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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는 1712년(숙종 38년)에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국경을 정하기 위하여 세워진 경계비이다.
정계비의 위치
정계비가 세워진 곳은 백두산 장군봉(將軍峰, 2,750m)과 대연지봉(大臙脂峰, 2,360m) 사이 대략 중간지점인 해발 2,150m 고지(高地)로, 백두산천지(天池)에서 남동쪽으로 약 4km 떨어져 있다.[1]
이 비는 만주사변이 발발하기 두어 달 전인 1931년 7월에 사라졌는데, 일본군이 철거한 것으로 추정된다.[2] 현재는 비의 원래 위치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세운 표지석과 비의 설치 당시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쌓았던 돌무더기의 흔적만 남아 있다.[1]
정계비의 내용
비면에 대청(大淸)이라고 크게 우횡서로 쓰고, 그 밑에 그보다 작은 글씨로 “烏喇摠管 穆克登, 奉旨査邊, 至此審視, 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上, 勒石爲記, 康熙 五十一年 五月十五日”이라고 세로로 각서하였다.
이는 "오라총관 목극등이 황지를 받들어 변계를 조사하고 이곳에 이르러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강이고 동쪽은 토문강이므로, 분수령 상에 돌에 새겨 명기한다. 강희 51년 5월 15일"이라는 내용이다.
설치 배경과 과정
백두산 정계(定界)가 문제가 된 것은 청나라의 강희제 때이다. 강희제는 백두산을 만주족의 발상지로 여겨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1677년음력 12월에는 백두산을 장백산지신(長白山之神)에 봉하여 제를 지내도록 하기도 하였다.[3] 이후 강희제는 전국적인 지리지 편찬 사업을 추진하면서 백두산 일대에 대한 자체적인 지리 조사와 더불어 조선에 대해 사계(査界)를 비공식적으로 계속 요구하였다.[4]
이에 조선 조정은 영고탑 회귀설[5] 등 대청(對淸) 위기의식의 불안감으로 이를 거부하다가 1712년에 강희제가 황명으로 공식적으로 요청하자 받아들이게 된다.[6]
1712년(숙종 38년)에 청나라는 목극등을 사신으로 파견하고, 조선 측에서는 함경부사 이선부와 참판 박권이 접반사로 혜산진에서 맞이하였으며, 목극등은 이의복·조태상 등과 함께 음력 5월 15일백두산에 올랐다가 천지(天池)에서 내려와 수원(水源)을 찾아내고, 산정(山頂)의 남동쪽으로 4km 지점인 해발 2,150m 지점의 분수령에 비를 세웠다.[7][8]
그러나, 청(淸)의 목극등이 사계(査界)를 한 이후에 조선 측은 '정계비로부터 동쪽 수계(水界)까지' 설책(設柵)을 하는 과정에서 목극등이 정한 수계가 두만강이 아닌 쑹화강(송화강)으로 흘러들어가는 문제를 발견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파견한 북평사 홍치중은 설책 공사를 중지하라고 하였지만, 정계(定界)에 참여한 이들이 정계를 잘못한 책임을 지는 것이 두려워 목극등이 정한 첫번째 수원(水源)에서 안쪽으로 20리 가량을 옮겨 세웠다.[9]조선 조정은 이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이를 청나라가 알게 되면 목극등이 견책 받고 청의 다른 사신이 와서 영토가 축소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이런 상황을 그대로 두었다.
설치의 의의
조선과 청나라 양국이 국경을 명확히 비(碑)로 명문화하였고, 압록강과 두만강 사이 육지 지역인 백두산의 천지 이남을 조선의 영토로 확인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10][11][12]청나라는 이 비의 설치로 1689년에 러시아와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하여 북만주 국경을 안정시킨 데 이어 조선과의 남만주 국경을 안정시키고, 청조의 발상지로 여겼던 백두산 등 봉금 지역의 국경을 명확히 하게 되었다.
