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네(일본어: 寧々 (ねね), 1547년(덴분 11년)[1] ~ 1624년 10월 17일(간에이 원년 음력 9월 6일))는 일본의 다이묘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정실이다. 본명은 네네이며 출가 후의 이름은 고다이인(高台院)이다. 스기하라 사다토시의 친딸이며 아사노 가문에 양녀로 들어갔다.
기타노만도코로(北政所)로 유명하다. 기타노만도코로로 불린 인물은 역사상 다수 존재하고 있지만, 네네 이후로 이 통칭은 그녀만의 고유한 것으로 정착된다.
어릴적 이름에 대해선 여러 설이 있다. 이름은 일반적으로 네네라 불리지만, 히데요시나 그녀 자신의 서명 등에 <오네>, <네(祢)>, <네이(寧)>라는 표기가 있기 때문에 <오네>라 불리는 일도 많다. (자세한 이야기는 뒤에 서술)
《기노시타가후(木下家譜)》 등 조카인 기노시타 도시후사(木下利房)의 영지인 빗추 아시모리 번의 문서에 <네이코(寧子)>라 쓴 기록도 남아있다. 従一位를 제수할 때의 위기(位記)에는 <도요토미 요시코(豊臣吉子)>란 이름이 있지만 이것은 남편 히데요시의 이름을 받은 것이다.
법명은 高台院湖月心公.
오와리의 스기하라 스케자에몬 사다토시(杉原 '助左衛門' 定利)의 차녀로 태어나 숙모의 결혼 전, 오와리 가이토 군 쓰시마의 아사노 마타에몬 나가카쓰(浅野 '又右衛門' 長勝)의 양녀로 들어갔다.
1561년(에이로쿠 4년) 음력 8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가신 기노시타 도키치로(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결혼했다(통설로는 14세). 어머니 아사히(朝日; 히데요시의 여동생 아사히히메(朝日姫)와는 동명이인)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 결혼이었다.
그 후, 조강지처로서 남편의 입신출세에 힘을 다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히데요시나 자신의 친척을 양자나 가신으로서 키웠다. 그 중에서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와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는 특히 유명하다.
1568년경부터 수년간 기후에서 살았다. 이때 노부나가를 따라 상락(上洛.지방에서 교토로 올라감)한 히데요시는 교토에서 첩을 들여, 하시바 히데카쓰(羽柴秀勝)를 낳았다(그 존재를 의문시하는 목소리도 있음).
1574년, 나가하마 12만 석의 주인이 된 히데요시의 부름을 받고, 히데요시의 어머니와 함께 거처를 그곳으로 옮겼다. 이 후에는 원정으로 나가하마를 비우는 일이 많은 남편을 대신해 성주 대행으로서 임했다.
1582년(덴쇼 10년)의 혼노지 사건 때에는 오미 나가하마성에 있었는데, 잠시 난을 피해 영내의 다이키치지(大吉寺)에 몸을 숨겼다. 다행히 얼마 후 야마자키 전투에서 히데요시가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를 격파함에 따라 나가하마로 돌아와 히데요시와 재회했다. 그 후 히데요시와 함께 오사카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1585년(덴쇼 13년) 히데요시가 간파쿠에 오름과 동시에 네네도 종3위에 오르고 기타노만도코로로 불리게 되었다.
1588년(덴쇼 16년) 음력 4월 14일, 고요제이 천황(後陽成天皇)이 주라쿠다이(聚楽第)에 행행(行幸)하였고, 천황이 환궁한 음력 4월 19일에는 종1위에 올랐다.
1598년(게이초 3년) 음력 8월 18일에 히데요시가 사망했다. 이에 네네는 출가해 고다이인(高台院湖月尼)이라 칭했다.
1599년(게이초 4년)에는 오사카성 니시노마루(西の丸)를 떠나, 예전부터 네네를 섬겨온 고조스(孝蔵主)를 비롯한 몇 명의 여종들을 데리고 교토 산본기의 저택에 은거했다(이후 니시노마루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들어간다). 화장료로서 다이묘에 준하는 1만5천 석의 영지를 도쿠가와로부터 받은 덕분에 전 기타노만도코로로서의 품위를 지킬 수 있었다.
1605년(게이초 20년), 남편 히데요시의 명복을 빌기 위해 이에야스와 상의해 교토 히가시야마(東山)에 고다이지(高台寺)를 건립하였고, 이곳을 여생을 보낼 마지막 거처로 정했다. 1615년에 벌어진 오사카 전투로 도요토미 가문이 멸망한 후에도 계속해서 에도 막부의 보호를 받았다.
1624년(간에이 원년) 음력 9월 6일에 사망하였다. 연령에 대해서는 앞에 밝혔듯 여러 설이 있으며, 대략 76세, 77세, 83세에 사망한 듯하다. 만년에 조카・기노시타 도시후사(木下利房)의 아들 중 하나인 기노시타 도시쓰구(木下利次)를 양자로 맞아들였기 때문에, 네네의 영지중 일부인 3천 석을 도시쓰구가 계승하였다.
라고 할 정도로 칭찬하고 있다. 또한 프로이스는 같은 책에서 네네를 "왕비" 혹은 "여왕"(Queen)이라 칭하고 있다. (위화감을 없애기 위해 여왕이란 단어는 통상 "관백부인" 등으로 번역된다)
네네는 정실부인이었지만 자식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히데요시는 한때 네네를 가혹하게 대했으며, 네네와 히데요시의 측실인 요도도노와는 심한 대립관계에 있었다는 설이 있다. 다만 최근의 다바타 야스코 등의 역사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둘은 오히려 협조・연대관계였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도 요도도노와 대립관계였던 동군(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끈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 소위 무단파)을 위해 네네가 움직였다고 하는 것이 통설이지만, 최근의 연구에서는 요도도노와 연대하여 오쓰성 전투에서의 강화교섭과 전후처리에 힘썼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또한, 반대로 이시다 미쓰나리들과 친했으며, 세키가하라 전투시에도 서군측의 자세를 취했을 가능성을 지적하는 시라카와 도루 등의 연구도 있다. 그 설의 논거로서 시라카와가 들고있는 것이 다음과 같은 사항이다.
이와 같이 여러 설이 있으며, 지금으로서는 동군측이냐 서군측이냐 어느쪽으로 확정할 수 없지만, 당시의 기타노만도코로의 관심사는 정권의 귀추가 아니라, 히데요시가 실현한 천하평안을 지키는 것과 도요토미 가문의 안태를 바라는 것이었다고 한다면, 전투 전후로 그녀가 취한 여러 행동을 해석할 수 있다.
이름에 대해서는 쭉 '네네'로 불려왔지만, 쇼와 시대의 일본사학자 구와타 다다치카가 기타노만도코로의 자필 편지 서명이 ‘네’(ね) 한 글자라는 것을 이유로 그녀의 이름은 원래 네였다고 주장했다(통칭으로는 접두어 ‘오’(於)가 붙어서 오네가 된다). 따라서 ‘네네’는 《다이코키》 등에 의한 오기라는 설을 제창했다. 이에 대해 여성 이름 연구자로 명성이 자자한 쓰노다 분에이는 다음과 같이 반론했다.
덧붙여서, NHK의 NHK대하드라마에서는 고다이인이 처음 등장한 1965년의 《다이코키》 이후 오랫동안 ‘네네’가 사용되어 왔지만, 1996년의 《히데요시》 이후로는 2006년의 《공명의 갈림길》을 제외한 모든 드라마에서 '오네'라는 호칭이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