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츠토야 유미(일본어: まつとうや ゆみ 마쓰토야 유미[*], 1954년1월 19일 ~ )는 일본의 여성 싱어송라이터, 작사가 겸 작곡가로 애칭은 유밍(일본어: ユーミン, 영어: Yuming)이다. 1972년 데뷔해 1976년에 결혼하기 전까지는 원래의 성을 사용한 아라이 유미(일본어: 荒井由実)로 활동했다. 다른 아티스트에게 작품을 제공할 때는 구레타 가루호(일본어: 呉田 軽穂)라는 예명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 이름은 스웨덴 출신의 미국의 배우인 그레타 가르보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남편은 작곡가이자 음악 프로듀서, 자동차 평론가인 마츠토야 마사타카로, 그녀의 음악 프로듀서이기도 하다.
약력
성장
1954년 1월, 3남 2녀 중 넷째이자 차녀로 태어났다. 본가는 도쿄 하치오지 시에서 1912년부터 영업해 온 아라이 포목점(荒井呉服店)이다. 6세부터 피아노, 11세부터 샤미센, 14세부터 베이스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중학교 시절 도쿄미나토 구의 이탈리아 레스토랑 CHIANTI(キャンティ)에 드나들고 있었다. 당시 CHIANTI는 국내외의 문화인이 모이던 살롱 같은 곳으로, 사카모토 류이치나 무라카미 류 등 많은 예술가들이 단골이었다. 그녀는 거의 매일 이 레스토랑에 들렀는데, 사춘기 때부터 이러한 저명인들과 교류한 것은 그녀의 성장을 도와주는 특별한 가치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훗날 여기 모인 예술가들에 의해 음반사인 알파레코드(アルファレコード)가 탄생하여 그녀가 데뷔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등학교는 릿쿄 여학원 고등학교(立教女学院高等学校)로 진학해, 이 시기에 이곳의 파이프 오르간과 프로콜 하럼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또한 미대 입시를 위해 오차노미즈 미술학원(御茶ノ水美術学院)에 다녔는데, 이곳에서 만난 이들을 통해 아르튀르 랭보나 자크 프레베르 같은 작가들을 알게 되고 그들의 작품을 즐겨 읽어 많은 영향을 받았다.
14살 때 당시 친했던 중국인 사업가가 그녀를 '유밍(ユーミン)'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이것이 훗날 애칭으로 정착한다.
아라이 유미의 시대
1971년, 가수 가하시 가츠미(加橋かつみ)에게 〈사랑은 갑자기…〉(愛は突然に…)를 제공하여 17세의 나이로 작곡가로서 데뷔했다. 1972년 4월에는 다마 미술대학에 입학했다.
처음에는 작곡가를 지망했지만, 알파레코드를 설립한 작곡가 무라이 구니히코(村井邦彦)의 권유로 1972년7월 5일에 싱글 〈답장은 필요없어〉(返事はいらない)를 발매하며 싱어송라이터로서 데뷔했다. 하지만 이 음반은 당시 수백 장밖에 팔리지 않아 나중에는 환상의 데뷔 싱글로 불리게 된다.
1973년11월 20일에 첫 앨범 《히코키구모》를 발매하고, TBS 라디오의 심야 프로그램 《팩 인 뮤직》을 담당하던 하야시 요시오(林美雄)의 지지를 받고 인지도가 올라 다음 해부터 본격적인 무대에서의 활동도 시작했다. 그녀가 활동을 시작한 때는 미국, 영국의 1960년대 음악의 영향을 받아 포크(뉴 뮤직) 장르를 지향한 이들이 많아지던 시기였으므로 그녀는 이 분야의 개척자라고도 할 수 있다. 초기의 뉴 뮤직은 포크 송의 계보를 이어받으면서도 가사에 있어서는 “다다미 포크”등으로 불리며 조롱당할 정도로, 일상생활의 감정이나 생생한 연애 묘사에 치중한 것이 많았다. 반면에 그녀의 작품은 일상적인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서정적, 시적 가사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도시적이고 감각적인 풍경이 연상된다는 것은 당시에는 매우 신선한 일이었으며 지금도 변하지 않는 특징이다. 1975년 10월에 발매한 싱글 〈그 날로 돌아가고 싶어〉(あの日にかえりたい)는 TBS 드라마 《가정의 비밀》(家庭の秘密)의 주제가가 되어 처음으로 오리콘 차트 1위를 차지했고 (그 전에도 남성 포크 그룹 방방(バンバン)에게 제공한 곡 《딸기 백서를 다시 한 번》(『いちご白書』をもう一度 ) 이 오리콘 차트에서 1위를 획득함), 61만 5천여 장이 판매되어 1976년의 연간 싱글 차트 10위에 오를 정도로 히트하면서 1차 유밍 붐이 일어났다.
마츠토야 유미의 시대
1975년 12월에 마츠토야 마사타카와 약혼하고, 1976년11월 29일에 요코하마 야마테 교회에서 결혼했다. 원래는 은퇴할 생각이었지만, 전업주부가 되는 대신 성을 아라이(荒井)에서 마츠토야(松任谷)로 바꾸어 음악 활동을 계속했다. 마츠다 세이코 등 여러 가수에게 곡을 제공하면서도, 1978년부터 1983년까지는 정규 앨범을 매년 2장씩 발표하는 등, 빠른 속도로 작품을 제작했다. 〈부두를 건너는 바람〉(埠頭を渡る風), 〈DESTINY〉, 〈애인이 산타클로스〉(恋人がサンタクロース), 〈칸나 8호선〉(カンナ8号線), 〈진주 귀걸이〉(真珠のピアス), 〈단데라이온〉(ダンデライオン) 등의 곡은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또한 리조트에서의 콘서트라는 스타일을 이 시기에 확립하여 그 분야에서도 개척자가 되었다.