비의 설치 이후 조선에서는 백두산에 대하여 숭배(崇拜) 의식과 영토 인식이 더욱 확고해졌고, 당대에는 영고탑회귀설 등에서 벗어나 청나라에 대한 불안감이 종식되게 되었다.[13]
정계비의 해석을 둘러싼 논쟁
19세기 후반, 조선과 청나라가 백두산정계비에 쓰여진 '동위토문(東爲土門)'을 서로 달리 해석하면서 간도에 대한 귀속 문제가 불거졌다. 즉, 정계비의 위치상 토문강은 '두만강이 아니라 쑹화강(송화강)의 한 지류'이므로 이른바 간도 일대가 조선의 영토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설치 당시의 토문강에 대한 조선의 인식
숙종 시기의 이조참의 이광좌에 따르면 "황지의 이른바 토문강이란 화어(華音 : 중국말)로 두만강을 말합니다."라고 하였다.[14] 또한 정계비를 설립한 당시에 청나라 사신 목극등을 접대하기 위해 조선에서 정한 '差官接待事宜別單(차관접대사의별단)'에도 토문(土門)과 두만(豆滿)은 같은 단어이므로 주의해야 할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외에도 이익의 성호사설이나 이긍익의 연려실기술과 같은 저술서를 보아도 정계비 설치 당시 조선에서는 '토문강은 곧 두만강'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15][16][17][18]
또한 사계(査界) 당시의 실록의 내용을 살펴보더라도 조선의 입장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삼아 천지(天池)의 이남을 조선의 영토로 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19] 정계비 수립 당시에 청나라 사신 목극등이 조선의 경계에 대해 묻자 역관 김지남이 '천지 이남은 조선의 경내'라고 답한 데 대해 목극등이 이를 크게 다투거나 힐책하지 않은 것을 두고, 접반사 박권이 기뻐하며 이를 조정에 보고하였다.[20] 즉 당시 조선에서는 천지(天池)의 이남, 즉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삼아서 이를 조선의 경내로 하는 데 합의한 것을 성공적이라고 평가하고 있었다.
정계비의 해석은 비가 설치된 후 170여 년이 지난 고종 집권기인 1880년대에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당시 간도에는 세도정치의 수탈과 학정(虐政), 대흉년 때문에 19세기 초부터 이주한 조선인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다. 이는 간도 일대가 청의 봉금 지역이어서 1677년 이후 약 200년 동안 만주족이 아니면 청나라 사람들조차 거주가 금지되어 청나라 주민의 수가 매우 적었고, 아편 전쟁 · 태평천국의 난 등으로 청나라의 힘이 약해진 데에서 기인했다.
1860년베이징 조약으로 러시아에 외만주(연해주 등)를 빼앗긴 청나라는 만주 개발을 위해 1881년에 '봉금령'을 폐지하고 지린의 장군 명안과 흠차대신 오대장을 보내어 간도 개척에 착수하였다.
이에 조선은 1883년에 '월강금지령'을 폐지하고 어윤중·김우식에게 정계비와 그 주변 지형을 조사하게 하여 쑹화강(송화강)의 한 지류로 토문강이 있음을 확인한 뒤, 간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주장하였다. 즉, 정계비 설치 당시 조선에서는 '토문강은 곧 두만강'이라는 인식이 있었지만, 간도에 조선인들이 많이 이주하여 살고 청나라가 쇠퇴한 1880년대 이후 조선은 '동위토문(東爲土門)'의 해석에 문제를 제기하며 간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한 것이다.[21]
토문 혹은 두만의 의미를 둘러싼 최근의 연구
최근 발표된 논문에 따르면 '토문(土門)'의 어원은 여진어로 구멍·동굴·샘·협곡 등을 뜻하는 보통명사라고 한다. 즉 토문강이라고 불리는 강은 특정된 하나의 강이 아니라 이런 특징을 가지는 하천을 가리키는 보통 명사와도 같다.[22] 이렇게 본다면 송화강의 한 지류로서의 토문강이 존재한다고 하여도 동위토문의 토문강이 두만강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황제가 대학사에게 유시하기를, “장백산(長白山)의 서쪽은 중국과 조선이 이미 압록강(鴨綠江)을 경계로 삼고 있는데 토문강(土門江)은 장백산 동쪽 변방에서부터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니, 토문강의 서남쪽은 조선에 속하고, 동북쪽은 중국에 속하여 역시 이 강으로 경계를 삼도록 하였다. 그러나 압록과 토문 두 강사이의 지방(地方)은 그것이 어디에 속하는지를 확실히 알지 못한다.” 라고 하였다. 이에 목극등(穆克登)을 그곳에 파견하여 국경을 조사케 하였다. 10월, 황제는 조선국왕에게 지금까지 바쳐오던 공물(貢物) 가운데 백금(白金) 1천냥과 홍표피(紅豹皮) 142장을 면제하도록 하고, 조선국 사행(使行)이 머무는 연도의 관사(館舍)를 수리하도록 유시(諭示)하였다.
이 해에 예부(禮部)에서 복준하기를, 조선과 봉천부의 금부·복주·해주·개주 등은 서로 가까이 있는 지방이므로 성경장군(盛京將軍)과 봉천부윤(奉天府尹)에게 명하여 연해의 거민들을 잘 단속하여 조선에 가서 근해 어업이나 벌채를 하지 못하도록 하고, 혹은 다른 지방의 어채인(漁採人)이 조선에 이르면 역시 모두 체포하여 압송하도록 하였다.
