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 관계는 대한민국(및 조선과 대한제국)과 영국 간의 외교 등의 관계를 말한다. 영국은 한국 전쟁에 임하여 참전 16개국 중의 하나로서 군사·경제지원 등을 통해서 한국에 대한 공헌이 지대했을 뿐 아니라, 유엔을 비롯한 기타 많은 국제기구에서의 활동을 통해서 한국의 지위향상·보전 및 우호증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계속한 나라이다. 한국에 있어서 영국은 프랑스와 더불어 한국의 대서구제국 관계사에서 중추적인 존재이며, 적어도 전통적으로 대서구 외교전개의 2대 거점국이자 우방국이다. 1883년 우호통상조약이 조인되고 영국과 조선에 각각 영사 또는 공사를 파견하였다가, 일본에 의하여 외교 관계가 단절되었다가 1949년에 양국은 재수교하였다. 오늘날 한영 관계는 수교 140주년을 맞았다.
외교사
조선 말기~일제강점기
영국의 왕실 해군 윌리엄 로버트 브로우턴이 이끄는 프로비던스호가 1797년(정조 21)에 원산 근해를 항해했던 것을 시작으로 1832년(순조 32) 7월에는 로드 애머스트(The Lord Amherst)호가 충청도홍주군의 고대도 뒷바다에 한달 정도 머물면서 이들과 조선 관리들이 한자로 대화를 하여 통상 · 수호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사실 이 배에는 영국 동인도 회사가 보낸 간첩 휴 해밀튼 린제이가 승선해 있었다. 그는 카를 귀츨라프와 함께 광동 이북에서의 무역 확장을 타진하기 위해서라는 구실로, 청나라 여러 해안의 항구를 돌아다니며 지형을 측량 및 제도하고, 정치·경제·군사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1][2] 이어 흥선대원군 집정시(1863년~)에는 로나 호가 충청도와 경기도 연안에 나타나 통상 요구를 해왔고, 셔먼호는 평양에 와서 통상요구를 했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1845년 영국 해군이 거문도에 상륙한 것이 영국인의 첫 방한(訪韓)이었다. 조미 수호 통상 조약(1882년 음력 4월 6일 체결)과 동일한 내용으로 1882년 음력 4월 21일, 14개조의 조영 수호 통상 조약이 조인되었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이것이 한일 수호통상장정과 상이하다는 이유로 비준을 보류하였다. 결국, 1883년 11월 26일, 조선과 영국간 우호 통상 조약 및 부속장정이 조인되었다. 1884년 4월 4일, 영국 공사 해리 파크스(Harry Smith Parkes)가 내한하여 비준서를 교환하고, 주한 영국 총영사로 상주하였다. 1885년 봄,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의해 영국은 조선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 약화를 우려한 나머지 거문도를 조선과의 일절 협의도 없이 불법 점령하고 조선의 강력한 항의로 철수했다. 1900년 주한 영국 총영사관이 공사관으로 격상되었다. 1901년 주영국 공사관이 개설되고 민영돈 초대 공사가 런던에 부임(1901년 7월)하였다. 을사조약 체결 후 1906년 공사관이 총영사관으로 격하되었다. 1910년 한일 합병 이후에도 총영사관은 계속 유지되었다.
