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3년(기원전 154년) 6월, 오초칠국의 난의 후속 조치로 교서우왕 유단과 함께 제후왕으로 봉해져, 처음으로 세워진 중산국의 왕이 되었다.[1][2][3][4][5][6] 수도는 노노(盧奴)에 두었다.[5] 친형 유팽조가 광천왕에 책봉되면서 이듬해에 그도 중산왕에 책봉된 것이다.
경제와 무제 시대에는 조조의 정치를 따라 제후왕의 영토를 삭감하는 정책을 일관적으로 시행해 왔고, 제후왕의 조그마한 잘못이라도 찾아내 상주했다. 잘못이 없다면 그 수하들을 모욕하고 태형에 처하기도 해 제후왕들의 잘못을 날조하려고도 했다. 그렇기에 제후왕들은 이에 대한 원한이 많이 쌓였다.
건원 3년(기원전 138년), 대왕 유등·장사왕 유발·중산왕 유승·제천왕 유명은 한데 입조했고 무제는 주연을 베풀었다. 유승은 그 자리에서 울었고, 무제가 그 이유를 묻자 이 기회를 이용하여 제후왕에 대한 적극적인 탄압 정책을 중단해 줄 것을 요청했다. 무제는 유승의 의견을 받아들여 제후왕에 대한 예를 후하게 했고, 제후왕의 일을 상주하는 일은 줄어들었다. 그러나 무제는 나중에 주보언의 제안을 받아들여 추은령을 시행해 제후왕의 영지를 그 자제들에게 나누어 한나라에서 봉호를 정하고 그 봉토는 한나라의 군에 속하게 하니, 제후왕의 영지는 잘게 나뉘어 결국 약소해졌다.[3]
유승은 주색을 좋아하고 궁중에 사랑하는 희첩이 많아 아들과 손자가 합쳐서 120여명이었다. 친형 유팽조는 계략을 써서 조정에서 파견한 국상의 권한을 빼앗아 하급 관리들의 일까지 직접 맡으며 조나라를 다스렸는데, 그 때문에 서로 비난하여 유승은 “형은 왕으로써 관리를 대신해 통치를 오로지한다. 왕이라면 마땅히 날마다 음악을 듣고 여자를 즐겨야지!”라고 했고 유팽조는 “중산왕은 사치하고 음란할 뿐 천자를 도와 백성을 돌보지 않는데, 어찌 번신이라 일컫는가!”라고 했다.[6][3]
허베이성바오딩 시만청 구 능산(陵山)에 중산정왕의 묘가 있다. 1968년 발견돼 발굴됐고, 중산정왕과 왕후 두관(竇綰)의 유해를 싼 금루옥의(金縷玉衣)와 술항아리, 박산향로, 장신궁등 등이 나왔다. 금루옥의로 추정해보건대 중산정왕의 키는 약 185~186 cm 정도로 추정됐다.[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