1981년6월 21일에 발매한 싱글 〈지켜 주고 싶어〉(守ってあげたい)가 69만 5천여 매가 팔려 1981년의 연간 싱글 차트 10위에 올랐고, 2차 유밍 붐이 시작되었다. 〈지켜 주고 싶어〉가 수록된 앨범 《간밤에 만나요》(昨晩お会いしましょう)가 1981년11월 1일에 발표된 이후 앨범이 17작품 연속으로 오리콘 차트 1위를 차지했다. 특히 1987년작 《다이아몬드 더스트가 사라지기 전에》(ダイアモンドダストが消えぬまに)가 78만 장 판매되며 히트한 것을 시작으로, 1988년에 발매한 《Delight Slight Light KISS》는 159만 장으로 판매량이 급증했다. 1990년작 《천국의 문》(天国のドア)은 일본 아티스트의 앨범으로서는 최초로 출하량이 200만 장을 돌파한다. 그 후로도 1995년작 《KATHMANDU》까지,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에 걸쳐 8작품 연속으로 밀리언셀러를 획득한다.
1979년부터는 콘서트의 규모가 커지기 시작해, 살아있는 코끼리를 등장시킨 《OLIVE》, 마술을 선보인 《MAGICAL PUMPKIN》, 엘리베이터를 설치한 《BROWN'S HOTEL》, 분수 쇼를 넣은 《SURF & SNOW》, 30미터짜리 용 모형에 올라탄 《물 속의 ASIA로》(水の中のASIAへ) 등, 연출이 해마다 진화를 거듭했다. 억 단위의 돈을 들여 일본과 해외의 최신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해 콘서트의 범위를 능가하는 새로운 엔터테인먼트를 구현해가기 시작했다. 당시의 인터뷰에서도 "음반으로 돈을 번 만큼, 콘서트를 통해 꿈과 함께 팬들에게 보답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다."라고 말했다.
당시 인기가 높던 스키를 소재로 한 영화 《나를 스키에 데려가 줘》(私をスキーに連れてって)의 주제가와 삽입곡을 담당하며, “젊은이의 카리스마”, “연애의 교주”등으로 불렸다. 자주 비교되는 나카지마 미유키의 스타일과 반대로, "중산층 이상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세계관", “중산계급의 손에 닿는 꿈”(당시의 음악 평론가의 표현)을 노래하며, 버블 경제로 고조되던 일본 사회의 분위기를 주도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정신세계나 민속 음악에도 주목하면서, 싱글 첫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한여름 밤의 꿈〉(真夏の夜の夢)과, 연이어 밀리언셀러를 달성한 〈Hello, my friend〉, 〈봄이여, 오라〉(春よ、来い) 등의 걸작을 낳는다. 1994년 발매된 앨범 《THE DANCING SUN》은 유밍의 정규 앨범 중 최고 판매량인 217만 장을 달성하는 등, 3차 유밍 붐이라고 불릴 정도의 시기였다.
1996년에는 아라이 유미 명의로 활동을 재개한다. 셀프 커버 싱글 《마치부세》(まちぶせ)를 발매하고, 아라이 유미 시절의 동료를 모아 《Yumi Arai The Concert with old Friends》를 개최했다. 이 라이브 앨범 발매 때문에 연말에 항례적으로 발매되었던 앨범의 발매가 몇 달 늦어졌고, 일본의 연례행사로까지 불린 겨울의 앨범 발매부터 여름까지 하는 콘서트 투어의 사이클이 약간 완만해졌다. 1998년에는 마츠토야 유미 시대의 곡으로 구성된 베스트 앨범 《Neue Musik》을 발매했고, 380만 장 판매되며 유밍의 모든 작품 가운데 최고 판매량을 기록했다.
1999년에는 러시아의 서커스 팀과 협력해 콘서트 《샹그리라》(シャングリラ)를 개최한다. 2003년에는 《샹그리라II》(シャングリラII)를, 2007년에는 시리즈 마지막을 장식한 《샹그리라Ⅲ》(シャングリラⅢ)를 개최한다. 이 《샹그리라》 시리즈의 총 제작비는 120억 엔 이상, 총 관객 수는 100만 명에 달했다.
2011년에는 NHK의 음악 프로그램 《SONGS》의 기획의 일환으로, 새롭게 녹음한 〈(모두의) 봄이여, 오라〉((みんなの)春よ、来い) 1탄을 5월에 디지털 싱글로 발매하고, 11월에는 2탄인 〈(모두의) 봄이여, 오라 2011년 가을 편〉((みんなの)春よ、来い 2011年秋編)을, 2012년 3월에는 〈(모두의) 봄이여, 오라 2012〉((みんなの)春よ、来い 2012)를 발매했다. 수익은 전액 동일본 대지진 피해 지역에 기부되었다.
2012년 발매한, 아라이 유미 시대와 마츠토야 유미 시대를 총망라한 베스트 앨범 《일본의 사랑과, 유밍과.》(日本の恋と、ユーミンと。)가 밀리언셀러가 되면서, 누적 음반 판매량이 3000만 장을 돌파했다. 이는 일본의 솔로 가수 및 여성 가수로서는 최초이다.
2013년에는 데뷔 때부터 소속되어 있던 EMI 뮤직 재팬의 인수합병으로 인해, 유니버설 뮤직으로 이적했다. 같은 해에 일본의 학술∙예술 분야 공헌자에게 수여되는 훈장인 자수포장(紫綬褒章)을 받았다.
2015년에는 이시카와현 관광 브랜드 프로듀서에 취임했으며, 2017년에는 도쿄 예술문화 평의회의 위원으로 취임했다. 세타가야구 명예 구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