대한민국
광복 이전까지 아무런 통교도 하지 않다가, 1946년 주한 영국 총영사관이 재개설되었다. 1949년 1월 18일, 영국 정부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 미국, 중화민국에 이어 —[3] 대한민국을 정식으로 승인하고, 한국-영국의 국교가 수립되었다. 1949년 3월 17일, 비비안 홀트(Vyvian Holt) 주한 영국 공사의 신임장이 제정되고, 주한 영국공사관이 설립되었다. 1949년 12월 31일, 초대 주영공사로 윤치창이 임명되고 1950년 2월 17일 공사관이 개설되었다. 1950년 6월 6일, 비비안 홀트가 주한 영국공사로 취임하였는데, 한국 전쟁 때 북한으로 납치되었다. 영국은 한국전쟁 때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가장 큰 규모의 UN 소속의 UN군을 파견한 바 있다. 대한민국은 1953년 6월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대관식에 백두진 국무총리 서리 등 사절단을 파견하였다.[4]한국 전쟁 후 영국 정부는 한국 재건을 위해 2,600만 달러를 제공하였다. 한 때 유엔결의로 북한과 중국에 대한 전면적인 물자 금수조치(物資禁輸措置)가 취해진 후 영국은 1957년 3월 4일 단독으로 대 중국금수의 일부 완화를 선언하게 되어 한국정부는 그것이 북한에 대한 이적행위라는 점에서 항의하는 사태가 생겼다. 이에 대해서 영국은 완화조치가 비전략물자(非戰略物資)에 한정된 것이라 밝히고, 유엔 한국문제·통일문제 등에서 계속 한국을 지지하였다.[5] 1957년 6월 13일, 한영 양국간에 공사관을 대사관으로 승격하기로 합의하였고, 1957년 6월 28일, 허버트 에반스(ubert J. Evans) 주한 영국공사가 초대공사로 승진하여 신임장을 제정하였다.[6] 1957년 주영국 초대 대사에 임명된 김용우가 10월 28일 영국 런던에 도착하였다.[7] 1958년 5월 14일, 한국 정부는 돌연히 김용우 대사를 해임하였다. 그 이면에는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해양법회의에서 제시된 미국안(案)에 대하여 반대표를 던진 김용우 수석대표에 대한 문책이었다고 추측된다.(→김용우 참조) 김유택(金裕澤) 주영한국 대사는 1960년 1월 26일, 한국 전쟁 중에 봉사한 노르웨이 구급반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서 귀중한 한국서적 및 한서적 한벌을 주영 노르웨이 대사관에 기증하였다.[8]
1960년대에도 영국은 경제협력을 통하여 한국의 경제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으며, 한국과의 사이에 철도신호시설의 도입을 위한 차관계약을 하였다.[9]
1999년에는 김대중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서 엘리자베스 2세가 한국을 방문하였는데, 영국 왕족의 한국 방문이 처음으로 이루어졌다.[10]
2010년에는 한국과 유럽연합이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면서, 영국과 교역도 자연스럽게 증가하게 된다. 무역 분야에서 한영 관계는 지속적으로 이어졌으며, 2016년 영국이 유럽연합을 탈퇴하였을 때 한국과 영국은 양자 자유무역협정 협상을 시작하여 2019년에 한영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였다.[11]
2012년에는 한국과 영국은 포괄적·창조적 동반자 관계를 수립하였으며, 2023년에는 글로벌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하였다.[12]
↑“英女王戴冠式參席 韓國特使一行決定”. 경향신문. 1953년 5월 21일. 오는 오월 二일에 거행되는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대관식전에 참석할 한국사절단일행은 다음과 같다 特別代表國務總理 白斗鎭 代表 國會議長 申翼熙 代表 駐英公使 李卯黙 隨員 國會議員 金東成 隨員 企劃處 豫算局 第二課長 李漢빈 그리고 대관식 후 六월 十四일부터 十七일까지 거행예정인 영국해군 관함식전에는 해군 총참모장 孫元一 중장이 부관원 元鍾赫 대위를 대동하고 참렬할 것이며 전기 사절단 일행은 일간 영국으로 향하여 출발하게 될 것이다 )
↑나규호, 〈중남미 시장의 특성과 시장진입을 위한 전략 방향〉 경희대학교 경영대학원, 석사학위논문(2009.2.) 39쪽. “대중남미 국별 투자 현황을 살펴보면 2006년 기준으로 버뮤다, 브라질, 페루, 멕시코 순으로 규모가 큰 것으로 나타났다. 금융보험업의 투자대상지인 버뮤다가 중 남미 총 투자의 33.2%를 차지하여 제1의 투자대상국의 위치를 고수하였고 버뮤다를 제외할 경우 실질적인 한국의 대중남미 최대 투자국은 브라질(투자비중 11.6%)로 나타났다....31)... 31) 권기수, 상게서[권기수 외저, "한국의 주요국별․지역별 중장기 통상전략:중남미", 「KIEP」 대외경제정책연구원, 2007년 12월], pp.194,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