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민유격대(朝鮮人民遊擊隊)는 1946년에 남조선로동당이 발족한 군사조직으로 한국 전쟁에서 유격전을 수행한 공산주의 유격대이다. 흔히 빨치산이라고 부르며, 남부군, 공비, 공산 게릴라라는 표현도 사용되었다.
미군정기인 1946년에 발생한 대구 폭동으로 유혈 사태가 일어나면서 남조선로동당(줄여서 남로당)의 폭력 노선으로, 불법화되는 과정에서 산으로 들어간 좌파 인사들이 조선인민유격대의 효시이다.[1] 이들 가운데 일부가 2·7 사건과 제주 4·3 사건 이후 전라남도 곡성군과 구례군 일대에서 야산대로 불리던 무장 유격대로 전환했고, 야산대 일부는 1948년 여수·순천 사건 이후 군 정규 부대에서 전환한 유격대에 흡수되어 본격적인 파르티잔 활동이 시작되었다.
1946년부터 이미 조선인민유격대의 전신인 야산대가 탄생하여 한국 전쟁 발발 전까지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는 점은 한국 전쟁의 내전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2] 조선인민유격대는 제주 4·3 사건과 여수·순천 사건을 한국 전쟁과 잇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으며, 토벌대와의 전투 과정은 일종의'작은 전쟁'이 되어 한국 전쟁의 전초전을 형성했다.
야산대가 속속 입산하면서 1948년부터 여러 지역에서 자생적인 유격 지구가 형성되었다. 주목할 만한 유격 지구는 다음 5군데였다.[3]
이 가운데 자연 환경이 유리한 지리산 유격 지구가 나중에 조선인민유격대의 총본산이 되었다.
남로당과 북로당이 합당해 조선로동당을 결성한 1949년 6월에 평양에서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줄여서 조국전선)이 발족했다. 조국전선이 출범하면서 채택한 성명서에는 무장 유격 투쟁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다음과 같은 선언이 담겨 있다.
만일 반동이 고집하고 평화적 통일사업을 방해하는 때에는 그는 조선인민의 처단을 면치 못할 것이다. 조선인민은 조국의 통일과 민주화와 독립을 향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길에서 장애를 주는 모든 놈들을 자기의 길에서 능히 소탕할 것이다.
조국전선 결성 대회에서는 지리산의 유격대에서 보내온 전갈도 소개되었다. 조국전선의 결성은 '남조선 애국인민'들의 국토 완정을 위한 투쟁의 새로운 계기로 평가되어 이승만 정부에 반대해 투쟁에 나선 대한민국 국민, 즉 유격대와의 연계가 핵심 과제 중 하나였다.[4]
조선로동당 창당을 분기점으로 유격전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발생 초기의 기층적이며 자발적인 성격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사업 지원으로 외부적 요인에 압도되면서, 조직적 체계가 정비되었고 상층 지도부의 선도에 따르는 방향으로 변모한 것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유격 부대를 일원적으로 지휘할 수 있는 기구로 조선인민유격대를 1949년 7월에 창설했다. 지휘 계통은 남조선로동당의 박헌영과 리승엽에 속했다.
1949년 창설된 조선인민유격대는 오대산 지구를 맡은 제1병단과 지리산 지구의 제2병단, 태백산 지구의 제3병단으로 편성되었다. 제1병단은 이호제, 제2병단은 이현상, 제3병단은 김달삼과 남도부가 각각 책임자가 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강동정치학원을 통해 양성한 유격대원을 포함하여 약 2,400명의 파르티잔을 1948년부터 약 1년 동안 10회에 걸쳐 남파했다. 이들 가운데 약 1,700명이 한국 전쟁 발발 시점까지 대한민국 영역에 남아 있었으나, 대한민국 국군과 경찰의 대대적인 토벌 작전이 성공하여 1950년 초부터는 세력이 크게 약화되어 있었다. 이들은 한국 전쟁 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점령 지역에서 그 체제에 흡수되었다.[5]
이 시기 조선인민유격대 활동의 특징은 '아성공격'으로 불리는 대담한 공세이다.[6] 유격대는 아성공격 전략에 따라 대도시를 직접 목표로 삼아 경찰서와 관공서, 재판소를 습격하고 열차를 습격하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인명 손실이 있었다. 이처럼 밖으로 드러나는 대규모 활동은 조선인민유격대의 존재감을 각인하는 한편 대한민국의 이승만 정부에게는 정치적 부담이 되었으나, 총력 투쟁으로 전력을 노출하여 토벌을 용이하게 만드는 결과도 낳았다. 아성공격에 대한 대한민국 정부의 적극적인 토벌에 따라 조선인민유격대는 1949년 '9월 공세'를 정점으로 한국 전쟁 전까지 차츰 무력화되는 과정에 있었다.
