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와 『동국만성보(東國萬姓譜)』에 의하면 평양 조씨(平壤趙氏) 시조 조춘(趙椿)은 고려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남송(南宋)에 가서 금(金)나라를 정벌하는데 큰 공을 세워 송나라 상장군(上將軍)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평안도 상원(祥原)에 정착하여 4세손까지 내려오다가 5세손 조인규(趙仁規)의 딸이 충숙왕의 비가 되어 국구(國舅)가 되었고, 선충익재보조공신(宣忠翊戴輔祚功臣)에 책록되었고 문사시중태사(門下侍中太師)로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충렬왕의 명에 따라 상원(祥原)에서 평양(平壤)으로 본관을 바꾸고 그를 시조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평양 조씨는 고려 후기 친원파에 속하여, 조인규(趙仁規)는 원나라에 유학하였다. 후손 '조일신도 친원적인 인물이지만 같은 친원파를 제거하여 권력을 독점하기도 하였다. 조인규의 증손인 조준(趙浚)이 종묘에 배향되었다.
본관
평양 조씨의 본관은 처음에는 상원(祥原)이었다. 상원은 고구려 때에 식달(息達)이었으나 4世 趙瑩의 부인 토산군부인(土山郡夫人)이 해를 몸 안에 품은 꿈을 꾸고 임신하여 아들(貞肅公)을 낳았기 때문에 상서(祥瑞)롭다 하여 息達을 祥原으로 이름을 변경하고 1322년(忠肅王9년) 공신(功臣) 조인규(趙仁規)의 고향을 배려하여 군(郡)으로 격을 높였다.
평양(平壤)은 427년(고구려장수왕 15)부터 240년간 고구려의 도읍지로서 전성기를 누렸다. 668년(보장왕 27) 고구려가 멸망한 후 당(唐)의 안동도호부에 속하였다가 676년 통일신라의 변방으로 수복되었다. 919년(고려 태조 2)에는 평양성을 축조하고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정하였으며, 926년(태조 6)에 서경이라고 불렀다. 1269년(원종 10)에 서경에 동녕부(東寧府)를 두고 파령(破嶺:慈悲嶺)으로 경계를 삼았다가 1290년(충렬왕 16)에 다시 서경유수를 두었다. 1369년(공민왕 18)에 만호부(萬戶府)를 두었다가 평양부로 개칭하였다. 1413년(태종 13)에 평안도 평양부로 개편하여 관찰사가 부윤(府尹)을 겸임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23부(府)의 하나가 되었다. 1896년 전국을 13도(道)로 분할함에 따라 평안남도 도청소재지가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부제(府制)가 실시되었고 대동군이 평양부에서 독립되었다. 1946년 특별시로 승격되면서 평안남도와 분리되고 중구역‧동구역‧서구역‧남구역‧북구역 등 5개 구역으로 구획했으며, 1952년 평양직할시로 변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