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桓檀古記)는 대한민국의 종교인이자 유사역사가인 이유립이 1979년에 출간한 책이다.[1][2] 고대부터 전해지던 역사서 4권을 계연수가 묶은 것이라 주장하고 있으나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역사학계에서는 위서(僞書)로 판단하여 고중세사의 사료로 취급하지 않는다.[3] 계연수가 1911년에 《삼성기 상(上)》, 《삼성기 하(下)》,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의 5가지 책을 엮고 해제를 달아 제자인 이유립에게 주며 60년 뒤에 공개하라고 지시했고 이후 이유립이 1979년에 출간했다.
《환단고기》에서 언급된 문헌은 다음과 같다.[4]
《환단고기》를 전수받았다 주장하는 이유립이 밝히는 출간 경위는 아래와 같으나, 역사학계에서는 위서이므로 이러한 출간 경위 자체가 허위라고 판단하고 있다.
《환단고기》는 고조선 이전에 환국과 배달국이 존재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두 나라는 환인과 환웅이 통치하였으며, 각각 7대와 18대를 전하였다고 한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환인은 사백력의 하늘에서 홀로 변화하여 신이 되고 이 환인과 함께 하늘로부터 어린 남녀 800명이 천해의 동쪽 땅인 흑수(黑水)와 백산(白山)의 땅에 내려와 건국하였다고 한다. 사백력을 시베리아로, 천해는 바이칼호라고 주장하기도 한다.[11]
《환단고기》에 따르면 환국은 12개의 나라로 구성된 유목문화를 바탕으로 한 연방국가이며 각각의 비리국(卑離國), 양운국(養雲國), 구막한국(寇莫汗國), 구다천국(句茶川國), 일군국(一群國), 우루국(虞婁國) 또는 필나국(畢那國), 객현한국(客賢汗國), 구모액국(句牟額國), 매구여국(賣句餘國) 또는 직구다국(稷臼多國), 사납아국(斯納阿國), 선비국(鮮裨國)이다. 그 영토가 매우 넓어 남북이 5만 리요, 동서가 2만여 리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환국의 존속기간은 3,301년, 혹은 63,182년 동안 왕이 7대라고 한다. 《환단고기》에 기록된 환인은 다음과 같다.
《삼성기》의 〈신시역대기〉와 《태백일사》〈신시본기〉에서는 신시배달국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데, 단군이 세운 고조선 이전의 만주와 한반도를 중심으로 자리잡았던 한민족의 고대 국가라고 한다. 환웅이 다스린 국가로 18대 1565년의 역년이며, 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치우 또한 배달국의 한 임금으로 기록되어 있다.
제5대 환웅인 태우의 환웅의 열두 아들 중 막내가 태호 복희이며, 그의 후손이 현재의 산시성(山西省, 산서성)에 살았다고 한다. 환단고기에서는 태호 복희씨가 팔괘의 시초임을 밝히고 있다.
《환단고기》〈단군세기〉는 단군의 치세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으며, 그 역년은 다음과 같다.
해모수(解慕漱)는 고리국 사람으로, 고열가 단군의 지배하에 23세의 나이로 군대를 일으켰고, 8년째에 단군이 되었다.
고조선의 고열가 황제는 장수들이 더 이상 명령을 따르지 않게 되자 권력을 버리고 제국을 다섯 명의 중앙 귀족, 오가의 손에 넘겼다. 해모수는 23세에 장군이 되었다. 해모수와 그의 군대는 백악산을 습격하여 차지하고 천왕랑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단군 해모수는 기원전 195년에 죽었으며, 태자 모수리가 왕위를 이어받아 북부여의 2번째 통치자가 되었다.
모수리(慕漱離, 기원전 195년경 ~ 기원전 170년)는 북부여의 두 번째 단군이다. 고진의 형이기도 하다. 기원전 170년, 모수리 단군은 죽고 태자 고해사가 계승하였다.
고해사(高奚斯, 기원전 170년 ~ 기원전 121년)는 북부여의 세 번째 단군으로, 고우루와 동부여의 창건자 해부루의 아버지이다. 기원전 121년 고해사 단군이 죽자 태자 고우루가 북부여의 네 번째 단군이 되었다.
고우루(高於婁, 기원전 121년 ~ 기원전 86년)는 북부여의 네 번째 단군으로, 동부여의 창건자 해부루의 형이다.
