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별로 두카트의 다양한 종류들은 금속 함유량이나 구매력이 달랐다. 그 가운데 베네치아의 두카트 금화는 세계적으로 쓰였다.
초기
두카트(Ducat)라는 단어는 '공작령과 관련있는', '공작령의 동전'이라는 뜻의 중세 라틴어두카투스(ducatus)에서 왔다.[1]
1140년시칠리아의 왕루지에로 2세가 처음으로 두카트 은화를 발행했다. 은화에는 그리스도의 모습과[2] '그리스도님이시어 당신께서 다스리시는 이 공작령을 당신께 봉헌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Sit tibi, Christe, datus, quem tu regis iste ducatus)'라는 문구를 새겨넣었다.[3]
1252년에 피렌체와 제노바는 금화를 발행했으며 그 가운데 피렌체의 플로린은 유럽 각국에서 표준 금화로 쓰였다. 베네치아는 플로린에 기초해서 두카트를 발행했는데, 피렌체와 제노바의 무게 단위가 약간 달랐기 때문에 무게를 더 늘렸다. 베네치아 두카트는 순도 99.47%의 금 3.545g을 함유하고 있었다. 이 정도 순도는 당시의 야금 기술로 가장 높게 만들 수 있는 순도였다.[6]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들은 두카트를 계속 발행했으며 겉면에 새긴 도제들의 이름만 바꾸었다. 15세기에는 두카트 은화의 가치는 124베네치아 솔디로 정해졌다. 1567년에 영국과 스페인이 전쟁을 치르자 금값은 올랐고 두카트의 가치 또한 올랐다.[7] 이 시기에 두카트는 '제카 두카트'라는 뜻의 두카토 데 체카(ducato de zecca), 줄여서 체키노(zecchino)로 불렸다.[6]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레오나르도 로레다노는 1/4두카트와 1/2두카트 주화를 발행했고, 그 뒤로 105두카트까지 발행했다. 이 주화들은 1284년에 처음 만들어진 두카트의 형태와 무게를 이어갔다. 서양 주화에서 날짜를 새기는 것이 흔해진 뒤에도 베네치아는 1797년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멸망시킬 때까지 두카트에 날짜를 새기지 않았다.[8]
베네치아 두카트의 모방
베네치아 두카트의 모방품들은 대부분 레반트 지역에서 만들어졌다. 1346년부터 1353년까지 성 요한 기사단은 기사단 총장디외도네 드 고종과 함께 자체적인 두카트를 발행했으며, 그 뒤로 총장들은 오히려 베네치아 두카트를 더 정확하게 모방하는 것이 더 쉽다는 사실을 알아냈다.[8]제노바의 상인들은 히오스 섬에서 질이 낮은 두카트를 발행했다. 이 저급 두카트들은 주화의 순도를 높게 평가하던 베네치아에서 문제가 됐다. 제노바 상인들이 만든 두카트가 오늘날 드물게 남아있다는 점은 당시 베네치아에서 저급 두카트들을 녹였을 것이라는 추측을 남긴다.[9]
헝가리 두카트
서유럽에서 베네치아 상인들은 활발하게 경제 활동을 했지만 상품을 사는 것보다 많이 샀기 때문에 두카트는 플로린보다 덜 유통됐다.[10]1311년에 헝가리의 카로이 1세가 금화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15세기에 들어서자 순도가 높은 플로린금화와 저급 모방품 사이에 품질 차이가 생겨 순도가 높은 금화를 두카트라고 부르고 저급 모방품을 굴덴이나 골드굴덴이라고 불렀다.[11]카를 5세는 이 차이를 알고 1524년에 베네치아 두캇을 신성 로마 제국에 유통시킬 때 굴덴보다 39% 더 높은 가치를 매겼다.[12] 그의 뒤를 이은 페르디난트 1세는 1526년에 왕이 됐을 때 헝가리에 이 제도를 도입했고, 따라서 헝가리의 금화들은 두카트로 불리게 됐다.[13]헝가리 두카트의 순도는 유럽 전역에서 인정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