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송(南宋 : 1127년 ~ 1279년)은 중국의 왕조이다. 조광윤(趙匡胤)이 건국한 북송이 여진족의 금나라에게 1126년 멸망당하고 그 황제가 사로잡힌 정강의 변을 겪으면서, 종실 강왕(康王) 조구(趙構) (훗날 고종)가 남쪽으로 옮겨 양자강 이남의 땅 임안(臨安, 현재의 항저우)으로 천도하여 부흥한 정권을 가리켜 남송이라고 부른다. 몽골인이 세운 몽골제국과 한족이 세운 남송은 국가의 존망이 달려있는 전쟁을 시작하였고 남송은 1279년에 멸망하였다.
역사
1126년 북송의 수도 개봉부(카이펑)이 여진족에 함락되어 북송의 휘종(徽宗)과 흠종(欽宗) 둘의 모든 일족들이 금나라에 의해 카이펑에서 북쪽으로 잡혀가는 정강의 변이 일어났다. 송나라 휘종과 흠종의 부인과 모친 등 휘종과 흠종의 많은 일족들이 여진족들이 운영하던 유곽에 끌려가 기생이 되는 치욕을 당했다. 북송이 멸망한 후, 흠종의 동생 강왕 조구는 남쪽으로 도망쳐 1127년 난징에서 등극하여 고종(高宗)이 되어 송나라를 재흥했다. 처음엔 악비(岳飛), 한세충(韓世忠) 등의 활약으로 인해 금나라에게 강력하게 저항했으나, 진회(秦檜)가 재상으로 취임하면서 주전론(主戰論)을 누르고, 금나라와 화평을 맺었다.
화평 후 진회는 완전히 권력을 장악하고, 이때까지 악비 등의 군벌의 손에 장악당한 군의 지휘권을 조정으로 되돌렸다. 또 한편으로는 주전론자들을 탄압하여 송나라 충신 악비는 살해되고, 한세충은 은거를 하였다.
효종의 치세
진회의 사후 금나라의 4대 황제 해릉왕(海陵王)이 침공을 개시했다. 금나라의 여진인 대군이었으나, 해릉왕은 권력 확립을 위해 수많은 사람을 살해했기 때문에 금나라의 황족 중 한 사람인 완안옹(完顔雍)이 해릉왕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금나라의 유력자들은 속속 완안옹의 곁으로 모이게 되었고, 해릉왕은 군중에서 살해되었다. 완안옹은 금나라의 세종(世宗)이 되어 송나라와 화평을 맺었다. 같은해 고종은 퇴위하여 태상황이 되고, 양자인 조신(趙昚)이 즉위하여 효종(孝宗)이 되었다.
금의 세종, 남송의 효종은 각자가 속한 왕조에서 가장 최고의 명군으로 불렸던 인물들이었는데, 우연하게도 동시대에 2명의 명군이 남쪽과 북쪽에 나타나게 되어 평화가 찾아오게 되었다.
효종은 불필요한 관리의 숫자를 줄이고, 당시 남발기미가 보이던 회자(會子;지폐)의 절제 및 농촌의 체력회복, 강남경제의 활성화 등 여러 가지 개혁을 추진해 남송은 번영을 구가하게 되었다.
한탁주 시대
효종이 1189년 퇴위하여 상황이 되고, 조돈(趙惇)이 즉위하여 광종(光宗)이 되었다. 광종은 아버지와는 다르게 우둔하였기에 황후 이씨의 말밖에는 듣지않았다. 황제에 불만을 품은 종실 재상 조여우(趙汝愚)와 한탁주(韓侂胄) 등에 의해 광종은 퇴위당했다. 한탁주는 이 공적으로 권력의 자리에 가까이 다가가게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한탁주의 인격을 좋아하지 않은 조여우 등은 한탁주를 멀리했다.
이것에 원한을 품은 한탁주는 조여우 등을 몰아내기 위한 운동을 시작해 1195년(경원 원년) 조여우는 재상직에서 물러났고, 경원 3년에는 조여우편에 섰던 주필대(周必大), 유정(留正), 왕난(王藺), 주자(朱子), 팽귀년(彭龜年) 등 59명이 금고(禁錮)에 처해졌다. 그 이듬해에는 주자의 성리학(性理學;당시 도학(道學)이라고 불렸다) 역시 위학이라고하여 탄압받는 지경에 이르렀다.(경원위학의 금(慶元僞學之禁))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을 경원의 당금(慶元之黨禁)이라 불렀다.
한탁주는 그 후 10년동안 권력을 유지했으나, 뒤를 보호해주던 황후와 황태후가 차례로 붕어하자, 권력이 서서히 줄어들게 되었다. 이때 금나라가 북쪽의 타타르 등의 침입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금나라는 약체화되었다고 본 한탁주는 남송의 비원인 금나라 타도를 성공시킨다면 권력을 확고부동할 수 있을거라 생각하고 개희북벌을 감행했으나 실패했다. 실제 금나라는 곤란한 상황이었으나, 그 이상으로 남송군의 약체화가 현저하였던 것이다.