기원전 86년 고우루는 상속자가 없이 죽고 그의 동생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는 군대와 고리국왕 고진을 보내어 위만 조선(기원전 195년경 ~ 기원전 108년)의 경계를 방비하였다. 한무제(재위 기원전 141년 ~ 기원전 87년)의 공격으로 위만 조선이 해체되었고, 북부여는 4군을 두려는 한나라의 병력을 공격하였다.
고두막(高豆莫, 기원전 108년 ~ 기원전 60년)은 동명의 창건자이며 북부여의 5번째 단군으로, 고열가 단군의 후손이라고도 한다. 그는 기원전 86년 해부루 단군을 몰아내고 북부여에서 권력을 잡았다.
기원전 108년 고두막은 졸본에서 동명을 창건하고 스스로 동명이라 하였다. 동명왕은 군대를 모아 한나라 군대를 공격하였다. 기원전 86년에 19회의 전투 후에 한나라군을 몰아내고 방비하였다.
기원전 87년 북부여의 단군 고우루는 동명왕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옮겨갈 것을 전언을 받고 근심하다 병들어 사망하였다. 고우루의 사후 그의 동생 해부루가 왕좌에 올랐으며, 기원전 86년에는 가섭원으로 옮겨 동부여를 세웠다. 그때 동명왕은 북부여의 5번째 단군이 되었다. 동명왕은 고무서를 북부여의 태자로 삼았다.
고무서(高無胥, 기원전 60년 ~ 기원전 58년)는 북부여의 6번째 단군이다.
고무서는 기원전 59년 고두막의 사후 왕좌에 올랐다. 기원전 58년 그의 치세 2년에 해모수의 직계 후손 고주몽이 졸본부여로 왔다. 고무서는 고주몽이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아보고 그의 딸과 결혼시켰다. 고주몽은 그의 자리를 이어 북부여의 7번째 단군이 되었다.
해부루(解夫婁)는 북부여 네 번째 단군 고우루의 동생이었다. 기원전 86년 고우루가 죽자 고열가의 후손 고두막이 왕좌를 차지하고 해부루를 동쪽으로 밀어냈다. 해부루는 동해 근처의 가섭원으로 이동하였고 동부여를 창건하였다.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한국 고유의 신앙과 구환(九桓)의 풍속, 풍습을 서술하고 있다.
마한과 변한의 역사를 적고 있다. 역대 마한, 변한의 군주가 나타난다.
단군 시대의 신교(神敎)를 설명하고 있다. 《삼일신고》와 인류 최초의 경전인 《천부경》이 있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일부 전해지지 않는 여러 서적의 인용문을 통하여 고구려의 역사를 서술하였다.
고진(高辰)은 북부여의 창건자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다. 고진은 고리국의 왕이며, 고구려의 창건자 고주몽의 증조 할아버지이다.
고진은 북부여의 장군으로 북부여의 4세 고우루 단군 아래에서 그는 고리국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곳은 압록강 서안에 위치하였다. 그는 고령에 고리국을 다스리며 우거를 막아 위만조선을 공격하였고, 이는 그의 아들과 손자에 의해 계승되었다.
고진의 증손 고주몽은 북부여의 7번째 단군이 되었다. 고주몽은 고구려를 창건하였다.
고주몽의 생부는 고모수(高慕漱) 또는 불리지(弗離支)라고 한다. 불리지는 고진 왕의 손자였는데, 고진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다.
옥저후인 고모수는 하백의 딸 유화와 만나 결혼하였고, 불리지가 죽자 고주몽은 웅심산(熊心山)에서 자랐으나 미움을 받아 탈출하였다. 경계를 넘어서 그는 북부여로 들어 갔다. 고주몽은 북부여의 6번째 단군 고무서의 사위가 되었고, 고무서가 죽자 북부여의 7번째 단군이 되었다.
대진국(발해)의 역사와 함께 역대 황제(왕)의 묘호와 시호, 연호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대위해는 《환단고기》에서 황제로 기록하지 않았고 당시에 사용된 연호도 기록하지 않았다. 이는 《환단고기》가 처음 쓰여진 1911년 당시 대위해는 발해의 국왕으로 인정되지 않았고 1940년에야 발해의 국왕으로 인정되었던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기도하다.