한국 전쟁 전부터 산에서 활동하던 파르티잔은 구빨치산이나 구빨치로, 그 이후의 파르티잔은 신빨치산이나 신빨치라고 불러 구분한다.
1950년 6월 25일에 스탈린의 재가를 받은 김일성의 지시로 북한군의 대대적 전면 남침으로 발발한 한국 전쟁 개시 3일 만에 대한민국 수도인 서울이 북한군에게 점령당했다. 북한군 군사위원회 위원장인 김일성은 전쟁 발발 이튿날인 6월 26일 밤에 조선중앙방송을 통하여 '남반부 남녀 빨치산에게!'로 시작되는 메시지를 전달하여 조선인민유격대의 임무를 알렸다. 이에 따르면 조선인민유격대는 당 조직을 재건하여 인민 봉기를 일으킴으로써 조선인민군의 남진을 돕는 중대한 역할을 맡을 것으로 기대를 받았다.[7]
전쟁 개시 소식을 들은 각 지역의 유격대는 대한민국 국군과 교전을 벌이거나 동리를 일시적으로 점령하는 등 활동에 나섰다. 이 때문에 정부에 등록된 보도연맹원들의 후방 봉기와 군경 가족 학살을 우려한 국군과 경찰에 학살되는 결과를 낳았다. 조선인민유격대 창설 당시 제2병단을 이루었던 지리산의 이현상 부대를 포함하여 지리산 둘레와 전남 서해안, 경북 지역 등 여러 곳에서 활동하던 유격 부대가 동시다발적으로 조선인민군의 남진에 호응했다. 주요 활동은 지역당의 조직 복구에 참여하고 인민군과 협동하여 전투를 진행하며 군경 가족 및 우익 인사 숙청에 가담한 것으로 요약된다.
전쟁 초반에 대한민국 국군은 낙동강까지 밀렸으나, 낙동강 전선에서부터 시작된 반격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면서 퇴각로를 차단당한 조선인민군 패잔병과 우익인사 학살을 담당하던 지방 좌익들이 보복을 두려워하여 산속으로 들어가 자연스럽게 유격대를 형성하게 되었다. 9월 15일의 인천 상륙 작전을 계기로 지역 당은 비합법 조직인 지하당으로 개편되었고, 대한민국 영역에 남은 사람들에게는 지하당을 중심으로 유격대 활동을 펼치라는 임무가 주어졌다.
이 무렵 한국 전쟁 '제2 전선'에 참전한 유격대의 규모는 약 8만 명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일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귀환하고 일부는 소탕되어 대한민국 국군이 압록강에 도달한 10월 말 경에는 약 2만 5천 명이 남았다. 이 가운데 1만 5천 명은 전남 지역에 있었다.[8] 인천 상륙 작전 이후 조선인민유격대의 활동은 지리산의 이현상 부대를 확장한 남부군의 결성과 활동이 주를 이루고, 각 지역 도당을 중심으로 전개된 산발적 유격전이 추가되는 형태였다.
한국 전쟁 전부터 이현상이 지리산에서 지휘하던 부대는 여순반란 사건 관련자가 많이 참여하여 상대적으로 최신 장비와 전투 기술을 갖추고 있었다. 인천 상륙 작전 이후 강원도로 후퇴하던 이현상은 중공군 참전 이후 강원도에서 리승엽과 대면하여 확대된 권한을 부여받았다. 이후 대열을 정비하고 조선인민유격대 독립4지대라는 새 이름으로 남하를 시작했다. 남하 과정에서 기존 대원 외에 현지에서 합류자를 받아 부대가 확장되면서, 독립4지대 산하에 승리사단, 혁명지대, 인민여단, 사령부 직속 부대를 구성할 수 있는 규모가 되었다.[12]
독립4지대는 11월 15일에 강원도 세포군을 출발하여 남하한 뒤 약 9개월에 후에 지리산에 도착했고, 12월부터는 남조선인민유격대 또는 남부군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소백산맥을 따라 내려오는 과정에서 충청북도 보은군의 갈평이라는 산골 마을에 머물다가, 1951년 5월 26일 새벽에 청주시를 공격하여 좌익 죄수들을 탈옥시키며 위세를 떨치기도 했다. 한국 전쟁 중 조선인민유격대가 일시적으로나마 단독으로 도청 소재지를 점거한 것은 남부군의 충청북도 청주 점령이 유일했다.[13]
