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군(勃海郡, 渤海郡)은 중국의 옛 군이다. 군국제 시행 시에는 발해국(勃海國, 渤海國)이 설치됐다. 군명의 유래는 안사고에 따르면 보하이 만(발해만)의 가에 있어서 그 이름을 따온 것이라 한다. 표기는 설치된 전한 때부터 '勃'과 '渤'이 혼용되었다. 지리지가 있는 이십사사의 지리지에서는 북위까지 勃을 썼고 수·당대에는 渤이었다.
고제가 설치했으며, 유주자사부에 속했다. 그러나 문제 2년(기원전 178년) 발해군과 조나라 내사 사이에 있는 하간국이 조나라에서 분할됐는데 발해군이 당시 있었다면 조나라의 월경지가 되므로 주진학은 고제가 설치했다는 한서의 주석을 반박하고, 원래 발해군은 하간국의 일부였다가 하간국이 폐지된 후 하간군에서 분할된 것으로 추정했다.[1] 원시 2년(2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25만 6377호, 90만 5119명이 있었다. 아래의 속현 목록은 한서 지리지의 순서를 따르며, 일반적으로 첫 현이 군의 치소이다.[2] 현재의 창저우 시 동부와 랑팡 시 중부와 남부, 그리고 헝수이 시 푸청 현과 빈저우 시 우디 현 일부 지역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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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의 이름을 영하(迎河)로 바꾸고 다음 현의 이름을 바꿨다.
기주자사부로 이관되었고 하간군의 군역확장, 안평국의 신설로 인해 8현으로 군역이 축소되었다. 32,389호 1,106,500명이 살았다.[4] 후한말에 원소가 이지역에 태수로 있으면서 세력을 다졌다.
원소사후 원상을 비롯한 원소의 아들들이 세력갈등을 일으키면서 내전을 일으켰다. 조조는 이 내란을 틈타 기주를 점령했는데, 발해군은 이시기에 조위의 치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양신현이 본군에서 낙릉군 이관되었고 안평국에서 본군으로 요안현이 이관되었다.
안평국에서 부성현이 이관되었다. 10현 40,000호를 거느렸다.[5]
석륵이 하북을 점령하면서 북방민족의 치하로 들어갔으며 후조 → 전연 → 전진 → 후연의 지배하에 있었다. 북위 도무제가 후연을 멸망시키면서 북위의 치하로 들어왔다. 북위 태무제는 발해군을 창수군(滄水郡)으로 개명했다. 그리고 북위 효문제는 487년(태화 11년)에 북부지역인 부양현, 고성현, 요안현일대에 부양군을 신설했고 497년(태화 21년)에 원래이름으로 되돌렸다. 북위대에도 기주에 소속되어있었으며 4현 37,972호 140,482명을 거느렸다.[6] 북위멸망이후 동위, 북제, 북주순으로 소속이 바뀌었다.
수나라는부양군과 낙릉군을 통폐합했고 군명을 바꿨다.(勃海郡 → 渤海郡) 586년(개황 6년)에 수나라가 주현제를 실시했을 때 발해군지역에 체주(棣州)를 설치했으나 606년(대업2년) 창주(滄州)로 개명되었다. 10현 122,909호를 거느렸다.[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