〈대진국본기〉에서는 대진국이라는 명칭만 사용되며 발해로 국호를 바꾸었다는 이야기는 없다. 이에 대해 《환단고기》를 주해한 임승국(林承國) 교수는 발해라는 이름은 외부에서 부르는 이름이었지 발해인 스스로가 부른 국호는 대진국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고려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환단고기》는 대한민국의 고대사학계에서 위서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3] 범례에는 1911년에 완성된 것으로 되어 있으나 1979년이 되어서야 등장한 이유가 불명확하고, 원본이 제시되지 않으며, 후대에 등장한 용어나 학설이 반영되어 있고, 기존의 역사와도 어긋나며, 내용이 모순된다는 이유로 후대의 위작으로 여기는 것이다. 대한민국 학계의 입장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단기고사》와 함께 후대의 위작이라는 주장에 대부분의 한국고대사학자들이 동의하고 있으며 단지 저술시기에 대해서 1920년대 초반, 1949년, 1979년 부근이라는 등의 이견이 있을 뿐이다. 광대한 환국과 배달국, 고조선의 기록 등은 근거가 없고 과장된 역사로 판단하며, 사료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보고 있다.[3] 또한 《환단고기》의 내용에서 친일적 요소가 존재한다고 지적되기도 한다.[13]
주류 학계는 시대와 맞지 않는 용어의 등장, 인용 문헌이 불명확하다는 등의 이유로 고대 역사를 주장하기 위한 위서로 간주한다. 또한 《고사고전》(古史古伝)등과 비슷하다는 지적이 있다.
《환단고기》가 진서라는 주장이나 위서라는 주장이 병존하고 있다. 직접적으로 대립하는 주장을 먼저 정리하면 아래 표와 같다. 이하 내용은 고준환의 《신명나는 한국사》의 진서론과 문영의 《만들어진 한국사》의 반론을 정리한 것이다.[14]
《환단고기》가 후대에 위조된 기록이며, 사서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견해는 다음과 같다.[3]
《환단고기》가 복원되는 과정에서 상당 부분 가필되었음은 인정하지만 현존하지 않는 모본(母本)이 있을 수 있고, 그 내용에 포함된 《천부경》·《삼일신고》·《참전계경》은 대한제국이나 일제강점기 초에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볼 때, 《환단고기》에는 전래되는 선가 계통의 흐름이 표출되었으리라는 의견이다.[23]
이러한 견해는 변용된 정도를 잘 알 수 없으므로 역사 연구에 활용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주장[24] 과, 직접적인 인용은 피하면서 대체적인 흐름만은 참조할 수 있다는 주장[25] 이 있다. 다만 후자에서 천문학을 동원해 역사해석에서 나타나는 문제에 대한 비판과 반박[26] 도 있다.
《환단고기》는 출간 경위 자체에 모순이 많다. 이러한 모순을 추적하여 《환단고기》 자체가 이유립에 의해 조작된 창작물임을 주장하기도 한다.
《환단고기》가 민족주의 역사책이라는 관점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33] 민족주의, 특히 피식민지 상태의 민족에게서 두드러진다고 평가되는 저항적 민족주의의 특징은 다른 민족과 구분되는 배타적인 민족 구성을 중요시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환단고기》는 이러한 배타성보다는 범투란주의 혹은 일본 제국이나 나치 독일 등에서 유행한 확장적 민족주의의 모습을 보인다. 특히 일본의 대동아공영권과 유사한 점을 보인다.[34]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환단고기》를 이용하여 대한민국의 역사학계를 비난하기도 하였다. 동북공정을 주도한 학자 가운데 하나인 유자민은 대한민국 역사학계의 고조선에 대한 주장이 비학술적이라 비판하였는데, 그 논거로 《환단고기》를 들고 있다. 실제 대한민국의 역사학계에서는 《환단고기》를 위서로 판단하여 사료로서 사용하고 있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유자민은 《환단고기》에 입각한 비주류의 견해만을 인용하고 있다. 이러한 왜곡을 통해 국제적으로 대한민국 역사학계의 신뢰성을 낮추려는 의도를 의심할 수 있다.[35] 이러한 사실을 토대로 일부에서 동북공정에 맞설 수 있는 기록이라 주장하기도 하는 《환단고기》가 오히려 동북공정에 도움을 주고 있는 아이러니가 지적되기도 한다.[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