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유엔군 파병 국가

다음은 6.25 전쟁 당시 유엔군 일원으로 전투부대를 파병하여 참전한 16개국에 대한 정보이다.

미국

참전 배경

2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 정세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 및 그 동맹국들 사이에 전개된 제한적인 대결상태, 즉 콜드워가 진행되었다.[1]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는 1945년 5월 나치 독일이 항복하면서 미·영 양국과 소련 사이의 불안정한 전시동맹관계는 해체되기 시작하였다. 1948년까지 소련은 동유럽 제국에 좌익정부를 건설하였으며, 미국과 영국은 독일 내 양국 점령지구의 대소(對蘇)배상을 중단하는 것으로 이에 대응하였다. 미국과 영국은 소련의 항구적인 동유럽 지배와 서유럽 및 그밖의 지역에서 소련의 영향을 받는 공산당이 집권할 가능성을 우려하였다. 한편 소련은 독일의 군사위협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동유럽에 대한 지배를 계속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주로 이데올로기적인 이유에서 공산주의를 세계적으로 보급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47년 3월 “오늘날 발트해(海)로부터 아드리아해(海)에 이르기까지 유럽을 둘러싼 철의 장막이 드리워져 있다”는 윈스턴 처칠의 반공연설, 미국의 상·하양원합동회의에서 미국이 공산세력을 저지하는데 지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트루먼 독트린, 이어 6월 트루먼 독트린에 발맞추어 유럽부흥을 위해 실시한 마셜 플랜 등이 초기에 자본주의가 행한 냉전이다. 이에 대해 사회주의권에서는 47년 7월 이후 소련과 동구 제국간 또는 동구 제국 상호 간의 물자교환협정 및 통상차관협정을 체결하고, 10월 소련공산당을 중심으로 하는 코민포름을 결성하였다.[2]

미국과 소련의 대립

냉전은 1948년에서 1953년에 최고조에 이르게 된다. 이 기간 동안 소련은 독자적 핵무기 개발에 성공함으로써 군사적으로 미국과 맞설 수 있게 되었고, 미국은 미국대로 점증하는 소련의 위협에 맞서 1949년 나토(NATO), 곧 북대서양 조약기구라는 유럽 군사 동맹 체제를 구축했다. 1949년에는 중국 본토에 공산당 정권이 들어섰다. 양 진영 간의 긴장 상태는 1948년 소련의 베를린 봉쇄로 위기를 맞았다가 1950년 한국에서 6.25전쟁이라는 열전으로 폭발했다. 이 열전은 1953년에야 끝이 났다.[3]

미국과 소련의 한국 신탁통치

미국 정부내에서는 전쟁 후 한국문제에 대하여 한국인의 절대다수가 문맹이며 가난하다는 것과 정치적경험이 없다는 점, 또 경제적으로 후진적이고 미개하며, 일제의 지배에 의해 자유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황을 근거로 들며 한국을 근대국가로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강대국들에 의해 지도받아야한다고 말하였다. 이와 동시에 소련의 영향력을 견재하기 위해서라도 한반도를 신탁통치 하는 것이 좋은 해결책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카이로회담의 카이로 선언에서 적절한 절차를 거쳐서 한반도에 독립을 부여한다고 표현되었다. 카이로 회담 내용을 테헤란에서 소련의 스탈린에게 알리자, 소련 또한 한국을 신탁통치한 후 독립시키자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제안에 찬동을 표명한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의사를 표시하고 난 후 미국은 이러한 전황의 급속한 진전에 대처해야 했다.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소련의 군대가 빠르게 한반도에 접근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한반도 문제에 대해 신속한 결정을 내렸어야 했다. 미국은 한반도내의 일본군 무장해제와 군사적 점령이라는 전략 추구를 위하여 작전한계선을 신속히 선정하기로 하였다. 이 때에 실무를 담당한 본스틸 대령과 딘 러스트 대령은 1945년 8월 11일 새벽 미,소 작전 담당구역 분할선을 북위 38도선으로 정하게 되었다. 미국 사절단을 통해 이러한 내용을 스탈린에게 전달하였으나 별다른 언급이 없었고 이는 묵시적인 동의로 간주되어,38도선을 경계로 이북은 소련이 이, 이남은 미군이 일본군에게 항복을 받기로 되었다. 소련군 제 25군사령관 치스챠코프 대장은 평양에 군사령부를 설치하고 북한 전역에 걸친 군정체계를 수립하는 한편, 군정실시 기관으로 로마넨코 소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민정관리총국을 설치하였다. 미국측은 1945년 8월 20일 주중 미군사령관 웨드마이어 중장명의로 남한 지역에미군이 진주할 것이음 알리는 삐라를 살포하였고,이어서 태평양 미국 육군총사령부는 포고 제1호,제2호,제3호를 동시 발표하여 남한에 군정을 실시할 것임을 공포하였다.[4]

애치슨라인

1950년 1월 미국의 국무부 장관 딘 애치슨은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야심을 저지하고 태평양 지역의 공산화를 저지하기 위한 극동 방위선을 발표했다. 애치슨이 발표한 지역방위선은 알류산 열도에서 필리핀을 잇는 방위선안에 한반도와 대만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극동방위선은 미국이 자유민주주의 진영을 지키기 위해 마련한 방위거점으로 극동방위선에 한반도와 대만을 포함시키지 않은 이유는 한국과 대만을 보호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다. 미합참에서 태평양 지역에 공산화된 중국이나 소련이 불법 침략 야욕을 보인다면 미국이 우선적으로 확보하고 양보해서는 안될 전략적인 중요거점을 표시한 것으로 애치슨이 언급한 극동방위선은 경계선의 개념이 아니라 방위거점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김일성은 1949년 한반도 내 미군의 철수와 애치슨 라인에서 한반도가 포함되지 않은 것을 북한이 전쟁을 일으켜도 미국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 오판하였고 결국 애치슨 라인 선언은 한국전쟁 발발의 계기가 된다. 애치슨 라인 선언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으며 현재까지 그 배경과 의도에 대해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한국전쟁 이전의 한미관계

역사적으로 한미 간의 최초 접촉은 1757년 미국산 인삼과 한국산 인삼이 청나라 시장에서 경쟁을 벌인 것이 시초였다. 그 후 1833년, 로버츠가 포시드 국무장관에게 어느 보고서를 제출하며 조선을 미국에 최초로 공식 언급하였다. 그러고 1845년 2월 5일, 뉴욕 하원의원 출신 프래트가 본회의에서 미국 무역 확장에 관한 건을 논의하다 조선도 미국의 무역 대상국으로 넣을 것에 대하여 언급하게 된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866년 8월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발생하고 이로 인하여 1871년 6월 한미 간 최초의 군사관계로 정립된 신미양요가 벌어진다. 신미양요는 6월 10일에 미국의 함포사격으로 시작하여 6월 12일 미국이 광성보에 성조기를 게양함으로써 미국의 승리로 끝난다.

이후 1878년 미국은 한일 조약 체결에 자극 받아 조선과 미국 사이 수교를 위해 슈펠트 제독을 파견한다. 그리고 슈펠트는 일본과 중국의 도움을 받아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한국전쟁 발발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의 권고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의 한국 군사지원 결의안 채택

편제 및 편성

보병 7개 사단, 기병 1개 사단, 해병 1개 사단, 극동함대, 미 7함대 등 261척 극동공군 등 66개 대대가 전투에 참여하였다.

미국의 육군은 1개 야전군, 3개 군단, 7개 보병사단, 1개 기병사단, 1개 해병사단, 2개 연대전투단으로 병력은 302,483명이 투입되었고 제24사단, 제25사단, 제1기병사단, 제2사단, 제3사단, 제7사단, 제1해병사단, 제40사단, 제45사단 등 9개 사단과 2개 연대전투단 그리고 수많은 전투부대를 파병했다.

미국의 해군은 극동해군의 통제 하에 제7함대가 주로 작전을 수행했다. 여기에는 항공모함, 전함, 순양함, 구축함, 잠수함 및 지원함이 참여해 개전 이후 10일째 되는 7월 4일부터 북한 해안을 봉쇄함으로써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이후 미 해군은 공중폭격, 함포사격, 상륙병력 수송, 미 본토로부터의 인원과 물자수송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인천상륙작전과 흥남철수작전의 완전한 성공을 통해 고도로 숙련된 전투 능력을 보여 주었다.

미국의 공군은 극동공군의 통제 하에 제5공군과 전략폭격사령부를 중심으로 북한군과 중공군의 작전수행 능력을 고갈시키기 위한 폭격과 유엔 지상군이 작전을 원활히 수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근접지원 작전을 펼쳤다. 미 공군은 전쟁의 초기단계부터 마지막까지 북한군과 중공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

James Alward Van Fleet (제임스 앨워드 밴 플리트)

한국 전쟁에 참전한 미군의 참전부대의 규모로는 육군 1개 야전군, 3개 군단, 7개 보병사단, 1개 기병사단, 1개 해병사단, 2개 연대전투단으로 병력은 302,483명이 투입되었고 해군에는 극동 해군의 통제 하에 미 제7함대

매튜 벙커 리지웨이(Matthew Bunker Ridgway)
미국 육군 전투부대 참전 현황
구분 야전군 군단 사단 연대 전투단 보병연대 포병대대 기갑대대
부대수 1 3 8 (6개 정규사단과 2개 주방위사단) 2 28 54 8
한국전쟁 기간 미 제8군사령관 현황
구분 계급 성명 참전기간 비고
제8군

사령관

중장 Walton H. Walker 1950.07.13~1950.12.23. 1951.01.02. 대장 추서
중장 Matthew B. Ridgway 1950.12.26~1951.04.14. 1951.05.11. 대장 진급
중장 James A. Van Fleet 1951.04.14.~1953.02.10. 1951.08.01. 대장 진급
중장 Maxwell D. Taylor 1953.02.11.~1955.03.01. 1953.06.23. 대장 진급
제1군단장 중장 John B. Coulter 1950.08.02.~1950.09.10.
중장 Frank W. Milburn 1950.09.11.~1951.07.18.
중장 John W. O'Daniel 1951.07.19.~1952.06.28.
중장 John W. Kendal 1952.06.29.~1953.04.10. 1952.09.16. 중장 진급
중장 Bruce C. Clarke 1953.04.11~1953.10.13.
제9군단장 소장 Frank W. Milburn 1950.08.10~1950.09.11.
소장 John B. Coulter 1950.09.12~1951.01.31.
소장 Bryan E. Moore 1951.01.31~1951.02.24. 1951.02.23. 헬기사고사
중장 William H. Hoge 1951.03.05~1951.12.23 1951.06.03. 중장 진급
소장 Willard G. Wyman 1951.12.24~1952.07.30
중장 Reuben E. Jenkins 1952.08.09~1953.08.09. 1952.11.08. 중장 진급
제10군단장 중장 Edward M. Almond 1950.08.26~1951.07.15 1951.02.12. 중장 진급
소장 Cloves E. Byers 1951.07.15~1951.12.05.
중장 Williston B. Palmer 1951.12.05~1952.08.11.
중장 Issac D. White 1952.08.15~1953.08.15 1952.11.07. 중장 진급
한국 전쟁 기간 미국 해군 참전 주요 지휘관 현황
구분 계급 성명 참전기간
극동해군 사령관 중장 Charles T. Joy 1950.06.27.~1952.06.04.
중장 Robert P. Briscoe 1952.06.04.~1954.04.02.
제7함대 사령관 중장 Arthur D. Struble 1950.06.27.~1951.03.28.
중장 Harold M. Martin 1951.03.28.~1952.03.03.
중장 Robert P. Briscoe 1952.03.03.~1953.05.20.
중장 Joseph J. Clark 1952.05.20.~1953.07.27.
제90기동 함대사령관 소장 J. H. Doyle 1950.06.27.~1950.09.27.
소장 L. A. Thackrey 1950.09.27.~1950.10.11.
소장 J. H. Doyle 1950.10.11.~1951.01.24.
소장 I. N. Kiland 1951.01.24.~1951.09.03.
소장 T. B. Hill 1951.09.03.~1951.10.08.
소장 C. F. Espe 1951.10.08.~1952.06.05.
소장 F. X. Mclnerney 1952.06.05.~1953.11.21.
제95기동 함대사령관 소장 J. M. Higgins 1950.06.27.~1953.07.25.
소장 C. C. Hartman 1950.07.25.~1950.09.12.
소장 A. E. Smith 1950.09.12.~1951.02.19.
소장 W. Andrews 1951.02.19.~1951.04.03.
소장 A. E. Smith 1951.04.03.~1951.06.20.
소장 G. C. Dyer 1951.06.20.~1952.05.31.
소장 J. E. Gingrich 1952.05.31.~1953.02.12.
소장 C. E. Olsen 1953.02.12.~1953.07.27.