↑'삼번의 난 등으로 청나라는 망하고, 만주족이 중국 대륙에서 쫓겨나 만주로 되돌아올 때에는 몽골에 막혀 조선의 경내(境內)를 침범할 것'이라는 일방적 주장으로, 조선 숙종 때에 유행했다. 당시 조선의 권력자들이 중국의 정세에 무지했음을 보여준다. 숙종실록, 숙종 17년(1691 신미 / 청 강희(康熙) 30년) 2월 24일 2번째기사 · 숙종 32년(1706 병술 / 청 강희(康熙) 45년) 1월 12일 2번째기사 등
↑숙종실록, 숙종 38년(1712 임진) 5월 23일 1번째기사 "토문강(土門江)의 근원은 백두산 동변(東邊)의 가장 낮은 곳에 한 갈래 물줄기가 동쪽으로 흘렀습니다. 총관 목극등이 이를 가리켜 두만강(豆滿江)의 근원이라 하고 말하기를, '이 물이 하나는 동쪽으로 하나는 서쪽으로 흘러서 나뉘어 두 강(江)이 되었으니 분수령(分水嶺)으로 일컫는 것이 좋겠다.'하고, 고개 위에 비(碑)를 세우고자 하였습니다."
↑정계(定界)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기록 : 김지남(백두산 정계시 역관), 《북정록》. 박권(백두산정계시 조선측 대표, 접반사), 《북정일기》. 홍세태, 《백두산기》 김지남의 아들인 역관 김경문의 이야기를 듣고 글로 옮김.
↑숙종실록, 숙종 38년(1712 임진) 5월 5일 2번째기사 "총관 목극등이 '그대가 능히 두 나라의 경계를 밝게 아는가?'하므로 답하기를, '비록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하였지만 장백산 산마루에 대지(大池, 백두산 천지)가 있는데, 서쪽으로 흘러 압록강(鴨綠江)이 되고 동쪽으로 흘러 두만강(豆滿江)이 되니, 대지(천지)의 남쪽이 곧 우리 나라의 경계이며, 지난해에 황제(皇帝)께서 불러 물으셨을 때에도 또한 이것으로 우러러 답하였습니다.'고 하였습니다. 또 '빙거(憑據)할 만한 문서(文書)가 있는가?'라고 묻기에 대답하기를, '나라를 세운 이래로 지금까지 유전(流傳)해 왔으니 어찌 문서가 필요하겠습니까.' 하였습니다."
↑숙종실록, 숙종 38년(1712 임진) 5월 15일 1번째기사 "역관(譯官)이 백산(白山, 백두산) 지도(地圖) 1건(件)을 얻기를 원하니, 총관이 말하기를 '대국(大國)의 산천은 그려 줄 수 없지만, 장백산은 곧 그대의 나라이니 어찌 그려 주기 어려우랴.' 하였으니, 이것으로 본다면 백두산 이남은 땅을 다툴 염려가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숙종실록, 숙종 38년(1712 임진) 5월 23일 1번째기사 "토문강(土門江)의 근원은 백두산 동변(東邊)의 가장 낮은 곳에 한 갈래 물줄기가 동쪽으로 흘렀습니다. 총관이 이를 가리켜 두만강(豆滿江)의 근원이라 하고 말하기를, '이 물이 하나는 동쪽으로 하나는 서쪽으로 흘러서 나뉘어 두 강(江)이 되었으니 분수령(分水嶺)으로 일컫는 것이 좋겠다.'하고, 고개 위에 비(碑)를 세우고자 하였습니다."
↑한치윤, 《해동역사》 속집 제12권 조선편 "혼춘(渾春)은 그 서쪽의 토문강까지가 20리이며, 조선과 경계이다."
↑정약용, 《다산시문집》 15권 강계고 서편 "세종 때에는 두만강 남쪽을 모두 개척하여 육진을 설치하였으며, 선조 때에는 다시 삼봉평(三蓬坪)에 무산부(茂山府)를 설치하여 두만강을 경계로 천참의 국경으로 삼았다. 두만강 북쪽은 곧 옛 숙신(肅愼)의 땅으로서, 삼한(三韓, 삼국시대) 뒤에는 우리의 소유가 아니었다. 두만강과 압록강이 모두 장백산(長白山)에서 발원(發源)하고, 장백산의 남맥(南脈)이 뻗쳐 우리나라가 되었는데, 봉우리가 연하고 산마루가 겹겹이 솟아 경계가 분명치 않으므로 강희(康熙) 만년에 오라총관(烏喇總管) 목극등(穆克登)이 황명을 받들어 정계비(定界碑)를 세우니, 드디어 양하(兩河)의 경계가 분명해졌다."
↑조병현·이범관·홍영희, 〈지적학 측면에서 본 백두산정계비의 역할연구〉, 한국지적한회지 제23권 제1호 2007.6(1) : 20쪽
↑이광원, 〈조선 초 기록 중 '두만' 및 토문의 개념과 국경인식〉, 문화역사지리 제19권 제2호(2007) 45~57쪽. 반면에 투먼(豆滿)은 여진어로 만(萬), 즉 많고 풍부함을 가리키는 의미라고 한다. 이는 토문강은 여럿일 수 있지만, 두만강은 하나뿐임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