년 타이완을 방문하였다. 1969년 사토는 타이완의 국방이 일본의 안정을 위한 필요성이라고 주장하였다. 사토는 대부분의 주요 논쟁들에서 미국을 따랐으나 닉슨의 방중을 반대하였다. 그는 또한 1971년중화인민공화국의 유엔 가입을 반대하기도 하였다.
핵무기 정세
사토는 핵무기의 비생산, 비소유와 비전개를 의미한 1967년12월 11일 3개의 비핵 3원칙을 소개하였다. 사토의 총리 재임 동안에 일본은 핵무기 비확산 조약에 참여했다. 일본 국회는 1971년 정식으로 원칙들을 채택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 공로로 그는 1974년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하지만 최근의 조사들은 이면에 사토가 일본 국토에 핵무기들을 배치하는 미국의 계획들로 더욱 수용한 것으로 본다. 2008년12월, 일본 정부는 1965년1월 사토의 미국 방문 중에 그가 미국의 공무원들과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항하는 핵무기 사용의 가능성을 논의하고 있었다고 보인 문서를 배제하였다. 2009년12월, 그의 아들은 자신의 부친이 일본의 주권으로 되돌린 오키나와에 핵무기 탄두를 배치시키는 것을 허용한 1969년11월닉슨 미국 대통령과 대화에서 동의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오키나와 논쟁들
제2차 세계 대전 이래 오키나와는 미국에 의하여 점령되었다. 1965년1월, 미국을 방문하는 동안에 사토는 공공연하게 존슨 대통령에게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 해 8월 사토는 오키나와를 방문한 첫 전쟁 이후의 일본 총리가 되었다.
1969년, 사토는 오키나와를 반환하고 거기서 핵무기를 이동시키기 위해 닉슨 대통령과 거래를 취하였으며, 이 거래는 반환 후에 오키나와에서 기지들을 유지하도록 미군을 허용하였기 때문에 논란이 있었다. 오키나와는 정식적으로 1972년5월 15일 일본에 반환되었다.
동남아시아와 관계
사토의 임기 중에 일본은 1966년아시아 개발 은행 설립에 참가하였고 동남아시아의 경제 개발에 장관급 회의를 개최하였다. 그 일은 전쟁 후의 기간에 일본 정부에 의하여 개최된 첫 국제 회의였다. 1967년 그는 싱가포르를 방문한 첫 일본 총리가 되었다. 그는 베트남 전쟁이 일어나는 동안에 남베트남 정부의 큰 지지자였다.
후반의 생애
사토는 1974년숀 맥브라이드와 함께 노벨 평화상을 나누었다. 그는 평화를 위한 일본 국민의 결심과 비핵 3원칙에 조인함으로 수상하였다. 그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첫 아시아인이었다. (1973년 베트남의 정치인 레득토는 상을 수상할 첫 아시아인이 되었으나 거절하였다.)
서거
1975년5월 19일, 식당에 있는 동안에 사토는 혼수상태의 결과를 가져온 큰 발작을 일으켰다. 그는 74세의 나이로 6월 3일 지케이 대학 의료소에서 서거하였다. 장례식 후에 그의 유해는 다부세 정에 있는 가족 묘지에 안치되었다.
개인 생활
사토는 1926년 외교관 마쓰오카 요스케의 딸 마쓰오카 히로코와 결혼하여 2명의 아들 - 류타로와 신지를 두었다. 1969년아사히 신문은 소설가 엔도 슈사쿠와 인터뷰에서 사토의 아내가 그를 방탕자와 아내를 패는 사람으로 고발하였다고 한다.
그의 취미들은 골프, 낚시와 다도를 포함하였다. 57대 총리 기시 노부스케는 그의 형이며, 총리 아베 신조는 그의 외종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