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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2대 대통령 선거 한국국민당 후보 선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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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민당 제12대 대통령 후보 지명은 1981년 1월 23일 민주공화당, 유신정우회 출신 인사들로 구성된 한국국민당이 창당대회 및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를 개최하고 백암 김종철을 1981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당의 후보로 추대한 것을 말한다.
이만섭 당시 국민당 정책위의장 및 조강특위 위원장은 훗날 당시 신군부 세력이 국민당의 창당 및 총선 공천까지 관여하고 있었다고 회고하였다.[1]
배경
박정희 정권의 여당이었던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는 1980년 10월 27일 신군부의 정당 및 국회 해산 조치로 인해 해체되었다. 그러나 신군부는 같은 해 11월 25일 공화당 의원 25명과 유정회 의원 57명의 정치 활동 제재를 해제하였고, 이에 따라 정치 활동 재게가 허용된 김종철·양찬우·김용호·이만섭·고재필·윤인식·김영광 등은 곧바로 공화당 재건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공화당의 당 조직과 재산, 직원들을 신군부에서 고스란히 가져가버려 조직 재건에 애를 먹어야 했다.
국민당의 총재가 될 것이 유력한 창당준비위원장에는 해금 인사 중 최다선 의원인 김종철 전 공화당 의원이 선출되었다. 김종철은 자유당에서 정치를 시작한 원로 인사에 한화 회장 등을 지낸 경제통이었으나, 공화당에서 핵심적인 당직을 맡거나 언론의 주목을 받은 적은 없어 당 총재를 맡기에는 정치적 중량감이 없는 인물이었다. 따라서 김종철이 한국국민당의 초대 당수로 선택된 것은 의아하다는 평이 많았다.[2]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군부가 김종철을 한국국민당의 총재로 내정한 것은 "여야를 불문하고 당수나 당 대표에는 지역 기반이 강한 사람과 영호남 출신은 안 된다"는 전두환 대통령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실제로 이재형 민정당 대표와 유치송 민주한국당 총재는 경기도, 반공당을 추진하던 오제도 전 의원은 이북 출신이었으며, 김종철 전 의원은 충남 출신이었다.[3] 실제로 신군부는 김종철 전 의원 외에도 양찬우 전 의원과 고재필 전 의원 역시 당수 후보로 고려하고 있었다. 특히 양찬우 전 의원은 김종철 전 의원보다 더 유력한 후보로 평가 받았다. 그러나 양찬우 전 의원은 영남, 고재필 전 의원은 호남 출신이라 탈락하였고, 유일하게 남은 김종철 전 의원이 낙점을 받았다.[3]
결과
한국국민당 내에서는 대선 참여 여부를 놓고 찬반 양론이 있었다. 어차피 당선 가능성도 낮은데다 선거인 선거 결과 확연한 약세가 드러나면 안 그래도 어려운 당세가 더 위축될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렇게 될 경우 총선에서의 경쟁력마저 보장할 수 없다는 불안감이 팽배했다.[4]
이같은 분위기는 김종철 한국국민당 창당준비위원장이 1월 11일 대통령 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한 것을 계기로 반전되었다.[5] 한국국민당은 상임위원 및 재경조직책 연석회의를 열고 한때 여당을 지낸 공당으로써 대선에 불참할 수는 없다는 것에 의견을 모았다. 결국 대통령 후보 추천권을 가진 창당준비위원회 상임위원회는 1981년 1월 21일 회의에서 김종철 창당준비위원장을 대통령 후보로 추천하였다.[6]
한국국민당은 1981년 1월 23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별관에서 대의원 1,189명 중 1,123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당 및 대선 후보 지명 대회를 열고 김종철 창당준비위원장을 당 총재 및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였다.
한국국민당은 2월 11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인 선거에서 총 49명의 당선자를 내었으며, 김종철 후보는 2월 25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85표를 획득하였다.
각주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