주요 전투와 작전

스미스부대 죽미령 전투

죽미령 전투
일시 장소 교전부대 특징
1950..07.05 경기도 오산시 내삼미동(죽미령) 미 제24사단 21연대 1대대(스미스 특수임무 부대) vs 북한군 제4사단 예하부대, 제107전차연대 예하부대 한국전쟁에서 미 지상군이 참전한 최초의 전투

미 지상군의 선발대로 파견된 스미스 대대가 수행한 죽미령 전투의 결과, 540명의 부대원 중 150여 명이 전사하고, 포병대대 소속 장교 5명과 병사 26명이 실종되었다. 또한 다수의 미군 장비가 적에게 탈취되는 등 미군의 피해가 적지 않았다. 한편 북한군 제4사단도 42명의 전사자와 85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고, 4대의 전차가 파괴되었다.

한국전쟁에서 미군과 북한군이 처음으로 교전한 죽미령 전투의 결과는 참전 초기 미군과 국군에게 커다란 충격과 실망을 안겨주었다. 미군 병사들은 미군의 전술과 무기로 북한군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되었으며 결국 이러한 심리적 불안은 참전 초기 미군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반면 북한군은 자신들이 예측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미군이 참전했다는 것을 확인하자 미군이 추가적인 증원을 하기 전에 신속하게 남한 전체를 점령하기 위한 작전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낙동강 방어선 전투

다부동 전투

다부동 전투
일시 장소 교전부대 특징
1950.08.20 ~ 1950. 08. 27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가산면 다부리 일대 국군 제1사단, 미 제 27연대 vs. 북한군 제1, 3, 15사단 다부동 정면에 대한 적의 공격을 저지하여 대구 방면의 위기를 해소한 국군 제1사단의 성공적인 방어전투

대구지역에 위기를 몰아왔던 다부동 전선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한국군은 엄청난 희생을 감수해야만 했다. 북한군의 손실은 약 6,000여 명으로 추산되었으나, 국군 제1사단도 장교 56명을 포함하여 2,300여 명이 전사하였다. 국군을 지원한 미 제27연대, 제23연대, 그리고 국군 제10연대가 입은 피해까지 합하면, 아군의 피해도 막심했다. 또한 사격훈련도 받지 못하고 전장에 투입된 학도병과 목숨을 걸고 탄약 및 보급품을 운반해주었던 민간인들의 피해까지 합하면 아측의 피해는 컸다. 인명 피해가 너무 많아 육군본부에서 실태조사를 할 정도였고, 진지를 인수하던 미군이 사체를 치우지 않으면 진지를 인수하지 않겠다고 할 정도로 치열한 전투였다.

대전 전투

인천상륙작전

흥남철수

1ㆍ4 후퇴

장진호 전투

장진호 전투
일시 장소 교전부대 특징
1950.11.27~ 1950.12.11 함경남도 장진군 장진호 일대 미 제1해병사단 vs 중공군 제9병단 제 20, 26, 27군 미 제1해병사단이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장진호 일대로부터 흥남까지 철수에 성공한 작전

장진호 전투는 미 제 10군단 예하의 미 제1해병사단이 서부전선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장진호 북방으로 이동하던 중 중공군 제9병단 소속의 9개 사단이 형성한 포위망에 막혀 진출이 저지되자, 이후 방향을 바꿔 약 2주에 걸쳐 해안 방면으로 공격하며 철수했던 독특한 형태의 철수작전이었다. 이 전투에서 미 제1해병사단은 한반도 북부의 험준한 산악지역과 혹독한 날씨로 작전수행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함흥을 거쳐 흥남까지 성공적으로 철수하는데 성공하였다.

12월 11일에 최종 목적지인 함흥과 흥남 사이의 집결지에 도착한 미해병사단은 14일간의 철수작전에서 전사 718명, 부상 3,504명, 실종 192명의 인명손실을 입었다. 이외에도 1,534명의 비전투 부상자가 발생하였으며 이들은 대부분 동상환자였다. 한편 중공군 제9병단도 이 전투에서 전사 2,500명, 부상 12,500명 정도의 막대한 인명손실을 입어서 이후 약 4개월 동안 부대를 재정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이 과정에서 1951년 2월 공세 이전까지 주요한 작전에 참여하지 못하는 등 차후 작전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다. 그 결과 1950년 12월 말에 시작된 3차 공세(신정공세)에서 중공군은 전체적인 병력부족으로 전과를 확대하지 못하고 수원일대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반면 국군과 유엔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을 개시하여 이후 전장에서 다시 주도권을 차지할 수 있었다.

펀치볼 전투

피의 능선 전투

피의 능선 전투
일시 장소 교전부대 특징
1951.08.16~ 1951.08.22 강원도 양구군 동면 월문리 일대 국군 제5사단 vs 북한군 제12사단 미군 부대가 실패한 작전을 국군 제5사단이 인수하여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고지쟁탈전

피의 능선 전투를 치르는 동안 국군 제5사단 제36연대는 북한군 사살 1,250명, 포로 63명, 193정의 각종 화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획득했으나, 139명의 전사자와 201명의 실종자, 899명의 부상자 피해를 감수해야만 했다. 특히 북한군이 매설한 지뢰의 폭발로 발목이 잘린 부상자가 많이 발생하였다.

단장의 능선 전투

단장의 능선 전투
일시 장소 교전부대 특징
1951.09.13~ 1951.10.15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 동면 사태리 일대 미 제2사단 vs 중공군 제68군 제204사단, 북한군 제6, 12, 13사단 종군 기자들이 '단장의 능선'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고지 쟁탈전

미 제2사단은 9월 13일부터 1개월이 넘는 혈전을 입었고 북한군 제6, 12, 13사단과 중공군 제204사단이 입은 피해 역시 매우 심하여 21,000여 명으로 추산되었다. 이 전투 소식을 전하던 기자들이 '단장의 능선(Heartbreak Ridge)'이라고 명명한대로 유엔군은 많은 희생을 치른 후에야 이 능선을 장악할 수 있었다.

백마고지 전투

백마고지 전투
일시 장소 교전부대 특징
1952.10.06~

1952.10.15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무명 395고지 국군 제9사단 vs 중공군 제38군 중공군 제38군의 무명 395고지에 대한 공격을 성공적으로 제압하고 이 고지를 굳건히 지켜낸 국군 제9사단의 통쾌한 승전

백마고지 전투는 오늘날까지 명실 공히 한국전쟁에서 한국군이 치른 수많은 전투 중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철원평야 서쪽 끝에 위치한 작은 능선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 시작된 이 전투에서 국군 제9사단과 중공군 제38군이 뺏고 빼앗기는 사투를 벌인 끝에 국군 제9사단이 이 고지를 굳건하게 확보한 채로 끝났다. 이 과정에서 중공군은 전사자 8,234명을 포함한 14,389명의 인명 손실을 입었고, 국군도 약 3,416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또한 이 전투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피아간에 발사한 포탄이 약 274,000여발(적군 55,000여발, 아군 219,954발)에 달했고, 미 제5공군도 총 754회를 출격하여 지원하였다.

백마고지 전투에서의 승리는 국군의 명예를 드높였을 뿐만 아니라, 1952년 중반부터 본격화된 국군의 명예를 드높였을 뿐만 아니라, 1952년 중반부터 본격화된 국군의 증강과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백마고지 전투는 단순한 고지 쟁탈전을 넘어서 한국 국민 전체와 자유세계가 바라보고 있다는 압박감 속에서 국군의 명예를 걸고 싸웠던 전투였다. 국군 제9사단의 지휘관과 병사들은 1951년 초에 국군 제3군단이 현리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생겼던 모든 오욕을 씻어내기 위해서 일치단결하였으며, 결국 백마고지에서 중공군과 정면 대결하여 승리함으로써 자신감을 되찾을 수 있었다. 유엔군 지휘관들은 이 전투에서 국군 부대가 중공군 부대를 제압하는 것에 크게 감명을 받았으며, 이를 계기로 국군의 전략적 가치에 대해서 다시 평가하기 시작했다. 사실 미국의 군사정책 결정자들은 1951년 초에 국군이 보여준 지휘관의 능력부족과 훈련 미숙 등을 이유로 한국군의 재편성 및 증강에 대체로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국군 제9사단이 백마고지에서 거둔 승리는 이러한 국군에 대한 선입견을 완전히 바꾸는 계기가 되었으며, 장차 미군이 철수하더라도 한반도에서는 국군 자력으로 공산군을 대적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백마고지 전투는 국군이 장차 한반도에서의 냉전을 담당하는 주력부대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었으며, 또한 백마고지에서 국군 제9사단이 보여준 필사의 전투력은 현대 국군이 세계적인 강군으로 성장할 수 있는 정신적인 밑거름이 되었다.

참전 관련 통계

미군 파병ㆍ 사상자 규모

1950년 7월 1일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최초로 한국전선에 투입된 이래 미국의 병력 파견은 점점 증가되어 1년이 경과한 1951년 6월 30일에는 253,250명을 기록하였다. 1952년 6월 30일에는 12,000명이 늘어나 265,864명에 달하였고, 휴전 직후인 1953년 7월 31일에는 302,483명을 기록하였다. 이처럼 미국은 한국전쟁기간 중 연인원 1,789,000명이 참전하였으며, 이들 중 36,574명이 사망(전투 중 사망자: 33,739명, 사고 등 비전투 중 사망자: 2,835), 103,248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약 7,200명의 포로 그리고 약 1000여명의 실종자를 기록하였다.

구분 육군 해군 공군 해병
사망(a+b+c+d+e) 27,728 492 1,198 4,268 36,516
전사(a) 19,754 364 198 3,321 23,637
부상 중 사망(b) 1,904 28 16 536 2,484
실종 중 사망(c) 3,317 97 960 385 4,759
비전투 중 사망(d)

(Non-Battle Deaths)

... ... ... ... 2,830
포로 사망(e) 2,753 3 24 26 2,806
귀환 ... ... ... ... 4,418
거부 ... ... ... ... 21
소계 5,356 286 926 677 7,245
부상자 ... ... ... ... 92,134[5]

참전 의의

미군은 전쟁 수행과정에서 유엔군이 수행한 역할의 대부분을 담당하였을뿐만 아니라 주도적으로 전쟁을 운용하였다. 전체 유엔군 중 미 지상군 비율이 50.3%이고, 해군과 공군 비율은 각각 85.9%와 93.4%를 차지할 정도로 절대적이었다. 미 지상군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약 10일간의 전투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전투 및 작전에 참여하였다. 미군의 주도로 수행된 주요 전투 및 작전은 약 140여개에 달하고 소규모 전투까지 포함하면 약 200여 개에 이르렀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참전을 결정하면서 설정한 '전쟁 이전 상태로의 회복'이란 목표를 달성하였고, '국제평화의 유지와 안전'이라는 유엔의 목적과 목표에 기여하였다.

기념사업
한미 교류의 확대와 발전

참고 문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 ㆍ25 전쟁과 유엔군, 2015.

김도영, 김영훈. (2010). 맥아더의 전략 vs. 김일성의 전략. 한국군사학논집, 66(1), 77-101.

박일송. (2010). 대전 전투와 미군의 전투효율성. , (130), 121-146.

김현기. (2017). 한국전쟁 시 장진호 전투의 현대적 의미. 전략논단, 25(0), 89-119.

김영호. 한국전쟁의 기원과 전개과정, 두레, 1998.