남부군은 청주 습격 후 두 갈래로 분산되었다가 기백산에서 합류한 뒤 덕유산에 숨어들었다. 1951년 7월 덕유산에서는 전남북, 경남북, 충남북의 6개 도당 수뇌부 회의가 열렸다. 여기에서 대한민국 영역의 조선인민유격대를 전남과 경북도당만 제외하고 일원적으로 편성해 지리산을 거점으로 한 남부군 산하에 둔다는 중요한 결정이 내려졌다.[14] 로명선이라는 가명으로 남부군 사령관에 취임한 이현상은 주력 부대를 이끌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통합된 조선인민유격대는 사단제로 재편되어 충남은 68사단, 전북 북부는 45사단, 전북 남부는 46사단과 53사단, 경남은 57사단, 남부군은 81사단, 92사단, 602사단으로 편제되었다. 각 사단은 《승리의 길》이라는 제호로 등사판 진중신문을 발행하기도 했다.[15] 남부군의 사단 편제는 청주 점령의 예에서와 같은 대규모 정면 공격을 결행해 유격대의 활동을 정규전과 유사한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전략이었으나, 김일성의 지원 기피로 장기적으로는 역량의 약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1953년 7월 27일에 6.25 전쟁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당시 조선인민유격대는 1951년 8월의 〈미해방지구에 있어서의 우리 당사업과 조직에 관하여〉라는 조선로동당 정치위원회 94호 결정서와 1952년 2월의 〈미해방지구에 있어 우리 당사업을 더욱 강화할데 대하여〉라는 111호 결정서에 따라 미해방지구로 정의된 대한민국 영역에서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16]
그러나 토벌대의 공세에 맞설 만한 물리력을 확보하지 못하였고 양민학살 작전으로 민심이 돌아서버린 상황으로 인하여 토벌을 피하고 따돌리는 수준에서 생존을 유지하며 지원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 시점에서 유격대가 활동 중이던 지역은 지리산 외에 전북도당 산하의 회문산과 운장산, 백운산, 덕유산 지구, 충남북 제3지구당의 속리산 지구, 낙동강 동쪽 경남북 제4지구당의 신불산 지구 등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인민유격대의 지위에 대한 언급 없이 휴전 협정이 체결된 것은 김일성이 조선인민유격대를 버린 상황이되어 악화일로의 전세를 되돌릴 수 있는 추진력을 상실하게 하였다. 특히 협정 체결 1주일 만인 8월 3일에는 평양에서 김일성의 반대파 숙청 작업의 하나로 그 동안 구금하였던 박헌영을 정식 구속하고 곧이어 리승엽과 배철을 비롯하여 조선인민유격대 지도부를 구성했던 남로당계 간부들에 대한 재판 결과를 발표하였다.[17] 이들은 미국의 지시를 받고 간첩으로 침투하여 정부 전복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처형되었다.
조선인민유격대는 이 상황에서도 김일성에게 버림 받은 것을 모르고 박헌영 리승엽 숙청 사건의 결과에 따라 조직을 전면 개편했다. 1953년 8월 26일에 조선인민유격대 최후의 사령부 역할을 한 제5지구당이 지리산 빗점골에서 회의를 열고 결정서 9호를 채택했다. 결정서의 내용은 박헌영과 리승엽 숙청을 지지하면서 경남 유격대 전멸을 불러온 전술 측면의 오류를 지적한 것이었다. 9월 5일에는 결정서 10호를 채택해 스스로 해체하고 이현상은 평당원으로 강등되었다.
제5지구당 조직의 해체에 이은 조선인민유격대의 실질적인 총지휘자 이현상의 사망으로 말미암아 지리산에 남은 유격대원들은 전의를 상당 부분 상실하게 되었고, 외부적으로는 대대적인 토벌 작전이 계속되어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생존한 간부와 대원들이 소규모 활동을 지속했으나 조직적인 차원의 유격전은 불가능해졌다.
조선인민유격대의 조직과 구성은 전면전이라는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짧은 시간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일괄적으로 파악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시기별로 나누어 분석되고 있다.
조선인민유격대에 참여한 인원은 최소한 수 만 명으로 추산되나 전해지는 자료에 모순이 있어 좀 더 연구가 필요한 분야이다. 예를 들어, 같은 대한민국 국방부의 자료라도 산에 남아 있는 토벌 대상 조선인민유격대원의 규모를 추산할 때와 이들을 사살한 뒤에 전공을 발표할 때 자릿수가 달라질 만큼 큰 차이가 있다. 위의 표는 국방부의 토벌 대상 추산 내역을 근거로 재구성한 조선인민유격대 참가 인원의 변동 추이이다.
