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에 입학, 1931년 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했다. 그해 친지의 주선으로 만주북간도 용정에 있는 명신여학교(明信女學校) 교사로 취직하였다. 이후 교사로 근무하는 동안 〈피로 색인 당신의 얼골을〉(1931)을 《동광》에 발표하면서 등단한 뒤 교사, 기자이자 시인으로 활동했다. 이화여전을 졸업한 해에 만주의 여자 중학교에서 1년 교사를 하였고, 1932년 서울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가 되었다.
작품 활동
1933년 철학자안호상(安浩相)을 만나 결혼하였으나 이혼하고, 이후 평생을 독신으로 생활하였다.
특히 일본 제국주의의 대동아공영권 논리를 형상화한 〈동방의 여인들〉(1942)을 친일 잡지 《신시대》에 기고하고 《매일신보》에는 〈호산나 소남도〉(1942)라는 전쟁 찬양시를 발표하였으며, 지원병 참전을 독려하는 시 〈어린 날개 - 히로오카(廣岡) 소년 학도병에게〉(1943), 〈아가야 너는 - 해군 기념일을 맞아〉(1943), 〈내 어머니 한 말씀에〉(1943) 등을 연달아 발표하는 등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했다. 이 시기 비슷한 주제의 시들을 창작한 노천명과 함께 문인 중 가장 노골적인 친일파로 분류되고 있다.
해방 이후
광복 직후
1948년12월, 파리 샤오궁에서 열린 제3차 유엔 임시총회 한국 대표단이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힘써준 프랑스외무성 직원들과 감사의 만찬을 하고있는 모습. 오른쪽 끝 한복입은 여자가 모윤숙, 그 뒤로 사람 하나건너 장기영, 가장 뒤 정중앙에 장면, 그 왼편 하나건너 조병옥, 가장 왼쪽 끝에서 두번째 여자가 김활란.
광복 후 미군정 치하에서부터 이승만과 밀착하여 단독 정부 수립에 협력하였다. 모윤숙은 크리슈나 메논 유엔한국위원장이 남한 단독 선거에 반대하던 것을, 미인계를 이용해 1948년3월 12일 표결에서 남한의 독자적 선거안에 찬성표를 던지게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 모윤숙은 김수임의 단짝이기도 하며 또한 이강국을 좋아했다는 설이 있는데, KBS드라마서울 1945에서 이 설을 차용하기도 했다. 한편, 김수임이 간첩 혐의를 받고 재판을 받을 당시 모윤숙은 김수임을 적극 변호하였다.
귀국 후 이화여자대학교에 강사로 출강하여 국문학을 강의하였고, 1949년 월간 순수문예지 ≪문예 藝術≫를 창간하였으며, 김구의 국민장에 참석하여 추도시를 낭독하였다.
한국 전쟁 발발 후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모윤숙을 즉결 처형하고 시신은 탱크에 매달고 다녔다는 소문이 나돌았을만큼 극우 문단에서도 대표적인 이승만 계열 인물이었다. 모윤숙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점령 하의 석 달 동안의 체험을 극도로 부정적인 입장에서 기억하고 묘사했는데, 이와 같은 관점은 오랫동안 남한에서 한국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의 주류를 이루고 남한의 공식 입장을 대변했다.[2]
한국 전쟁중에 그는 낙랑클럽을 이끌고 고위 미국인들을 상대로 로비를 하였는데, 모윤숙은 나라를 위해서 스스로 논개가 되었다고 말했다. 이 때 접대한 사람은 델레스 미 국무장관, 리지웨이, 콜터, 밴프리트 장군과 무쵸 대사 등이었다. 그는 후일에 "김활란 박사가 외국인과 대화하는 매너와 에티켓을 지도했고, 서툴지만 사교 댄스도 추었으며 때론 미인계도 썼지 뭐"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3]
1951년부산의 피난지에서 열린 이화여자대학에서 강의를 하였고, 휴전 후에는 계속 이화여대 교수로 출강하였다. 대한민국 국군이 서울을 수복한 뒤 선무 방송에 참여해 종군하였고, 이후로는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 1955년 국제펜클럽 한국측 대표로 참가하였고, 이후 1960년 국제 팬클럽 한국본부 회장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