국가보훈처. (2005). 6ㆍ25 전쟁 미군 참전사

영국

참전 배경

북한의 남침 소식을 접한 영국은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전투병력을 지원하고, 영연방국가를 비롯한 우방국에 대해 유엔군 창설에 협조하도록 외교적인 노력을 했다.[6] 1950년 6월 27일, 유엔안보리의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 제안에 지지를 표명한 영국은 다음날 홍콩에 주둔하고 있던 극동함대의 일부 함정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7] 이에 따라 영국 해군은 6월 29일 경항공모함 1척, 순양함 2척, 구축함 3척 그리고 프리깃함 3척 등 총 8척으로 편성된 함대를 파견하여 미 극동해군사령부 통제 하에 한국 해역에서의 해상 작전에 참가하였다.[8] 영국은 국내 언론의 비난과 미국의 요청 등 여론과 압력에 따라 7월 26일 제29보병여단 파병을 결정하고 이를 공식발표하였다.[9] 8월 20일 긴급조치로 파병준비에 착수한 제29여단에 우선하여 홍콩에 주둔중인 2개 보병대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10] 이에 따라 홍콩에 주둔하고 있던 제 40보병사단은 제27여단본부와 예하 아길대대 및 미들섹스대대를 선발한 후 8월 25일 항공모함 유니콘(Unicorn)호와 순양함 세일론(Ceylon)호에 승선시켜 한국에 파견하였다.[11] 영국은 이들 외에도 본국에 대기하고 있던 제41해병독립특공대에서 225명을 선발하여 증강된 중대규모의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파견하였다.[12]

편제 및 편성

제29보병여단

1950년 8월 20일, 긴급조치로 홍콩에 주둔하고 있던 제40보병사단에서 제27여단본부와 예하의 아길대대 및 미들섹스대대를 선발하여 선제 파견했다. 이후 10월 초, 본국에서 전투편성을 완료하여 한국으로 부대를 이동했다.[13]

여단 지휘관 계보[14]
부대명 지휘관
계급 성명 재임기간
제29보병여단 준장 T. Brodie 1950.11.~1951.10
준장 A.H.G. Ricketts 1951.10.~1952.12.
준장 D.A.Kendrew 1952.12.~1953.11.
준장 R.N.H.C. Bray 1953.11~미상

영연방 제1사단

1951년 7월 28일, 영국 지상군이 영연방국가에서 파병된 부대들을 통합해 지휘할 목적으로 창설한 부대이다. 영국군 제28여단, 제29여단(벨기에, 룩셈부르크 배속), 캐나다군 제25여단이 주축이 되었다. 영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군 포병과 영국, 캐나다군의 전차대대 및 공병대대도 예속되었다.[15]

사단 지휘관 계보[14]
부대명 지휘관
계급 성명 재임기간
영연방

제1사단

소장 A.J.H. Cassels 1951.7.~1952.9.
소장 M.M.A.R. West 1952.9.~1953.10
소장 H. Murray 1953.10~미상

영국 해군 극동함대

1950년 6월 27일 유엔안보리의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 제안에 지지한 다음 날, 홍콩에 주둔하던 극동함대의 일부 함정을 파견했다.[16] 당시 함대는 경항공모함 1척, 순양함 2척, 구축함 3척, 프리깃함 3척으로 구성되었다. 함대는 미 극동해군사령부에 배속되어 통제를 받았다. 인천상륙작전에서 전과를 올린 함대는 서해안지원분대(TH-96.53)에서 서해지원전대(TG-95.1)로 승격되기도 했다.[17]

제41해병독립특공대

영국 본토의 제41해병독립특공대에서 225명을 선발하여 중대 규모의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한 후 파견하였다. 이후 일본에 있는 미 극동해군에 배속되어 미 해병대와 연합으로 작전을 수행했다.[18]

주요 전투 및 작전

해피 밸리 전투

설마리 전투

가평 전투

참전 의의

기념사업

오스트레일리아

참전 배경

1950년 6월27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안이 결의되었다. 그 후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이 안건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였고 즉각적으로 병력을 파견하기로 했다. 6월 30일 영연방 극동해군사령부에 파견되어있던 2척의 구축함을 미국 극동해군사령부에 파견하였고 뒤이어 7월 1일 제77전투비행대대를 미 극동공군사령부로 급파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 의회 역시 정부의 이러한 조치를 만장일치로 동의하였다.

정부와 의회의 동의를 얻은 오스트레일리아군은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구축함 '바탄 호(Bataan)'와 프리깃함 '숄헤븐 호(Shoalhaven)'는 정박지였던 홍콩을 출발해 오키나와로 이동했고, 이튿날 일본 이와쿠니(Iwakuni) 기지에 주둔중이던 제77전투비행대대(NO. 77 RAAF Squadron)가 미군의 제5공군에 배속되어 작전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이후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7월 26일 한국에 지원군을 파견한 사실을 원칙적으로 발표하였다.

편제 및 편성

<호주 해군 참전 함정 및 지휘관>

항공모함
구분 함정명 작전기간 지휘관
항공모함

(1척)

Sydney 1951.8 ~ 1952.6 대령 D.H.Harries
1953.10 ~ 1954.6 대령 G.C.Oldham
프리깃함
구분 함정명 작전기간 지휘관
프리깃함

(4척)

Shocalhaven 1950.7 ~ 1950.9 중령 I.H.McDonald
Murchison 1951.5 ~ 1952.2 중령 A.N.Dollard
Condamine 1952.8 ~ 1953.4 중령 R.C.Savage
Culgoa 1953.4 ~ 1953.6 중령 D.A.H.Clarke
구축함
구분 함정명 작전기간 지휘관
구축함

(4척)

Bataan 1950.7 ~ 1951.5 중령 B.M.Marks
1952.2 ~ 1952.8 중령 S.Bracegridle
Warramunga 1950.8 ~ 1951.8 대령 O.H.Becher
1952.2 ~ 1952.7 중령 J.M.Ramsay
Anzac 1951.8 ~ 1951.9 중령 J.Plunkett-Cole
1952.9 ~ 1953.6 대령 G.G.O.Gatacre
Tobruk 1951.8 ~ 1952.6 중령 R.I.Peek
1953.6 ~ 1954.2 중령 I.H.McDonald

주요 전투 및 작전

영유리 전투

영유리 전투는 호주 제3대대가 영 27여단 일부로 영유리 부근에서 북한군 제239연대를 격파하고, 숙천에 공수 낙하한 미 제187공수연대와 연결작전을 이룬 전투이다. 대대는 이 전투에서 거의 피해를 입지 않고 많은 전과를 달성하였다.

영연방 제27여단과 오스트레일리아 제3대대는 1950년 10월 20일 평양에 입성하여 숙천-박천-정주를 목표로 진격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날 아침 갑자기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적에게 포위된 미 공수연대를 구호하라는 명령을 받고 대동강을 도하하여 진격하게 된다. 당시 오스트레일리아 제3대대장이었던 그린 중령은 사령부로부터 미 공수부대가 대대가 점령중인 진지 북쪽 2km 지점에서 남진중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이때 북한군은 대대에게 박격포와 기관총 사격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린 대대장은 즉시 1개 중대로 돌파공격을 감행하기로 했다. 돌파 임무를 받은 데니스 대위의 C중대는 과수원을 향해 공격을 개시하였고 미 전차중대가 이를 엄호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군과 미군의 공격을 받은 북한군은 당황하여 화기와 진지를 버려두고 후퇴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측면을 엄호 중이던 전차와 9소대에 의해 대부분 사살되었다.

그린 대대장은 우측방의 고지대를 점령하기 위해 2개 중대를 보내고, 또다른 중대를 보내 C중대를 엄호하게 하였다. 이렇게 모든 중대를 산개시키고 본부요원들 중 1개 소대 병력을 차출하였고 북쪽으로 급파하여, 남하중이던 미 공수부대와의 연결에 성공하였다. 그 결과 오스트레일리아군과 미군은 적을 포위할 수 있었고, 포위한 적은 대부분 사살하거나 포로로 잡았다. 이 전투에서 제3대대는 북한군 150명을 사살하고 239명을 포획하였으나, 오스트레일리아군은 7명만이 부상을 입었다.

박천지구 전투

박천지구 전투는 오스트레일리아 제3대대가 대한민국전에 참전한 이후 중공군과 최초로 치른 전투이다. 이 전투로 인해 유엔군은 청천강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었다.

중공군은 11월 3일 사단 우전방에 공격을 개시했다. 그들은 구룡강을 도하하였고 그 일대를 방어중이던 미 24사단을 돌파한 뒤 압박을 강화하여, 여단 후방으로 우회하여 박천-신안주 간 작전도로를 위협하였다. 오후 늦게 영국군 정찰대가 박천 동북쪽 10km 지점에서 대규모 중공군이 남진중인 것을 목격하였고 이날 밤 우측의 미 24사단은 차량과 중장비를 유기하고 안주로 철수하였다. 11월 5일 08시 중공군은 후퇴하던 미군을 추격하였고, 일부는 서쪽으로 우회하여 박천 남쪽 3km 지점의 미군 포병부대를 강타하였다. 이는 박천-신안주 간의 작전도로가 차단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코드 둔장은 즉시 대령강 도하장을 방어중이던 오스트레일리아 군에 반격을 명령했다. 오스트레일리아군은 A중대를 우전방, B중대를 좌전방에 배치하여 즉시 공격을 개시하였다. 대대는 1시간에 걸친 격전 끝에 추도리를 재탈환하고 진지를 재편성하였다. 이날 밤 중공군의 반격으로 인해 추도리 남쪽 1.5km 지점까지 철수했으나 D중대의 반격으로 진지를 다시 확보할 수 있었고 적을 후퇴시킬 수 있었다.

11월 6일 3대대는 산병호를 파고 포진지를 보강하였다. 또한 정찰대 임무를 수행하던 C중대는 추도리 동북쪽 깊숙한 산륙까지 진출하여 달아나던 중공군 11명을 사살하였다. 이후 3대대는 영국군과 함께 대령강 동안 일대에서 계속 진지를 점령하고 박천-신안주 도로를 경비하는 임무를 전담하였고 전방 수 km 지점까지 수색대와 정찰대를 파견하여 접적을 시도하였다.

가평 전투

마량산 전투

해군 주요 활동

공군 주요 활동

네덜란드

참전 배경

  • 참전 결정

유엔회원국 중 유엔결의에 따라 제일 먼저 군사지원을 약속한 나라는 영연방국가들이었다. 그 중의 한 나라인 네덜란드는 6.25전쟁에 구축함 지원을 약속하였다. 네덜란드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일원으로서 근본적으로 소련의 유럽 지배에 경계심을 갖고 있었다. 이들 국가들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북대서양조약기구에 대해 실질적으로 기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으며, 유럽에서 미국의 확고한 역할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아시아에서 미국과 함께 공산주의자들과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였다.[19]

  • 파병 과정

네덜란드는 해군과 육군을 파병하였으며, 한국에는 해군은 1950년 7월 19일, 육군은 1950년 11월 23일에 도착하였으며, 지상군이 전투에 참가한 일자는 1950년 12월 3일이다.[20]

네덜란드는 6.25 전쟁 당시 군사력이 매우 미약하였고, 대부분의 병력마저도 인도네시아에 주둔하고 있었다. 즉각적인 지상군의 파견이 여의치 않음에 따라 1척의 구축함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21]

날짜 전개 상황 비고
1950년 7월 16일 구축함 에베르센 호 일본 사세보 해군기지 거침
1950년 7월 19일 서해안 활동하고 있던 영국 극동함대에 배속 네덜란드는 전쟁 기간 동안 6척의 함정을 교대로 파견하여 해상작전을 지원함.
1950년 7월 14일 유엔사무총장이 네덜란드 정부에 지상군 파견 요청 한국 전쟁의 상황이 악화되었음.
1950년 8월 11일 네덜란드 정부 지원병 모집 공식 발표 보병 1개 중대와 해병 1개 중대를 파병하기로 결정함.
1950년 9월 9일 636명의 1개 보병대대 창설, 덴 오우덴 중령을 대대장으로 임명 예상보다 많은 지원을 함.
1950년 10월 23일 국회에서 유엔기를 수여받음.
1950년 10월 24일 공식환송식과 사열식 진행함.
1950년 10월 26일 수송선 주더크루스 호를 타고 네덜란드를 출발함.
1950년 11월 23일 부산 도착함.
1950년 12월 11일 현지적응훈련 거친 후 미 제 2사단에 배속됨.

편제 및 편성

  • 육군: 보병대대
네덜란드 대대
대대장 계급 재임 기간
M. P. A. den Ouden 중령 1950.11~1951.2
W. D. H. Eekhout 중령 1951.2~1951.11
G. H. Christen 중령 1951.11~1952.8
C. M. Schilperoord 중령 1952.8~1953.8
C. Knulst 중령 1953.8~1954.7
J. Raaymakers 중령 1954.7~1954.12
  • 해군: 구축함 및 프리깃함
구축함
구축함 이름 운용 기간 함장 계급
Evertsen 1950.7~1951.4 D. J. van Doornink 소령
Van Galen 1951.4~1952.3 A. M. Valkenburg 중령
Piet Hein 1952.3~1953.1 A. H. W. von Freytag Drabble 중령
프리깃함 이름 운용 기간 함장 계급
Van Nassau 1953.1 ~ 1953.11 N. W. Slujiter 중령
Dubois 1953.11~1954.9 T. Jellema 소령
Van Zijil 1954.9~1955.1 F. G. H. van Straaten 중령
  • 네덜란드 대대 편성

대대장 포함 대대본부 및 본부중대(117명), 2개 소총중대(380명), 화기 중대(139명)

장교 34명, 하사관 84명, 사병 518명

보유무기 - 경기관총 17정, 중기관총 9문, 자동소총(BAR) 45정, 3.5인치 로켓포 11문, 60mm 및 80mm 박격포 13문, 57mm 및 75mm 무반동총 13문

주요 전투 및 작전

횡성 전투

중공군의 2월 공세로 인해 전방의 아군부대들이 철수를 단행하자 이들에 대한 엄호임무를 부여받은 네덜란드대대가 중공군의 기습으로 1951년 2월 12일부터 13일까지 횡성 일원에서 전개한 방어전투

  • 전투 경과

1951년 1월 23일 미 제 2사단 원주 탈환

1951년 1월 31일 사단예비로 있던 네덜란드대대 제 38연대로 배속되어 원주로 진출

1951년 2월 2일 네덜란드대대 원주 북서쪽 섬감 부근 송호리와 상장포 일대로 진출하여 패잔병소탕작전 수행

1951년 2월 4일 사단의 명령에 따라 횡성으로 이동

1951년 2월 5일 미 제2사단 제 38연대 홍천 탈환하기 위해 한국군 제 5사단과 제 8사단에 대한 화력 지원

네덜란드대대는 후천에 배치되어 한국군 사단의 후방 엄호 담당

1951년 2월 6일 횡성 201고지로 중대를 이동시켜 횡성 동북방의 경계 강화

1951년 2월 11일 중공군이 네 번째 공세인 2월 공세 단행, 중공군 제40군, 제 66군이 서북쪽, 북한군 제 5군단이 동북쪽에서 아군의 정면과 측면 공격, 일부 병력 연대 후방으로 침투하여 유엔군의 주보급로 차단

1951년 2월 12일 06시경 군단장이 전 부대에 철수명령 하달, 전 부대가 네덜란드대대가 방어중인 횡성으로 몰려듦.