1963년 11월 12일에 마지막으로 남은 2사람 중 남성은 사살, 여성은 생포되어 조선인민유격대 잔존 세력은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안성기와 이미연이 주연했던 영화 《흑수선》은 소설 《최후의 증인》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아마도 마지막으로 사살된 빨치산 남성과 생포된 여성을 주인공으로 놓고 있는 듯하다[출처 필요].
생존자의 증언으로는 지도부 일부의 출신만 파악이 가능할 뿐, 일반 대원의 성분까지 체계적으로 추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경상남도와 인천의 지역당 산하 인민유격대와 여수·순천 사건의 김지회가 지휘한 부대를 통해 어떤 계층과 계급의 사람들이 입산하였는지를 분석하여 일부 복원한 결과는 나와 있다.[19]
이러한 분석은 조선인민유격대가 전직 빈농 또는 노동자로 무산 계급 출신이면서 상대적으로 학력은 높은 20대와 30대 남자를 중심으로 조직되었다는 결론을 맺게 한다. 이는 한국 전쟁 회고에 흔히 등장하는 '인민위원회는 마을에서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 많이 맡았으며, 내무서에 행동대원으로 동원된 사람들은 대부분 빈농 출신이었다.'[20] 라거나 '글을 많이 배운 사람들 거의가 공산주의자였다.'[21]라는 증언과 일치한다.
대한민국 내 조선인민유격대들은 북한이나 대한민국이나 어느곳에서도 정규군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김일성은 반대파 숙청 작업을 6.25 전쟁 중에도 계속하고 있었기에 새로운 반대파들의 입북을 원하지 않아 휴전협상이 종료될 때까지, 북한은 대한민국 내에서 게릴라 활동하는 공산 유격대를 '군인으로 인정해 북송해달라.'는 말은 일절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26]
오히려 대한민국 측이 조선인민유격대를 귀찮게 생각해 데려가라고 제안해도 북한 측은 일절 응대 하지 않았다. 대신 인민유격대원들에게 '하산해 도시로 들어가 지하활동을 계속하라.'는 무전 지시만을 보내왔다. 유격대원들은 하나같이 거지꼴이어서 하산이 어려운데다가 경찰이 잔존 대원들의 신상을 파악하고 있어 무사히 산을 벗어난다 해도 갈 곳이 없었다. 즉, 산을 내려가라는 지시는 인맥이 넓은 일부 간부들 이외에 유격대원들에게는 '하루빨리 죽으라'는 소리와 다름없었다.[27]
1953년 1월 박영발의 죽음에 이어 1953년 9월 제5지구당 해체와 이현상 사망, 1954년 1월 방준표의 자살로 지도부를 거의 잃고 사실상 해체 상태에 있었다. 1954년 4월 5일에 전남총사령부 사령관 김선우가 백운산에서 사망하여 전남총사령부가 붕괴한 시점에서는 공식 해체에 가깝게 되었다.
이 무렵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유격대원은 대부분 소탕되어 잔존 세력은 남은 공비라는 의미로 ‘잔비’(殘匪)로 불렸고, 1955년 4월 1일부터는 지리산에 대한 입산 통제 조치도 해제되었다. 민간인이 지리산에 출입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대한민국 영역에 남아 있던 유격대원의 수는 59명으로 파악되었으며, 1956년 12월 31일에는 43명으로 줄어들었다.
1963년 11월 12일에 경상남도 산청군의 지리산 기슭에서 "최후의 빨치산" 이홍이가 사살되고 정순덕은 생포되면서 빨치산은 완전히 소멸했다.[28] 이후 반년이 지난 1964년 5월 중순에 산청군 생초면 고읍의 용수로 둑에서 안원도, 강우형이라는 이름의 두 망실공비가 총에 맞은 변사체로 발견되었는데 이들의 시체 주변에는 38식 소총 두 자루와 빈 술단지가 있었다. 이들 변사체는 상당히 부패해 있었는데 사망 시각은 세달전인 1964년 2월경으로 추정되었고, 이들은 도피와 방황 끝에 삶의 희망을 잃고 술김에 자살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따라서 정순덕과 이홍이는 "최후의 빨치산"은 아니었으며, 이로써 조선인민유격대는 역사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29]
조선인민유격대의 해체 요인으로는 다음 7개 항이 꼽힌다.[30]
대한민국에서 조선인민유격대에 대한 언급은 6월 항쟁 이전까지는 금기시되어 왔다. 전투사 연구 차원의 전적 정리만이 예외였다. 조선인민유격대를 포악한 모습으로 그린 반공영화 《피아골》(1955)도 검열에서 곤란을 겪었을 정도[54]였으며, 신동엽의 시 〈진달래 산천〉(1959년)에는 매우 암시적인 기법으로 등장한다. 이후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을 거치며 반공주의가 심화되어 다른 시각의 조명은 거의 불가능했다.