1207년 금나라는 조기 화평을 희망하고, 한탁주의 머리를 요구하자, 이것을 들은 예부시랑(문부대신) 사미원(史弥遠)에 의해 한탁주는 살해되고, 그의 머리는 소금에 절여져 금나라로 보내지는 것으로 금나라와 화의를 맺고 금나라에 조공을 바쳤다. 그리고 한탁주을 살해한 사미원이 이번에 권력을 장악하고 그 후 26년 동안 재상의 지위를 차지했다.
금나라의 멸망
이 때 북쪽의 몽골고원에서는 몽골 제국이 급속도로 세력을 확대하였다. 사미원이 사망한 1233년몽골 제국이 금나라의 수도를 함락시키자, 남쪽으로 도망친 금나라 최후의 황제 애종(哀宗)을 잡아 1234년 2월 금나라는 멸망했다.
몽골과의 전쟁, 멸망
이 후 몽골은 일시 북쪽으로 물러나고, 이후 1234년 6월 송나라군이 북상하여 낙양과 카이펑을 회복하였다. 하지만 낙양과 카이펑은 이미 여진족과 몽골족의 전쟁에 황폐화되어 인구는 사방으로 도망쳐 볼모지상태였다. 낙양과 카이펑의 회복은 몽골과의 조약위반이였다. 결국 1235년 2월 쿠릴타이에서 남송에 대한 침공이 결정되었으며, 몽골과 남송간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1235년부터 멸망한 1279년까지 44년이라는 장구한 시간 동안 이어졌으며 남송은 공물과 공녀를 계속 보냈다. 하지만 몽골군에 의해 남송은 유린되어 가며 멸망하였다.
1차 침공
몽골이 연전연승했다. 1235년 10월 성도(현 청두)가 몽골군에게 함락당했고, 다음 해 3월엔 양양성이, 1237년에는 황주까지 몽골군이 진출했다. 몽골은 이전 다른 국가들과 전쟁 때는 그 지역 사람들의 인망을 얻기 위해 학살하지 않았으나 격렬하게 저항하는 송나라의 전쟁에선 행동을 바꾸어 가는 곳마다 한족들을 학살하였고 노비로 끌고 갔으며 몽골군이 지나간 곳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남송의 명장인 맹공(孟珙)이 반격해, 양양성, 기주성 등을 탈환하고, 사천에서 몽골군을 막았다. 그리고 1241년 오고타이 칸이 사망하자, 몽골과 송나라 사이의 전쟁은 잠시 멈춘다.
2차 침공
이후 1253년 운남 지역에 있던 대리국을 점령한 몽골 제국은 1258년몽케 칸이 다시 남송을 침공하였다. 몽케 칸은 동생인 쿠빌라이 칸을 시켜서 후난성 방면을 침공하게 했고, 자신은 쓰촨성에 있는 성도를 점령한 후, 오늘날 충칭시인 조어성을 포위하였다. 몽골군은 저항이 심한 송나라를 이기기 송나라 영토 전체를 휩쓸며 수십개의 성들을 공략할 때 성을 포위하여 한족들을 굶겨 죽이고 성 밖으로 나오는 자들도 모두 죽였다. 하지만 맹공의 부관인 왕견이 5개월 동안 버텼고, 그리고 몽케 칸이 전염병으로 병사함으로써 전쟁이 또 잠시 멈추었다.
한편 쿠빌라이 칸이 공격한 무창에 원군으로 온 가사도(賈似道)는 쿠빌라이와 밀약을 맺어서 쿠빌라이를 퇴각시켰다. 이후 몽골을 격퇴한 영웅으로써 환영받게 된 가사도는 그 인기에 힘입어 재상이 되어, 전권을 임명받았다. 가사도는 교묘한 정치수완을 발휘하고, 공전법 등 농정 개혁에 힘쓰는 한편, 인기를 얻는 것도 잊지 않아 그 후 15년에 걸쳐 남송 정권을 장악했다.
3차 침공
3차 침공은 더욱 잔인하였으며 가는 곳마다 학살이 행해졌고 사로 잡힌 한족들을 성 밖에서 울부짖게 하여 남송군의 사기를 저하시켰다. 1278년 몽골의 장군 바얀에 의해 결국 남송의 수도인 임안이 정복당하면서 송나라는 멸망했다. 그 시기 남송의 장세걸(張世傑), 육수부 등 일부 군인과 관료는 남송의 어린 황자를 데리고 나와 남송 황제로 옹립하고, 광저우 남쪽으로 도망쳐 철저 항전을 계속하였다. 1279년 그들은 처절하게 저항했지만 광주만(廣州灣)의 애산(厓山)에서 몽골군에 포위되어 격멸당해 이것으로 인해 송나라는 완전히 멸망하였다(애산 전투). 원나라의 통치 아래에서 송나라의 유민으로써 살아남기를 계속한 자들도 있어 《문장궤범》을 편찬한 사방득, 《십팔사략》을 저술한 증선지, 《자치통감음주》(자치통감의 주석서) 등이 있다.
문화
국제교역 및 농지개량 등에 의한 문화를 쌓아 화중의 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절강성 용천애산의 청자 및 복건성 건양 건요(建窯)의 천목다완이 만들어진 시기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