06시 30분경 네덜란드대대 A중대는 본래의 위치인 횡성교로 복귀하라는 명령받고 서쪽으로 이동

15시 30분경 적 네덜란드대대 배치된 지역 박격포 공격 집중, 본부중대 기능 마비

16시경 미 제187공수여단 G중대와 전차소대로 구성된 구원부대가 한국군 1개 보병대대와 함께 돌진하여 적에게 포위된 4000여 명의 병력과 합세

19시 10분경 중공군이 한국군으로 위장하고 후방으로 침투해 네덜란드대대 화기중대와 대대본부 공격, 대대장 수류탄 폭발로 전사, 이러한 상황에서도 철수부대 엄호

21시 30분경 화기중대장이 임시로 대대 지휘

22시경 한국군과 미군 철수 뒤 네덜란드대대 A중대 횡성 후방의 뒷네물 강변에 도착

1951년 2월 13일 01시 네덜란드대대 B중대도 뒷네물강 남쪽에 도착

04시경 사단의 지시에 따라 원주비행장에 도착하여 횡성전투를 종료

  • 전투 결과

대대장과 군목, 인사장교 등 17명 전사, 37명 부상, 차량 15대와 다수의 공용화기를 잃는 피해를 입었다.

대우산 전투

네덜란드대대가 미 제2사단의 일부로 중동부지역 대암산~도솔산 부근 전선에 투입되어 방어선 전방의 감제고지인 대우산을 점령하기 위해 조공부대로서 북한군 제 27사단이 점령하고 있던 그 남쪽의 1120고지(대머리산)을 공격 탈취한 전투

  • 전투 경과

1951.7.15. 네덜란드대대 1개월 간 부대 재정비 후 미 제 38연대에 배속되어 양구 북쪽의 도솔산으로 이동

1951.7.15.~7.26. 적의 다수의 지뢰가 매설되어 있으며 중대규모의 병력이 배치되어 있는 1120고지 정찰

1951.7.26. 07시 30분경 네덜란드대대 공격부대인 C중대 주저항선 전방의 만정곡으로 이동하여 공격 개시

10시 30분경 돌격선 진출하였지만 안개가 걷히며 중대가 적에게 노출되고 적이 C중대를 향해 기관총사격을 집중함. 시간이 경과할수록 사상자가 증가하고 위험해지자 고지 중간지점으로 철수함. 이때 좌전방으로 우회 공격한 일부 병력이 고참병들의 투혼으로 1120고지로 진출해 적의 진지 일부를 탈취했으나, 적의 역습으로 다시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오후 C중대 재정비 후 재공격 준비했으나, 오히려 적에게 발견되어 역습당하였고, 점점 부상자가 속출하게 되었다.

밤 연막과 야간을 이용해 철수

1951.7.29. 미군 1개 대대가 공격 주도하고 네덜란드대대는 미군에 대한 화력 지원

대우산 점령

내덜란드대대는 대우산의 방어력을 보강하기 위해 경기관총으로 증강된 소대규모를 1120고지로 파견

1951.8.6. 전선 소강상태로 접어들고, 대대는 사단예비가 되어 소양강변의 관대리로 이동

  • 전투 결과 =

네덜란드대대 7.26일 전투에서 전사 11명과 부상 31명, 실종 1명, 전의상실 8명의 인명손실 발생

별고지 전투

네덜란드대대가 평강 남방 10km 지점에 위치한 중공군의 전초진지인 별고지(430고지)를 공격하여 포로를 획득하고 방어시설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받고 1952년 2월 18일 각종 가용 지원화력의 엄호 하에 공격을 전개한 전투

  • 전투 경과

1952.2.5. 미 제2사단 제 38연대 예비로 전환하여 철원 동쪽의 하리동에 집결

1952.2.10.~2.15 적 유인 작전인 유엔군 ‘Calm Up’ 작전 실패, 네덜란드대대는 사단장이 은성고지와 바꽃고지 좌측 중공군 주요 전초진지인 별고지를 기습 공격하도록 지시

(별고지는 2개 소대규모 중공군이 배치되어 있었고, 고지 후방에는 중대규모의 증원 병력도 있었음, 이들은 후방 472고지 일대에 구축한 강력한 지원기지로부터 화력지원까지 받고 있었음. 네덜란드대대는 3개 포병대대, 4.2인치 중박격포 2개 중대, 전차 2개 중대, 부상자 및 탄약운반을 위한 노무자 70명과 화염방사기, 방탄복까지 지원받음.)

1952.2.16. 적진 항공정찰, 전쟁 계획 수립

1952.2.17. 대대장 모든 대대간부요원 집합하여 경사지 신속 이동 강조

1952.2.18.

04시 공격중대 B중대 출발

05시 엄호소대가 주저항선 통과하여 지시된 무명고지를 점령

06시 15분 후속하던 주공인 2개 소대가 공격개시선으로 진출해 모든 공격준비 완료

06시 45분 예정된 공격준비사격이 별고지 일대에 집중

07시 B중대 일제히 공격 개시, 포병의 오폭으로 잠시 공격 일시 정지되기도 함. 우일선 소대는 경미하게 저항하는 적을 격퇴하고 별고지 점령

좌전방 적이 수류탄으로 방어하자 중박격포와 무반동총으로 이들을 지원함.

07시 30분 적 472고지 방면으로 철수, 포병과 전차가 집중포격 실시해 많은 적 사살함.

09시경 연대장 지시에 따라 벙커 3개와 다량의 포탄 및 지뢰 등을 폭파하고 화력 엄호를 받으며 저항선으로 복귀

  • 전투 결과

네덜란드대대 5명 전사, 29명 부상

해군 주요 활동

네덜란드 해군은 1척의 함정이 항상 교대로 근무하면서 구축함 3척과 프리깃함 3척 등 6척의 함정이 전쟁 기간 중 유엔해군으로 해상초계, 해안봉쇄와 포격, 상륙지원, 지상군 기동 및 화력지원, 대공방위, 항모 및 소형함정 호위엄호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 (1) 에베르센호

1950.7.16. 일본의 사세보 해군기지 도착

1950.7.19. 영국의 서해안지원전대 예하의 기동분대에 포함되어 초계정찰 및 해안봉쇄임무 시작

1950.7.25. 영연방함대는 기동전대로 개편되어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는 적의 병력과 보급물자를 함포사격과 함재기폭격으로 차단하라는 명령받음. 인천항으로 항진하여 인천 일원의 주요 시설에 대한 포격을 가함.

인천상륙작전 이후

제91기동함대에 편입되어 특별정찰과 상륙군 선단의 호송, 초계임무 등을 수행함

1951년 이른 봄에 동해안으로 이동하여 적의 보급로에 대한 함포사격 등으로 적의 활동을 차단하는데 공헌함

  • (2) 반 가렌 호

1951.4.18 에베르센호의 이무를 인계함. 서해 작전해역에서 적의 해상지원 차단 및 봉쇄임무를 담당함.

1951.6월 항모호위로 임무가 환원되어 서해항모분대에 편입됨. 아군 유격부대에 탄약과 보급품을 지원하는 한편 지상군의 측면지원 임무를 수행함,

1951.11.18. 흥남 주변의 주요 군사목표에 대한 포격작전을 실시한 후 서해 상에서 여러 도서를 확보하고 유엔군 레이더기지, 조종사구조기지, 유격부대 기지에 대한 보호 및 지원임무를 수행하고 한국 해역을 떠남.

  • (3) 피엣 헤인 호

1952.3.2. 반 가렌호와 임무 교대함. 항공모함 호위임무 수행, 평양-개성 간 해안포대와 보급품집적소에 대한 함포사격임무를 수행, 도서기지 방어임무 수행

  • (4) 반 나소 호

1953.1.18. 서해안지원전대에 소속되어 해안포격과 도서방어, 항공호위임무를 수행, 해상초계임무

1953.12.5. 프리깃함 두보아 호에 임무를 인계함.

참전 관련 통계

참전 기간 동안 네덜란드 군의 병력파견은 약 700~800명 선을 유지하는 가운데 1951년 6월 30일에는 725명을, 1년 후인 1952년 6월 30일에는 565명을 기록하였다. 정전협정이 체결된 직후인 1953년 7월 31일의 병력 현황은 819명이었다. 1개 보병대대와 1척의 구축함 또는 프리깃함을 파견한 네덜란드는 기간 중 연인원 5322명을 한국전선에 파견하였다. 함정의 경우 에베르센호 237명, 반 가렌호 247명, 피엣 헤인호 237명, 반 나소호 183명, 두보아호 209명, 반 지질호 209명, 기타 임무 28명이 참전하였다.

참전연인원 참전규모
지상군 해군
5322명 보병대대 : 1

병력 : 819명

구축함 또는 프리깃함 : 1척

네덜란드군은 횡성전투를 비롯한 여러 전투 및 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120명이 전사하고 645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3명이 포로가 되는 인명피해를 입었다. 부상자 중 292명은 원복을, 262명은 예편하였으며, 91명은 불구가 되었다.

부상 전사/사망 실종 포로
645명 120명 X 3명 768명

1953년 10월 1일 네덜란드대대는 그간의 전공으로 인해 대한민국 대통령 부대표창을 수여받았다. 이에 앞서 대대는 횡성-원주전투에서 세운 전공을 높이 치하하는 미국 대통령의 부대표창을 1951년 8월 9일 밴 플리트 대장으로부터 수여받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네덜란드대대는 한국 전쟁에 참전한 기간 동안 대한민국 대통령 부대표창을 비롯한 3회 부대표창과 156회의 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네덜란드정부의 The Cross for Justice and Freedom의 영예를 차지하였다.

참전 의의

네덜란드는 다른 유엔참전국과는 달리 민간단체에서 자발적으로 참전을 촉구하여 파병을 결정하였다는 데 의의가 있다. 당시 네덜란드 정부는 국내외의 군사적인 사정으로 지상군의 파병이 불가한 형편이었으나, 많은 국민들이 자유민주주의의 수호를 위한 참전을 촉구하고 여론을 형성함으로써 파병이 가능하게 되었다. 네덜란드 국민이 보여준 용감성과 자유수호에 대한 의지는 대한민국이 존립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하였고, 자유세계를 결속시키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기념사업

참고 문헌

1. 6.25전쟁과 UN(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 6.25 참전국 현황(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3. 6.25 전쟁 인명 피해현황(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4. 네덜란드군 6.25전쟁 참전사(국가보훈처)

5. 네덜란드의 한국 전쟁 참전에 대한 연구(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닐스미스터버리, 석사 논문)

캐나다

참전 배경

1950년 6월 북한군의 남침 소식을 접한 캐나다는 당시 한국과의 외교관계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UN의 북한국에 대한 응징에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하였다.

1950년 6월 30일 캐나다 의회는 "집단안보의 효율성을 과시하기 위한 정부의 어떠한 조치도 적극 지지한다."라고 발표하며 한국에 대한 파병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

당시 캐나다의 총리였던 루이 생로랑(Louis St. Laurent)은 "유엔결의의 이행에 참여하는 것은 평화회복을 위한 유엔의 집단안보활동 중의 일부를 담당하기 위함이다."라는 연설로 파병 의의를 설명하였다.