학술적으로는 1984년에 나온 김남식의 《남로당 연구》가 최초로 냉전적 시각에서 벗어난 조선인민유격대 관련 연구로 평가된다. 1987년에 6월 항쟁을 계기로 제6공화국이 수립되고 조정래의 《태백산맥》과 이태의 수기 《남부군》이 호응을 얻은 것을 계기로 생존자의 증언이 회고 형태로 공개되면서 다양한 관점의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55]
냉전 체제 약화와 함께 등장한 온정적 시각은 조선인민유격대를 극좌 모험주의로 비판하거나 과거와 같이 멸절 대상인 국가의 적으로 보는 관점과 여전히 공존 중이다. 경상남도는 2001년 산청군에 지리산빨치산토벌전시관을 개관하여 조선인민유격대의 아지트를 복원하여 실물 자료와 모형을 전시[56] 하였는데, 전시관 명칭에 들어가는 ‘빨치산,’ ‘공비,’ ‘토벌’ 등의 용어를 둘러싸고 39사단 등 군 당국이 불쾌감을 표시하는 등 설립 과정에서 논란을 빚은 바 있다.[57] 이 사건은 대한민국 내에 조선인민유격대에 대한 여러 시각이 혼재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때로는 다양한 견해가 충돌하기도 하여 2006년에 열린 이른바 ‘빨치산 추모제’ 행사에 전라북도 지역의 한 교사가 중학생들을 인솔해 참석한 것을 계기로 표출되었다. 이때《조선일보》가 연이어 비판 기사를 싣자, 반대파에서는 이를 색깔론, 마녀 사냥으로 반박하여 논쟁이 인 바 있다.[58][59] 조선인민유격대원으로 활동했던 류낙진을 비롯해 비전향 장기수 6명을 안치한 파주시의 연화공원 묘역을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유린”한다는 지적[60] 끝에 2005년 파괴되어 유해가 이장된 사건도 비슷한 경우이다.[6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표면적으로 조선인민유격대를 ‘인민공화국의 전사’로 부르며 후대하고 높이 평가해 왔다. 남부군을 이끈 이현상은 최초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애국렬사 칭호를 받았으며 조국통일상이 추서되었다.[62]
그러나 조선인민유격대 지도부에 대해서는 1951년 8월 31일에 채택한 94호 결정서를 통해 “전쟁 이후의 빨치산 사업이 결정적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을 질책한 이래 차가운 시각을 보이기도 했다.[63] 이 같은 관점은 김일성의 반대파 숙청 작업의 하나로 조선인민유격대의 최고 지도부를 박헌영과 함께 미국의 간첩이라고 결론을 내린 박헌영 리승엽 숙청 사건의 결과로 더욱 공고해졌다. 분단으로 말미암아 자료 수집의 어려움도 겹쳐 한국 전쟁 중 유격대의 활동에 대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학술 연구는 북위 38도선 이북 지역에 좀 더 집중되어 있다.
다음은 대한민국의 조선인민유격대 관련 주요 문헌과 예술 작품들이다.
문학 분야에서는 한국 전쟁 중 전쟁 문학의 일환으로 조선인민유격대의 투쟁을 그린 작품이 등장[64] 한 이래 유격대원 출신으로 송환된 비전향 장기수를 소재로 삼은 장편 소설까지 꾸준히 다루어지고 있다. 전자의 예로는 제주도를 “영웅의 섬,” 지리산을 “백절불굴의 전구”로 묘사한 임화의 시 〈기지로 도라가거든〉(1952년)을 들 수 있고, 후자의 대표적인 예로 2002년부터 출간되기 시작한 《지리산의 갈범》이 있다.[65]
평양에 건설된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탑에는 〈적후 인민유격대원들의 투쟁〉이라는 이름의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군상 형태로 조성된 이 조형물은 유격대원으로 여성과 노인, 소년을 형상화하여 조선인민유격대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했음을 강조했다.
1960년대 초반에 당시까지 지리산에 남아 있던 정순덕을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와 가극이 제작 추진된 바 있다.[66] 다부작 예술 영화 《민족과 운명》 가운데 리인모의 한국 전쟁 중 활동과 수감 생활을 그린 리정모 편이 삼부작으로 만들어져 인기리에 상영되기도 했다.[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