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Rock, 줄여서 K-rock은 대한민국 내에서 로큰롤, 록 음악[1]을 가리킨다. 한국 전쟁에서 싸운 미국 병사들에 의해 대한민국에 수입된 아메리칸 록에 뿌리를 두고 있다.[2][3] 미군 기지 근처에 한국의 음악가들은 미국의 록을 배울 기회가 생겼었고 미군들 앞에서 공연을 하며 한국의 록은 발전했다. 결과적으로 많은 한국의 록밴드들은 1960년대 전후로 그 특색이 발전했다. 미군들이 주로 즐기던 록은 1970년대에 주된 문화로 발전했다. 전두환 정권, 대한민국 제5공화국 이후에 많은 검열 정책이 풀리고 한국에서 록은 메인 장르가 되었다. 오늘날 록은 더 이상 대한민국에서 대중적인 장르는 아니지만 아직도 대중음악의 큰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역사
1950년대
6.25 전쟁 이후에 한국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들이 록을 전파한 것이 시초였다. 그 근간은 동 시대의 아메리칸 록에 두고있었다. 1957년에 대한민국의 첫 록 기타리스트 신중현이 탄생했는데 이 역시 미군기지에서 여러 공연을하며 배운 것이다.[2] 미군기지에서 태어난 신중현은 한국에서 록의 아버지라고 불리었다.[4]
1960년대
1962년에 신중현은 Add4(애드 훠)[4]라는 한국의 첫 록밴드를 만들었다. 이후에 '그룹 사운드'라고 불리는 한국의 다른 록 밴드들이 나타났다. HE6(히식스)가 발매한 코끼리 브라더스에 수록된 "해변으로 가요"라는 곡은 1960년대 중반에 대 히트를 쳤다."[5] 음악적 색깔은 미국 록은 당연하거니와 동시대의 브릿록의 영향도 크게 받았다. 히식스는 미군부대에서 공연하는 것보다 한국 대중 앞에 서길 선택했으며 대중들이 록의 존재감을 처음 깨닫게 된 계기가 되었다.[6] 한국의 첫 록 음악가인 신중현도 이때부터 대중들 앞에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많은 서구권 국가나 일본의 청년들이 록을 대중화시키며 새로운 문화로 정착시킬 때 한국은 한국은 군사 독재 정부에 의해 억압받던 시대라 반항감을 조성하는 록 음악과 히피 문화는 탄압의 대상이었다.
1970년대
1970년대에 한국의 음악은 박정희에 의해 엄격한 검열을 받았다. 포크 록 가수 한대수는 자신의 앨범 두 장이 한국에서 판매 금지 처분을 받자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신중현은 마약 혐의로 구속되었기도 하였다. 신중현의 구속은 한국 록의 생산을 감소시키는 효과를 낳았지만[3] 1970년대 후반에 산울림의 탄생 등으로 1980년대 한국을 지배하던 댄스 음악이 나오기 전까지 꾸준히 록 음악은 나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에 나온 축음기의 보급으로 해적판의(불법 복제된) 외국의 음악이 들어오면서 음악 카페에 록 음악과 팝 음악이 인기가 생겼다[6]. 듣는 사람이 늘어나고 팬이 많음에 따라 자연스레 한국 록 문화의 성장에 근간이 되었다. 서양 록을 들을 기회가 훨씬 풍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검열이 그 당시에도 굉장히 엄격했어서 창작이 자유롭지는 못했다.
1980년대
한국 락 페스티벌
아티스트
솔로
음악 그룹
같이 보기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