편제 및 편성

  • 1950년 7월 5일 - 아다바스칸(Athabaskan)호, 캐유가(Cayuga)호, 시욱스(Sioux)호로 구성된 구축함 3척 - 미 극동해군사령부에 배속
  • 1950년 7월 21일 - 제 426항공수송대대 - 미국 워싱턴 맥코드(McChord) 공군기지에 배속 / 공중전 경험이 있는 조종사 22명을 선발해 미 공군에 파견
  • 1950년 11월 25일 - PPCLI(Princess Patricia Canadian Light Infantry) 제 2대대 - 미 제 9군단 산하의 영국군 제 27여단에 배속

주요 전투 및 작전

가평 전투

참전 의의

프랑스

참전 배경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당시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이었던 프랑스는 전쟁 이전인 1948년 5월 '유엔한국임시위원단' 활동 등 한국문제의 해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대한민국의 탄생에 기여하였고, 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는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는 방안을 미국과 함께 모색하였다. 특히 프랑스는 앞에서 언급한 유엔군 설치안을 영국과 공동으로 발의하여 유엔 결의안으로 통과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나아가 프랑스 정부는 국내의 적지 않은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1950년 7월 22일 유엔군에 프랑스가 참가할 것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였고, 이에 대한 일차적 조치로써 극동해군에 소속된 구축함 그랑디에르(La Grandiere)호를 한반도에 파견하였으며, 8월 24일에는 ‘한국전쟁에 참전할 프랑스군의 규모를 미국식 1개 보병대대’로 할 것과 ‘참전부대는 현역과 예비역의 지원자들로 구성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를 근거로 하여 10월 1일 ‘유엔군 예하 프랑스 지상군부대(Forces Terrestres Francaises de I. O. N. U)’가 공식적으로 창설되었고, 프랑스에서 약 한 달의 훈련을 끝낸 프랑스대대가 1950년 11월 29일 부산에 상륙함으로써 프랑스의 한국전쟁 참전이 본격화되었다.

시대적 상황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 이사국인 프랑스는 유엔군 사령부 설치안을 공동으로 제안하였고, 7월 12일 출범한 르네 쁠레방(René Pleven) 총리가 이끄는 프랑스 내각은 7월 22일 한국전쟁에 유엔군으로서 프랑스의 참전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프랑스 정부가 한국전쟁에 지상군 전투 부대를 파견하는 데에는 전후 프랑스 사회가 지닌 다음의 두 가지 국내 정치적인 문제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중 한 가지 문제는 제 2차 세계대전의 종전 직후 서부 유럽 특히, 프랑스 대중사회에 광범위한 지지기반을 형성한 사회주의적 정서와 프랑스 공산당의 활발한 반전 및 평화운동의 분위기를 어떻게 돌파하느냐의 문제였고, 다른 하나는 프랑스 정부가 인도차이나전쟁과 마다가스카르, 알제리 등 아프리카의 반-프랑스지역 소요를 해결할 수 있는 국방예산을 어떻게 확보하느냐에 관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당시의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서 한국전쟁에 새로운 전투부대를 파병하는 문제는 프랑스 정부에게 사실상 큰 부담이 된 것은 사실이었다.

프랑스 여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 이사국인 프랑스는 유엔군 사령부 설치안을 공동으로 제안하였고, 7월 12일 출범한 르네 쁠레방(René Pleven) 총리가 이끄는 프랑스 내각은 7월 22일 한국전쟁에 유엔군으로서 프랑스의 참전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프랑스 정부가 한국전쟁에 지상군 전투 부대를 파견하는 데에는 전후 프랑스 사회가 지닌 다음의 두 가지 국내 정치적인 문제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중 한 가지 문제는 제 2차 세계대전의 종전 직후 서부 유럽 특히, 프랑스 대중사회에 광범위한 지지기반을 형성한 사회주의적 정서와 프랑스 공산당의 활발한 반전 및 평화운동의 분위기를 어떻게 돌파하느냐의 문제였고, 다른 하나는 프랑스 정부가 인도차이나전쟁과 마다가스카르, 알제리 등 아프리카의 반-프랑스지역 소요를 해결할 수 있는 국방예산을 어떻게 확보하느냐에 관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당시의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서 한국전쟁에 새로운 전투부대를 파병하는 문제는 프랑스 정부에게 사실상 큰 부담이 된 것은 사실이었다. 이와 같은 프랑스의 대내외적 안보환경을 이용하여 프랑스 공산당은 프랑스의 한국전쟁에 대한 참전을 반대하는 여론을 주도하였다. 당대 프랑스의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프랑스 공산당 기관지인 『뤼마니테(L’Humanité)』는 전쟁이 발발한 다음 날인 1950년 6월 26일 소련의 공식적 논평을 근거로 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토요일 밤에서 일요일 새벽에 걸쳐 미국의 꼭두각시인 이승만 정부의 남한군이 38선을 따라 정해져 있는 남한과 북한의 국경선 중 세 곳에서 공격을 감행했다. 이전에 있었던 여러 도발사건에 이어 감행된 이번 공격에 대해 북한 인민공화국 정부는 단호하게 응수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전투는 빠르게 대규모로 확대되었으며, 급전에 따르면 현재 인민 공화국 군대가 공격자들을 남한 영토로까지 물리쳤음이 확인되었다.”

"토요일 밤에서 일요일 새벽에 걸쳐 미국의 꼭두각시인 이승만 정부의 남한군이 38선을 따라 정해져 있는 남한과 북한의 국경선 중 세 곳에서 공격을 감행했다. 이전에 있었던 여러 도발사건에 이어 감행된 이번 공격에 대해 북한 인민공화국 정부는 단호하게 응수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전투는 빠르게 대규모로 확대되었으며, 급전에 따르면 현재 인민 공화국 군대가 공격자들을 남한 영토로까지 물리쳤음이 확인되었다.”

이처럼 『뤼마니테』는 한국에서 전쟁을 시작한 측은 남한 정부라고 분명히 하면서 남한에 의한 북침설을 주장하였고, 38도선 이남에서 진행중인 북한 인민군의 군사작전을 오히려 방어적 성격의 작전으로 옹호하고 있으며, 이와 같은 공산당 기관지의 주장에 사르트르 등 프랑스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인식을 같이하였다. 뿐만 아니라 『뤼마니테』는 전쟁의 발발이 ‘남한에서 시행해 온 미국정책의 결과’라고 규정함으로써 전쟁의 책임을 일방적으로 미국에 전가하였고, 주장의 말미에 ‘한국에서 전개되고 있는 사태가 전 세계 평화 지지자들에게 심각한 경고’라고 주의를 환기하면서 ‘핵전쟁에 대항하는 수억 명 평화 지지자들의 더욱 효율적인 단결’을 촉구하였다. 또한 『르 몽드(Le Monde)』는 한국전쟁은 북한군의 남한에 대한 기습공격으로 시작되었다고 보았고, 나아가 한국전쟁을 소련이 지원하는 공산주의적 북한 체제 대 미국이 지원하는 반공산주의적 남한 체제 간의 대결인 이른바 ‘미·소 대리전’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간주하였다. 나아가 『르 몽드』는 남한에서 민주주의의 미숙한 실현 및 남한 정부의 정치적인 취약성으로 말미암아 남한을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로 포함시키기에는 약간의 거리가 있지만, 이런 문제 때문에 국제 여론이 남한을 지원하는 데에 주저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고, 이런 관점에서 프랑스가 미국이 주도한 유엔 결의안에 동의한 것을 매우 긍정적 조치로 평가하였다.

편제 및 편성

한국에서의 전황이 나날이 악화되고 있는 7월 22일 프랑스 정부는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네덜란드, 튀르키예에 이어서 유엔군으로서 한국전쟁에 참전을 발표하였고, 프랑스 국방부의 지휘부는 여론에 부합하는 한국 전 참전방법을 세심하게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프랑스 정부는 8월 25일 블랑 장군과 몽클라르(Ralph Monclar) 장군이 중심이 되어 한 달여를 검토한 새로운 한국전 파병 동의안을 하원 통과시킨 후 발표하였는데, 발표안의 핵심은 ‘현역 및 참전 경험을 지닌 예비역 중에서 순수하게 지원자들로만 구성되는 미국식 1개 보병대대를 창설’하는 것이었다. 이 발표에 따르면 대대급인 파병부대의 전투원은 장교 39명, 부사관 172명, 병사 806명 등 총 1,017명이었고, 이 부대를 지원하기 위한 별도의 1개 중대에는 장교 10명, 부사관 40명, 병사 350명 등 총 400명이 편성되었다. 또한 프랑스 본국에는 장교와 병사 150명으로 편성된 예비중대를 편성하였다. 전원 현역과 예비역으로 충원되는 지원병들의 현역과 예비역의 비율은 장교는 각각 50퍼센트였고, 부사관은 70퍼센트 대 30퍼센트였으며, 병사들은 10퍼센트 대 90퍼센트였다. 빠리지엔 리베레 신문의 지원병 모집공고를 통하여 한국전 파병을 위한 유엔군-프랑스대대(Battalion Francais de l’O. N. U)의 충원과 편성 은 10월 1일 완료되었는데, 프랑스 전투대대는 3개 전투중대, 1개 지원중대, 그리고 본부중대로 편성되었다. 그리고 각각의 중대는 지원병들의 과거 출신 병과와 경력을 고려하여 편성하였는데, 이것은 초대 대대장인 르미르 소령이 전투부대원들에게 필수적인 동지애적 유대감 및 감투정신을 최단 시간 내에 극대화하려는 목적에서 시도한 것이었고, 그 결과는 매우 양호하였다. 이에 따라 제1중대(중대장 드 카스트 리 대위)는 주로 해병대 출신들로 구성됐으며, 제2중대(중대장 위샤르 대위)는 대부분 수도방위 보병부대 출신들로 구성됐으며, 제3중대(중대 장 세르 대위)는 낙하산부대와 외인부대 출신들로 편성되었다. 전투지원 중대는 포병과 특수기술병과 출신으로 구성되었고, 본부중대는 수송·기계 등 기술병과 출신으로 편성되었다. 이처럼 부대 편성을 완료한 프랑스군 대대는 약 한 달간 오부르 훈련기지(au camp d‘Auvours)에서 제대별 훈련을 마치고 드디어 10월 25일 한국을 향하여 마르세이유항을 출항하였다.

프랑스 지상군 참전부대 및 지휘관
부대명 직위 지휘관 비고
계급 성명 참전기간
프랑스대대 총지휘관 중령 Monclar 1950.11.~1951.11. 미 제2사단

배속

대대장 중령 Lemire 1950.11.~1951.09.
중령 Beaufond 1951.09.~1951.11.
중령 Borreil 1951.12.~1952.11.
중령 Germiny 1952.12.~1953.10.
유엔군-프랑스 대대 최종 편성
사령관 중령 몽클라르
참모부 부사령관, 수석군의관, 기갑부대장, 공병대장, 부관 및 군사우편담당관
대대본부 대대장, 부대대장, 참모장, 제 1과, 제 2과, 3과, 군의관, 군목
본부중대 중대장, 행정소대장, 군수담당, 수송관, 연락 및 통역, 공병소대
제 1중대, 제 2중대, 제 3중대 각 중대마다 중대장(대위)과 부중대장(중위, 소위) 편제
화기중대 75밀리 무반동총소대, 기관총 소대, 81밀리 박격포소대

주요 전투

원주/문막 전투(1951.1.5~1.26)

원주 쌍터널 전투(1951.1.31~2.2)

지평리 전투(1951.2.13~2.15)

중공군 춘계공세 기간 중의 전투(1951.4.~5.)

단장의 능선 전투(1951.9.13~10.13)

철의 삼각지 전투와 T-Bone지구 전투(1952.7)

화살머리고지(Arrowhead Hill) 전투(1952.10.6~10)

휴전 임박 시기 전투 (1952.12.~1953.07.)

1952년 12월 1일 드 제르미니 (de Germiny)중령은 보레유 중령으로부터 한국전 프랑스대대의 지휘권을 인수받았다. 제3차 프랑스대대의 지휘부는 대대장 드 제르니미 중령, 부대대장 알랙상드르 소령, 제1중대장 오르사(Orsat) 대위, 제2중대장 르푀브르(Lefeuvre) 대위, 제3중대장 조잔(Jozan) 대위, 지원중대(C. A)장 쥐파르트 대위, 지원중대(C. B)장 코스테르(Costerg) 대위로 편성되었다. 휴전을 불과 7개월 앞둔 1953년부터 전선은 화살머리고지 전투와 같은 대규모의 고지 쟁탈전이 없이 비교적 평온하였다. 그러나 적군의 포격은 계속되었고 작전의 양상도 소규모 침투와 매복전투로 바뀌었다. 1월 31일 프랑스대대는 송곡리에 있는 영연방 제1사단의 블랙워치연대 1개 대대와 작전임무를 교대하고 전방 방어선 진지를 다시 점령하였다. 2월이 되어서는 ‘사람이 살지 않는 지대(no man’s land)’에 대한 주야간 정찰활동이 활발하였고, 프랑스대대는 일상적인 작전인 눈 덮인 땅에서 전방초소 공격, 수색, 척후, 정찰 등 소규모의 작전 임무를 지속적으로 수행하였다. 3월 1일 중공군 1개 대대가 프랑스대대의 진지를 공격했지만, 한 시간여의 전투 후에 중공군은 격퇴됐다. 4월 7일 대대는 동두천 옆 캠프 케이시(Camp Casey)로 이동해 휴식을 취했다. 6월 20일 프랑스대대는 중가산지구의 방어선에 다시 오르게 됐다. 휴전이 임박한 것처럼 보였지만 프랑스대대는 주방어선 전면에 철조망, 지뢰 등 장애물을 설치하고, 적군의 침투에 대비해 ‘사람이 살지 않는 지대’에 대한 주야간 정찰활동을 강화하였다. 7월 18일 야간에 금화-철원을 목표로 한 적군의 최후의 공격이 프랑스 진지를 향하여 집중되었다. 중공군은 뒤로 중위가 지휘하는 제1중대의 모든 최전방 초소에 포격을 가해왔다. 20분 동안 2백발의 포탄이 모든 방어선에 쏟아졌고, 집중 포격에 이어서 적군의 정찰대가 대대의 전초진지를 습격하거나, 진지를 후방으로 침투하여 포위를 시도하면서 상황은 급속도로 악화돼 갔다. 하지만 중공군의 마지막 집중포격과 연이은 진지 침투 공격이 프랑스 대대에게 상당히 위협적이었지만, 진지를 없애기에는 불충분했고 진지 내 프랑스 병사들의 용감무쌍한 투혼을 억제하기에는 부족했다. 이것은 적군의 철원과 금화 방면에 대한 마지막 공격이었다. 프랑스대대가 중공군 2개 연대의 돌격을 잘 막아냈지만, 이 마지막 전투에서 프랑스대대는 전사 5명, 부상 44명의 인명 손실을 당하였다. 7월 27일 아침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됐고, 3년여에 걸친 전쟁이 멈췄으며, 이로써 유엔군·프랑스대대도 약 2년 8개월에 걸친 한국전선에서의 전투를 마무리하였다.

참전 관련 통계

프랑스군 참전 현황
참전연인원 참전규모
지상군 해군
3,421명 보병대대 : 1

병력 : 1,185명

구축함 : 1척

뉴질랜드

참전 배경

시드니 조지 홀랜드(Sidney George Holland) 수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1950년 6월 25일 대한민국을 기습 침공하여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자, 미국을 전면에 내세운 UN 안전보장이사회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게 철군을 요구했다. 이 요구가 무시되자 1950년 6월 27일 회원국들에게 한국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다.[22] 뉴질랜드의 홀랜드(Sidney George Holland) 수상은 의회에서 “정부는 영·미 양국 정부와의 긴밀한 협조를 통해 필요하면 즉각 우리 해군의 프리깃함을 한국에 파견하고자 한다.”라고 밝혔으며, 이런 그의 발언이 뉴질랜드 의회에 의해 만장일치로 지지됨에 따라 미국의 대한 군사원조안이 통과된 지 30시간 뒤인 1950년 6월 29일에 뉴질랜드가 참전을 결정하게 되었다.[23]

편제 및 편성

주요 전투와 작전

참전 의의

뉴질랜드 국기

뉴질랜드(New Zealand)는 1950년 6월 27일 UN 안전보장이사회의 전투 지원 요청에 30시간 후인 1950년 6월 29일에 참전을 결정했다. 뉴질랜드군은 참전 결정 후 1950년 7월 3일에 프리깃함 두 척을 출항시켰으며, 1950년 7월 26일 1개 포병부대를 새로 창설해 파병하기로 결정한 다음 날인 7월 27일부터 새로 창설한 포병부대를 ‘한국부대(Korean Force, 약칭 K-Force)’라고 명명하고, 같은 해 11월 26일까지 교육을 이수시킨 후, 12월 10일에 대한민국으로 파병했다.[24] 뉴질랜드군은 참전 기간동안 지상에서 가평전투를 지원하고, 코멘도작전을 지원하는 등의 활약을 펼쳤고, 해상에서는 프리깃함을 통한 호위작전과 초계작전을 수행했다. 이후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조인되자, 뉴질랜드군은 휴전 이후 임무를 수행하다가 지상군은 1954년 11월에, 해군 함정은 1954년 3원 2일에 최종적으로 철군했다.[24]

필리핀

참전 배경

편제 및 편성

주요 전투 및 작전

참전 의의

튀르키예

참전 배경

편제 및 편성

주요 전투 및 작전

군우리 전투

금양장리 및 151고지 전투]

참전 의의

태국

참전 배경

편제 및 편성

주요 전투 및 작전

폭찹힐 전투

참전 의의

남아프리카 연방

남아프리카 연방 국기

남아프리카 연방은 현재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전신으로 1910년부터 1961년 사이에 아프리카 대륙 최남단에 존재했다.

참전배경

남아프리카 연방은 이전부터 유엔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6.25 전쟁이 발발하고 유엔군의 참전이 확정되자 1950년 7월 1일 남아프리카 연방은 지지성명을 발표하였다. 그 후 자국 국회의 받아 9월 4일 더반 항에서 제2전투비행대대를 파견하고 11월 5일 요코하마에 도착하여 1950년 11월 16일부터 휴전일인 1953년 10월 29일까지 작전을 수행하였다.

편제 및 편성

남아프리카 연방은 유엔 참전국 중 유일하게 공군부대만 파견한 국가이다. 남아프리카 연방의 제2전투비행대대는 미군으로부터 F-51 머스탱 16대를 넘겨받아 작전을 수행하였다.

주요 전투 및 작전

남아프리카 연방의 제2전투비행대대는 일본과 한국의 기지에서 출격하여 근접항공지원과 차단폭격작전에 주로 참가하였다. 총 1만 2405회의 출격을 하였으며(F-51 머스탱: 10,373회, F-86 세이버: 1,694회) 북한군 전차 44대, 야포 221문, 대공포 147문, 교량 152개소, 보급품 보급소 500여 개소, 각종시설 10,920개소 등을 파괴하는 전공을 세웠으며 그로인해 'Flying Cheetah(날으는 치타)'라고 불렸다. 총 37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였다.

남아프리카 연방 전사자 명단

참전 의의

기념사업

남아프리카 연방 참전용사들을 기리기위해 1975년 9월 29일 경기도 평택시에 남아프리카 연방 참전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참전 기념비는 참전국 중 유일하게 공군만 파견한 것을 나타내기 위해 비행기 모양으로 이채롭게 설계되었으며 남아프리카 연방을 상징하는 영양의 동상도 세워져 있다. 기념비 벽면에는 남아공 참전용사들의 활약상과 함께 비문이 적혀있다.

비문

자유와 국가간의 친선은

남아인들의 높은 이상이요

자랑스러운 유산이다.

이들이 치른 큰 희생은

영원한 격려이어라.

그리스

참전 배경

그리스는 당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튀르키예를 제외한 주변국의 공산화와 소련과 동구권 공산국가들의 지원을 받는 자국내 공산주의자들의 반란으로 인해서 정국 혼란이 이어졌으며 그 와중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동유럽권 국가 중에서는 유일하게 참전 의사를 밝혔다.

편제 및 편성

  • 파한 그리스군 사령부 (Greek Expeditionary Force)
    • 스파르타 대대
    • 제13 수송 편대

주요 전투 및 작전

381고지 방어 전투

연천 313고지 전투

철원지구 420고지 전투

북정령 전투

참전 의의

기념사업

벨기에

참전 배경

1950년 6월 27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결의된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에 16개국이 전투부대를 파견했으며, 그 가운데 벨기에가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벨기에는 1949년 중립을 포기하고 NATO에 에 가입하였다. 따라서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도 군대가 창설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1950년 7월 14일, 벨기에는 유엔과 미국으로부터 재차 참전 종용을 받아 7월 22일 지원병을 모집한 후 상황이 비슷하던 룩셈부르크와 통합된 대대를 편성하여 파병을 결정하였다. 장교와 부사관들은 9월 18일부터 데임(Marche-les-Dames) 병영에서, 사병들은 10월 2일부터 레오폴드 병영에서 선발했다. 이들 가운데는 전 상원의원이자 국방부장관인 믈랑(Moreau de Melon)예비역 소령도 끼어있었다.

편제 및 편성

벨기에군은 3개 소총중대, 1개 화기중대, 대대본부 및 본부중대 등 삼각편제로 편성되었다. 화기중대는 1개 기관총소대(30미리, 1/4톤 정찰대 포함), 1개 박격포소대(3인치 박격포), 1개 대전차소대(3.5인치 로켓) 및 1개 공병소대로 편성되었다. .

주요 전투 및 작전

한강선 진출

임진강 전투

학당리 전투

잣골지구 전투

참전 의의

기념사업

룩셈부르크

참전 배경

룩셈부르크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일원으로서 근본적으로 소련의 유럽 지배에 경계심을 갖고 있었다. 이들 국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북대서양조약기구에 대해 실질적으로 기여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며, 유럽 내 미국의 확고한 역할을 유도하려면 아시아에서 미국과 함께 공산주의자들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한국 전쟁에 참전하게 된 것이다.

편제 및 편성

룩셈부르크 소대는 유엔군 중에서도 가장 작은 규모를 갖고 있어 파병의 최소 요건인 1천 명의 군인 수를 충족하지 못했다. 그러나 룩셈부르크는 예외일 수밖에 없었다. 룩셈부르크의 인구는 20만으로 작은 규모였기에 대규모로 군인을 파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베네룩스 3국 중 하나인 벨기에 정부와 군을 함께 파병하기로 결정하고 룩셈부르크의 소대를 벨기에 대대에 통합하게 된다. 결국, 룩셈부르크는 1950년 11월 대한민국에 44명의 자원 보병군인 소대를 파병하게 됐다. 벨기에 의용대 또는 갈색 베레모로 알려진 B.U.N.C는 요셉 폴리엔 정부에 의해 625전쟁에 참전한 벨기에-룩셈부르크군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해당 대대는 1951년과 55년 8월 기간 복무하면서 53년 휴전협정 이후에도 한국에 주둔했다. 해당 기간이 끝날 무렵 총 3,171명의 벨기에군과 78명의 룩셈부르크군이 한국에서 복무했다. 덧붙여 이 당시 룩셈부르크는 병사의 수도 적었기 때문에 사관학교가 있을리가 없었다. 그로 인해 룩셈부르크의 장교들은 프랑스, 벨기에 등의 사관학교에서 교육받았기 때문에 그 나라의 전투 지휘체계에 익숙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 따로 1개 소대만 보낸 것이 아닌 벨기에 대대에 통합하여 파병을 보낸 것은 매우 합리적인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미 벨기에의 전투체계에 익숙한 상태였기 때문에 합동작전을 펼치기 매우 수월했기 때문이다.

주요 전투 및 작전

금굴산 전투

학당리 전투

설마리 전투

중공군 춘계 공세

참전 의의

기념사업

한국-룩셈부르크 관계

룩셈부르크는 우리나라의 전통적 우방국으로 다른 베네룩스 제국과 함께 국제무대에서 우리나라의 입장을 계속 지지해 왔으며, 1949년 8월 우리나라를 승인하고, 1961년 11월 4일 양국 간 국교가 수립됐다. 1973년 10월 발족된 한국∙룩셈부르크 친선협회가 대표적 친한 단체이며, 1977년에는 한국·벨기에·룩셈부르크 민간경제협력위원회를 발족시켜 양국 간의 경제협력을 강화하게 된다. 양 국가는 1970년 6월에 사증면제 협정을 비롯하여 1976년 9월 한국·벨기에·룩셈부르크 투자보장 협정, 1978년 6월 한국·벨기에·룩셈부르크 경제협력 협정, 1984년 11월 한국·룩셈부르크 이중과세방지 협약, 1987년 1월 한국·벨기에·룩셈부르크 해운 협정, 2000년 한·룩 항공협정, 2003년 4월 항공 협정이 체결됐다. 우리나라의 대 룩셈부르크 수출액은 2405만 달러, 수입액은 6323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품으로는 산업전자제품·기계부품 등이 있으며, 철강제품·섬유류·화학제품 등이 수입품 주종목이다. 한편, 양국 간에는 1977년 5월 국회 6·25전쟁 참전의원친목회의 룩셈부르크 방문, 1982년 4월 한국·벨기에의원친선협회 우리 측 의원단의 룩셈부르크 방문이 있었고, 제24회 서울올림픽에는 14명의 룩셈부르크 선수단이 참가했다.

에티오피아

참전 배경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의 사진.

에티오피아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7월 2일 "한국의 위기상황을 예의 주시하며, 유엔의 결의를 적극적으로 지지한다."라는 공식성명을 발표한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파병을 결정했다. 당시 에티오피아 군은 이탈리아의 의해서 강제로 무장해제를 당한 상황이였기 때문에 온전한 군대가 존재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파병을 결정했던 것은 황제를 주축으로 한 국민들의 집단안보에 대한 강한 희망과 폭력을 증오하고 꺼지지 않는 자유를 열망하는 박애정신과 이탈리아에 의해 강제로 식민지로 전락했던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바가 컸다.

집단안보에 입각한 세계적인 최초의 노력에 에디오피아가 참가하게 되는 영광스런 순간에 우리가 그렇게 강력하게 주장하였던 집단안보의 실현 과정을 나와 함께 뒤돌아보지 않겠는가?[25] -하일레 셀라시에의 파병식 축사중-

편제 및 편성

에티오피아는 한국전쟁의 1개 보병대대 규모인 1200여명을 파병시키고 1년 단위로 교대시킨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병력은 황실근위대에서 자원한 병사들을 모집하여 선발 한 뒤 1개 대대를 구성하였다.

각뉴 부대[26]
각뉴 1대대 각뉴 2대대 각뉴 3대대
병력 수 1080명 병력 수 1094명 병력 1270명
대대장 중령 Teshome lrgetu 대대장 중령 Asfaw Andargue 대대장 중령 Wolde Yohannis Shitta
1중대장 대위 Tefera Waldetensye 1중대장 대위 Bellette Haile
2중대장 대위 Merid Gizaw 2중대장 대위 Molaku Bakelle
3중대장 대위 Mesheshe Assefa 3중대장 대위 Haile Mariam Lench
4중대장 대위 Negeta Wandemu 4중대장 대위 Immeru Wondie

주요 전투 및 작전

적근산과 단장의 능선 정찰전

철원 부근 전투와 삼각고지 쟁탈전

요크-엉클 고지 최전선의 사수

콜롬비아

참전 배경

한국전쟁 당시 콜롬비아만이 라틴아메리카에서 유일하게 한국 파병을 결정한 이유는 콜롬비아 국내 사정에서 찾을 수 있었다. 당시 콜롬비아 정부는 정치적 폭력상태로 확산된 사회적 불안을 효율적으로 통제할 능력을 상실했다. 1948년 보수세력의 존립을 위협하던 급진자유주의 지도자 호르헤 엘리세르 가이탄의 암살을 계기로 정치적 갈등은 폭력사태로 비화되었다. 이처럼 불안정한 상황을 극복하고자 보수정권은 연립내각을 구성하였으나 정치적 대립과 불안 해소에 실패하였다. 그러자 집권보수당은 폭력적 방법을 통해 권력기반 강화를 시도하였고, 동부 평원지대에서는 보수 독재체제에 반발한 지식인들의 지원으로 조직적인 게릴라 활동이 본격화되었다. 장기간의 국내 폭력사태로 인해 콜롬비아 군은 무력감, 사기저하, 실전경혐 부족 등 여러 가지 문제점이 노출되어 심기일전의 전환이 필요했고 콜롬비아군은 한국전쟁 참전을 군 현대화를 위한 기회로 인식했다. 또한 콜롬비아군의 한국전쟁 참전은 당시 대내적 위기상황 속에서 보수정부가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려는 정치적 동기가 강하게 작용한 것이다.

편제 및 편성

주요 작전 및 전투

김화 400고지 전투

180고지 전투

불모고지 전투

해군 주요 활동

콜롬비아 정부는 먼저 해군함정 파딜라호 파견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주미 콜롬비아대사를 통해 미 합동참모본부와 함정 파견을 위한 세부절차와 협조사항에 대해 논의하였다. 그 결과 콜롬비아 정부는 190명의 승무원과 함께 프리깃함 1척을 가능한 한 신속히 유엔 해군작전에 참여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진주만에서 미 해군과 합동훈련을 실시한 후 1951년 5월 8일 일본 사세보항에 도착하여 제95기동부대에 배속되었다.

제 95기동부대에 배속되고 3일 후 파딜라호는 다시 서해안 봉쇄전대에 편입되어 5월 14일 숙도와 석도간 항로 순찰을 시작으로 보급선단 호위, 해안순찰, 함포사격 등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후에도 콜롬비아 해군은 토노(Capitan Tono)호와 브리온(Almirante Brion)호가 1953년 9월 본국으로 복귀할 때까지 한반도의 동,서해안에서 교대로 임무를 수행하며 유엔해군 작전에 기여하였다.

콜롬비아 해군 잠전 함정 및 지휘관
함정명 참전기간 계급 지휘관
Almirante Padilla 1951. 5.~1952. 2. 소령 Julio Ceasar Reyes Canal
Capiran Tono 1952. 4.~1953. 1. 소령 Hernado Beron Victoria
Almirante Brion 1953. 6.~1954. 4. 소령 Carlos Prieto Silva

6.25 70주년 UN참전 22개국 정상 영상 메시지

'참전 지원' 미국 등 16개국, '의료 지원' 스웨덴 등 6개국에서 6월 25일 오후 8시 20분 국가보훈처 주최로 경기도 성남 서울공항 격납고에서 개최된 6·25전쟁 제70주년 행사에 유엔참전 22개국 정상들이 영상 메시지를 보내왔다.

70년 만에 귀환하는 국군전사자 유해봉환과 함께 열린 이번 행사는 6·25전쟁 당시 국가를 지키려 헌신한 모든 이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영웅에게(영문 부제·Salute to the Heroes(영웅들께 경례))”를 주제로 진행됐다.

다음은 유엔참전국 정상들의 영상 메시지 전문(번역본)이다.

2020년 올해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양국이 큰 어려움을 겪었고
지금도 바이러스가 세계를 순회 중인 가운데 몸소 여러분과 함께 자리를 하지 못해 유감입니다.
올해, 더구나 오늘이 얼마나 중요한 지 잘 알고 있습니다.
전쟁의 기억을 묵상하는 한국에 중요하다는 사실을요. 70년 전 한국을 분단시킨 전쟁입니다.
이 메시지와 동영상을 통해 저는 여러분께 프랑스 민족의 우정과 지지하는 마음을 전해 드리고자 합니다.
70년 전, 한민족은 전쟁으로 분열돼야 했습니다. 그 역사를 여러분과 함께 저희도 기억합니다.
우리의 우정은 몽클라 장군 휘하 프랑스군의 참전으로 맺어진 혈맹입니다.
참전을 위해 파견한 3,500명 용사가 한국군과 함께했고, 돌아오지 못한 이들도 있습니다.
이 3,500명 참전용사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몽클라 군대 역시 그들이 수행했던 결정적인 역할을 한국의 역사가 기억해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중요한 해에, 중요한 기념일에,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이 어떠하든 프랑스가 여러분 곁에 머물고 있다고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한국 곁에서 여러분을 지지합니다. 지나온 긴 도정을 가늠해 봅니다. 역사의 온갖 상흔을 되새기면서요.
그 도정에는 대한민국의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애착이 상존해 왔으며 우리를 결속시켜주는 많은 가치들이 있습니다.
동일한 의지를 공유하고 양자관계, 나아가 지역 및 G20의 틀 안에서 서로 협력하고 있습니다.
어제처럼 오늘도, 미래에도 변함없이 여러분 곁에 머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돌아가신 분들께, 작별을 고합니다.
잘 가십시오, 잘 가십시오, 살아있는 우리에게, 안부인사를, 안부인사를, 우리 모두에게 안부인사를
6·25전쟁 발발 70주년을 맞아 우리는 그 끔찍한 3년간의 파괴 기간 동안 한국을 지켜낸 모든 국가들의 공동 희생을 인지합니다.
수백만 명의 한국 민간인들과 뉴질랜드인들을 포함한 많은 나라에서 온 군인들이 한국의 미래와 우리 역내의 평화 확보를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오늘날에도 뉴질랜드군 인력이 한국에 주둔하여 정전협정을 감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반도에 마침내 평화가 정착하는 그날을 고대합니다.
참전했던 이들은 잊히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기억할 것입니다.

1950년대에 한반도의 평화와 안보를 되찾으려는 국제적 노력의 일환으로 남아공은 '날으는 치타'라고 불리는 남아공 공군 제2 비행중대를 6.25전쟁에 파견하였습니다.
이 끔찍한 전쟁에 고귀한 삶을 바치신 모든 군인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서로의 차이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평화적 방법이 군사적 대립보다 더 많은 이득을 가져온다고 우리는 굳게 믿습니다.
남아공은 한반도의 지속적인 평화와 번영을 바라는 국제사회에 동참하며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한 모든 국제적, 지역적 노력을 항상 지지합니다.
(제나니 들라미니 주한남아공대사 대독)

  • 그리스의 기 그리스 카테리나 사켈라로풀루 대통령
70년 전, 그리스는 한국에서 연합군과 함께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해 싸웠습니다.
그리스 파병군은 한국에 파병된 UN연합군 중 5번째로 큰 규모였습니다.
그리스 파병군은 전장에서 용맹함을 보였고 이는 널리 알려진 바입니다.
조국의 요청에 따라 “자신의 말에 순응하여” 전장에서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그리스 참전용사들의 희생에 감사를 표합니다.
그와 동시에, 민간인들을 포함하여 희생당한 모든 군인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6·25전쟁은 한국과 그리스 간의 깊은 우정과 협력 관계를 보다 더 견고히 하였습니다.
6·25전쟁 발발 70주년을 맞이하여, 그리스는 영구적인 평화와 번영을 위한 한반도 통일 노력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70년 전 벨기에는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기여해 달라는 유엔의 요청에 응했습니다.
수천 명의 벨기에 장병들이 군사 작전에 참가했고, 그들 중 106명이 전사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분쟁에 참가한 모든 장병들과 희생자들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전세계적인 팬데믹 상황에서 우리는 연대의 중요성을 다시금 더욱 더 깨닫고 있습니다.
지난 70년 동안 많은 분야에서 그래왔듯이, 우리는 평화롭고 지속가능한 세계를 만들기 위해 계속하여 협력할 것입니다.

70년 전 6·25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이는 한반도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기였고 오늘날까지도 그 흔적이 조금 남아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평화와 자유를 위해 싸웠던 모든 사람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그들의 삶을 바친 사람들과 현재 더 이상 우리와 함께할 수 없는 모든 참전용사들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영원히 그들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룩셈부르크는 대한민국의 자유 회복에 우리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보여주는 번영하는 경제와 활기찬 민주주의의 모습은 우리의 노력에 경의를 표하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Katchi Kapshida! (같이 갑시다!)

우리는 6·25전쟁 발발 70주년을 맞이하여 6·25전쟁에 모든 것을 바친 영웅들을 기립니다.
이 역사적인 순간에 에티오피아 용사들은 피로 맺어진 한-에티오피아 관계에 잊을 수 없는 흔적(기여)을 남겼습니다.
이것은 에티오피아가 오늘날까지 계속해서 지지하고 있는 집단 안보에 대한 약속입니다.

6.25전쟁 70주년을 기념하여 모든 콜롬비아 국민을 대표해 우애의 인사를 전합니다.
자유를 쟁취한 6.25전쟁을 거치며 우리 두 나라는 영원한 동맹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당시 라우레아노 고메스 (Laureano Gómez) 대통령은 UN의 호출을 받아,
15,000km 떨어진 타지에 약 5천 명의 병사로 구성된 콜롬비아 제1보병대대를 파병했습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주권 수호 임무를 도운 이 결정을 높이 평가합니다.
콜롬비아는 전세계 15개국과 함께 6.25전쟁에 참전했으며, 그 중 유일한 라틴아메리카 지역의 국가였습니다.
6.25전쟁은 20세기 역사에서 그 혹독함으로 손에 꼽히는 사건이었고,
이 전쟁에 목숨을 바친 용맹한 병사들과 그 유가족들은 콜롬비아 국민의 마음 속에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이들을 기리기 위하여, 우리는 우호관계를 점점 강화하여 결실을 얻을 수 있도록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양국관계가 시작된 1962년부터, 대한민국은 무역과 금융, 관광, 교육, 기술 등의 분야에서 콜롬비아의 동맹국이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COVID-19)의 유행으로 전세계가 큰 위기를 맞이한 상황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검진키트 확보를 위한 기부와 보고타(Bogotá) 의료센터 지원,
관련 분야의 지식 공유를 통한 대한민국의 소중한 지원과 호의가 있다는 점은 다행입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우리 양국을 이어준 신조(信條)를 기리고, 한국을 향한 콜롬비아의 우정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아울러, 우리 국민의 발전을 위한 양국관계 강화가 지체 없이 계속될 것이라는 콜롬비아의 의지를 거듭 전합니다.
모든 콜롬비아 국민의 이름으로, 형제의 나라인 대한민국에 우호의 인사를 전합니다. 신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문재인 대통령님 그리고 여러분, 6·25전쟁 발발 70주년을 추모하는 오늘 이 자리에서 말씀을 전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스웨덴 정부와 국민을 대신해 인사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전쟁으로 고통받고 대가를 치뤄야 했던 모든 이들을 기리며,
우리는 그 고통을 덜기 위해 희생했던 이들의 인류애를 떠올립니다.
한국인들이 이루어 낸 노력과 희생에 큰 경의를 표합니다.
스웨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저는 스웨덴이 기여할 수 있었던 사실에 자랑스러움을 느낍니다.
스웨덴적십자병원은 1950년 부산에 첫 외국인 의료시설로서 개원하였습니다.
병원은 1957년까지 운영되었으며 천 백여 명의 스웨덴인들이 이백만 명 이상의 군인 및 민간인들을 치료했습니다.
1953년부터 오늘날까지 중립국감독위원회 일원으로서 스웨덴군 장교들은 정전협정의 준수를 위해 근무하고 있습니다.
스웨덴은 한반도의 평화와 안보 발전을 위해 지속해서 전념할 것임을 말씀드립니다.
6·25전쟁 이후로 대한민국은 엄청난 변화를 만들어냈고, 인도적 지원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돕는, 전 세계의 롤 모델이 되었습니다.
돌이켜 보니 우리가 전쟁에서 함께했던 경험이 평화에 대한 공동의 헌신뿐만 아니라,
우리의 커져만 가는 파트너십과 우정의 근간이 되었다는 믿음이 생깁니다. 감사합니다.

친구 여러분, 이 특별한 날,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목숨을 바친 용감한 이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인도는 전쟁 중 한반도에 인도60공정야전병원부대를 배치하여 기여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전쟁이 남긴 잿더미에서 위대한 나라를 건설한 한국인들의 극복성과 결의에 경의를 표합니다.
저는 또한 문재인 대통령의 한반도 평화를 지키고 증진시키기 위한 노고에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인도 정부와 국민은 한반도의 영구적인 평화를 추구하고 있는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을 지지합니다.

모든 덴마크인은 덴마크 병원선 유틀란디아호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연합군의 노력에 기여한 점과 배에 탑승한 용감한 간호사와 의사들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유틀란디아호의 이야기는 다자간 협력의 가치를 보여주며, 또 우리의 파트너십과 우정에 대한 증거입니다.
더불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에 대한 덴마크의 지속적인 지지를 보여줍니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세계 평화와 안정, 그리고 번영을 위한 지속적인 협력을 기대합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623명의 용감한 노르웨이 남성과 여성들이 한국으로 건너와 “노르웨이 이동외과병원(NORMASH)”을 세워 봉사하였습니다.
그들은 군인들과 민간인들의 목숨을 구하고 고통을 치료해 주었습니다.
이들의 노력은 오늘날 두 나라의 따뜻한 우정과 특별한 관계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노르웨이는 이 분들의 업적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그리고 그 정신을 이어받아, 노르웨이는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지지와 노력을 계속해 나가겠습니다.

6.25전쟁 70주년을 기념하는 오늘, 이탈리아의 우호국인 대한민국 국민에게 말씀드립니다.
이탈리아는 6·25전쟁 시 이탈리아가 수행했던 특별한 역할에 대해 자긍심을 가지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시 이탈리아는 제68 적십자야전병원을 개원하여 의료지원과 구호활동을 실시했습니다.
이때 파견된 의무병들은 이탈리아 최초로 해외에 파견된 의료지원부대였습니다.
이후 의료지원부대 파견은 한-이 양국 간 깊은 우정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한국과 이탈리아는 대화와 국제 협력을 통해 자유와 민주주의 가치를 전파하기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양국의 공동 가치와 이러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치뤘던 희생에 대한 기억을 바탕으로,
오늘날 양국 국민은 코로나19 팬데믹과 같은 새로운 도전 과제를 대면하는데 있어 더욱 단결되고 결속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독일과 한국은 가슴 아픈 분단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독일에게 있어 분단은 과거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독일은 올해 통일 30주년을 기념합니다. 그러나 한국에게는 분단은 아직 쓰디쓴 현실입니다.
6·25전쟁 발발 70년이 지난 지금, 저는 한국이 한반도 평화, 자유, 안정을 추구함에 있어 큰 성과를 거두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독일은 굳건히 한국과 함께합니다.

문재인 대통령님, 귀빈 여러분, 여러분과 이렇게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로즈 가든에서 인사드립니다.
옆에는 제 집무실과 백악관이 있습니다. 아주 특별한 곳이죠. 여러분 또한 아주 특별한 곳에서 인생의 특별한 시기를 맞고 있습니다.
바로 6.25전쟁 70주년입니다. 공산주의를 막아내기 위해 용감하게 싸운 모든 분들께 감사와 경의를 표합니다.
여러분은 매우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하지 못해 아쉽습니다. 다음에 여러분을 직접 만나 악수를 할 날을 기약해봅니다.
유엔 참전국을 비롯해 많은 도움을 준 모든 분들께 우리가 합심해 이룬 성과는 실로 대단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승리를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엘리자베스 2세 여왕 폐하께서 대한민국 대통령과 국민, 그리고 6.25전쟁에 참전했던 모든 참전용사에게 보내는 메시지입니다.
여왕 폐하, 그리고 에딘버러 공작 전하께서는 6.25전쟁 발발 7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 국민과 모든 참전용사에게 안부인사를 전합니다.
여왕 폐하께서는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 희생된 모든 이들을 여러분과 함께 추모합니다.
(사이먼 스미스 주영 한국대사 대독)
70년 전 6ㆍ25전쟁 당시 함상전투기 파이어플라이와 시파이어 수십 대가
HMS 트라이엄프 해군 항공모함 갑판에서 출격하며 영국의 참전이 시작되었습니다.
휴전협정을 체결하기 전까지 8만여 명의 영국 육해공군 장병은 공산군의 위협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 싸웠습니다.
그 중 수천 명의 영국 장병은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보면서 그들의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느낍니다.
대한민국은 평화롭게 이루어낸 성공으로 희생된 이들을 추모합니다.
70년 전에도 그러했듯 영국은 지금도 대한민국과 함께합니다.

오늘은 6·25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기념일입니다.
2만7천여 명의 캐나다 용사들이 이역만리로 떠나, 516명은 고향으로 되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의 용기와 희생은 대한민국이 번영하고 평화로운 국가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용사들께 경의를 표합니다.

대한민국 국민들의 평화와 안보 그리고 국제 평화의 확립을 위해 함께 싸운 우리의 용맹한 병사들은 영원히 지속될 우정을 돈독히 쌓았습니다.
우리는 6·25전쟁에서 전례 없는 연대에서 생긴 끈끈한 우정이 나날이 돈독해지고 있음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2012년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된 양국관계가 앞으로 더욱 발전할 것이라 확신합니다.
이 역사적인 날, 6·25전쟁 70 주년을 맞이하여 저는 순교자들에게 자비와 감사를 표합니다.
저는 한국 땅의 영원한 휴식처에서 나란히 누워있는 영웅들의 성스러운 기억에 경의를 표합니다.
신께서 그들의 영혼을 축복하시기를.

여러분과 함께 6·25전쟁 참전용사를 기릴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17,000명이 넘는 호주군이 6·25전쟁에 참여, 그 중 340명은 다시 고국 땅을 밟지 못했습니다.
이 뜻깊은 날을 맞아 다시 한번 호주는 대한민국의 평화와 안정을 변함없이 지지한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유사한 입장의 양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모두가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양국은 시장경제와 자유무역의 가치를 수호하며 자유와 번영의 공존이 국가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 확인해 왔습니다.
한국과 호주는 공동의 가치를 토대로 든든한 우방이자 동반자 관계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동반자 관계를 통해 양국 국민을 보호하고 공동의 도전과제 해결을 위한 협력을 지속했습니다.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이러한 양국관계의 중요성을 기리며,
특히 그간 다양한 계기를 통해 만나 뵈었던 문재인 대통령께 특별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또한 약 10만 명의 한국계 호주인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우방국 대한민국 수호를 위한 호주 참전용사들의 희생을 잊지 않겠습니다.

저는 지난 2016년과 2018년에 6·25전쟁 참전용사들과 함께 부산과 횡성에 있는 군인 묘지를 방문했습니다.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습니다.
5천 명에 달하는 당시의 젊은 네덜란드 용사들에게 깊은 감사와 존경을 표합니다.
평화와 자유 그리고 안보를 위해, 지금 여기 함께 서서 그들을 기억합시다.
나아가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우리의 참전용사들을 기리며, 양국 간의 친밀한 우정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갑시다.

70년 전, 7,000명 이상의 젊은 필리핀 병사들이 동맹국 군인들과 함께 6·25전쟁에 참가했습니다.
율동 전투에서 이어리고지 전투까지 필리핀 병사들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는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6·25전쟁에 참여하여 싸운 필리핀과 모든 국가들의 병사들을 기억합니다. 기억하지 않을 방법이 없습니다.
용기는 쉽게 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영웅들을 기억하고 그들이 지켜내고자 했던 그 신성한 가치를 더욱 확고하게 해야 합니다.
그들이 바로 우리의 특별한 양자관계의 굳건한 버팀목입니다.
전세계는 지금 수많은 도전과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6·25전쟁에서 쓰러져간 그 영웅들을 기억하며 함께 연대하여 힘을 모아 일어섭니다. 감사합니다.

각국의 고위관계자 여러분, 6·25전쟁 참전용사 여러분과 모든 귀빈 여러분,
태국은 6·25전쟁 당시 유엔군과 함께 전투에 참여하기 위해 아시아 대륙 최초로 병력을 파병한 국가입니다.
6·25전쟁에 참전한 모든 참전용사들은 한반도의 안정과 안보를 지켜낸 유공자입니다.
저는 당시 임무를 다한 참전용사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들의 헌신은 지금까지 태국과 대한민국의 긴밀한 관계를 발전시키는 중요한 초석이 되었으며, 앞으로 양국의 관계를 유지할 기반입니다.
모든 참전용사들은 우리와 후손들에게 함께 한반도의 평화를 수호하여 역내 안정과 세계의 항구적 번영을 실현하기 위한 영감이 될 것입니다.

같이 보기

참고 문헌


각주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냉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0년 12월 22일. 
  2. “두산백과”. 2020년 12월 22일. 
  3. “미국사 다이제스트100”. 
  4. 《6.25전쟁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20년 12월 22일. p.8~24쪽. 
  5. 2차례 이상 중복부상자 11,150명을 1명의 부상자로 계산한 수치이며, 각각의 부상자로 계산한 수치는 103,284명
  6. 6.25전쟁과 UN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p.169.
  7. James A. Field, Jr. History of United States Naval Operations Korea(Washington: U.S, GP O, 1962), 해군본부 역, 『미 해군 한국전 참전사』, 1985, 72쪽
  8. 미 극동해군사령부에 파견된 함정은 경항공모함 HMS Triumph호, 순양함 HMS Belfast호와 HMS Jamaica호, 구축함 HMS Consort호와 HMS Cossack호, 프리깃함 HMS Alacrity호와 HMS Black-Swan호이다. Anthony Farrar-Hockley, The British Part in the Korean War, Vol, I, A Distant Obligation(LHMSO, 1990), p.52.
  9. Anthony Farrar-Hockley, The British Part in the Korean War, Bol. I, A Distant Obligation, pp.103-104.
  10. 6.25전쟁과 UN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p.166.
  11. 국방군사연구소, 『UN군 지원사』, 1998, 161-162쪽.
  12. 6.25전쟁과 UN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p.166.
  13. 6.25전쟁과 UN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p.166.
  14. 6.25전쟁과 UN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p.169.
  15. 6.25전쟁과 UN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p.166-167.
  16. 6.25전쟁과 UN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p.165.
  17. 6.25전쟁과 UN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p.171.
  18. 6.25전쟁과 UN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p.166.
  19. 6.25전쟁과 UN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p.65.-66.
  20. 6.25전쟁과 UN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p.64. 표 3-1
  21. 6.25전쟁과 UN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p.222.
  22. “Korean War”. 《NZ History》. 2020년 12월 15일에 확인함. 
  23. 손규석·조성훈·김상원 (2020년). 《6·25 전쟁과 UN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321쪽. 
  24. 국가보훈처 (2016년 3월 5일). 《캐나다·호주·뉴질랜드 6·25전쟁 참전사》 1판. (주)휴먼컬처아리랑. 195~197쪽. 
  25. 국가보훈처. 《에티오피아군 6.25전쟁 참전사》. 휴먼컬쳐아리랑. 55쪽. 
  26. 국가보훈처. 《에티오피아군 6,25전쟁 참전사》. 휴먼컬처아리랑. 64,95,1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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