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키가하라 전투(일본어: 関ヶ原の戦い 세키가하라 노 타타카이[*])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게이초 5년 음력 9월 15일(서기 1600년10월 21일)에 미노국후와군 세키가하라(지금의 기후현후와군세키가하라정)를 주전장으로 하여 행해진 야전이다. 세키가하라에서의 결전을 중심으로 일본 전국 각지에서 전투가 벌어져 세키가하라의 전투라고도 불린다. 전투 당시는 난보쿠초 시대의 옛 전장(古戰場), '아오노하라'(青野原)나 '아오노가하라'(青野カ原)라고 쓰여진 문헌도 있다.
이 전역 결과 도요토미 정권은 통일 정권의 지위를 상실한 반면, 승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막강한 권력을 손에 넣고 막번 체제 확립의 길을 열게 된다.
배경
일본 열도를 통일한 도요토미 정권 내부에는 정권 성립에 군사적으로 기여하며 임진왜란에도 참여한 무장 세력인 ‘무단파’(武斷派)와 행정·경제·병참·군사·종교 등 전투 외적인 분야에서 활약했던 ‘이료파’(吏僚派)[4] 사이의 대립이 있었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동생인 히데나가(秀長) 때문에 표면화 되지는 않았다.
1591년에 히데나가가 죽고, 임진왜란의 출병과 퇴각으로 말미암아 양쪽 파벌의 대립이 더 깊어졌다. 히데요시는 죽기 전에 오대로(五大老) 및 오봉행(五奉行) 제도를 만들어 여러 다이묘에게 친자식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에게 복종할 것을 맹세시키고 1598년8월에 후시미성(伏見城)에서 죽었다. 이때부터 양쪽의 대립은 표면화되었다. 즉, 다섯 다이로 중 한 명인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는 금지된 다이묘 간의 결혼과 영토 분배를 통해 영향력을 강화하였고, 이것을 또 다른 다이묘인 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가 엄중하게 경고했다.
한때 후시미(도쿠가와군)와 오사카(마에다군) 사이에서 이 갈등은 일촉즉발의 상황에까지 이르렀는데, 다행히 마지막에 서로 서약서를 교환하는 것으로 충돌은 피했지만, 이때부터 무단파 다이묘나 인척인 다이묘들이 도쿠가와 관저로 모여들면서, 도요토미 가문 내부는 빠른 분열의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미쓰나리는 이에야스의 중개로 사건의 책임을 묻지 않기로 하고, 봉행직을 해임당하고 근거지인 사와야마 성(佐和山城)으로 은거했다[6]. 미쓰나리의 실각과 다른 오대로들이 자신의 영지로 귀환함에 따라 이에야스의 대항 세력은 사라졌고, 이에야스는 후시미성에서 오사카성으로 들어가 정무(政務)를 맡아 지휘했다.
주요 양군의 다이묘
아래 표 안의 병력수는 주로 『일본전사 세키가하라역』(日本戦史関ヶ原役)에 의한다. 『일본전사 세키가하라역』은 동서 양군 병력의 실수가 불분명하다고 하면서 석고 100석당 3명으로 산출한 동원 가능 병력의 추측치를 실었다.
다테 마사무네의 병력은 마쓰카와 전투에서 동원된 병력 20,000~25,000과 게이초 데와 전투에서 동원된 유수 마사카게가 이끄는 모가미씨 지원군 3,000의 합계이다.
우에스기 가게카쓰의 병력은 어디까지나 게이초 데와 전투에서 동원된 병력뿐이다. 마쓰카와 전투나 우에스기 이민잇키(上杉遺民)[7]의 병력은 포함하지 않는다.
발단
이에야스는 마에다 도시이에의 장남 마에다 도시나가(前田利長)가 주모자로 지목된 도쿠가와 이에야스 암살 계획이 존재하는 것을 알고, 용의자로서 5부교이었던 아사노 나가마사와 오노 하루나가(大野治長), 히지카타 가쓰히사(土方雄久)에게 칩거(蟄居)를 명령했다. 그리고 마에다 도시나가에 대해 모반 혐의를 씌우고 정벌 계획을 세운다. 이에 도시나가는 친모인 호슈인(芳春院)을 인질로 내놓으면서 복종 의사를 표명했고, 가까스로 마에다 가문의 지위는 보전되었다.
1600년(게이초 5년)에 이르자, 이에야스는 우에스기씨의 옛 가신 후지다 노부요시(藤田信吉)의 출분(出奔)[8]을 계기로 아이즈(会津)의 우에스기 가게카쓰에 대해 군비 증강을 비난하며 교토로 올라와 해명하라고 경고하였다. 가게카쓰의 중신 나오에 가네쓰구는 이에야스의 경고를 무시하였고, 오히려 나오에 장을 발표하여 이에야스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고 결국 이에야스를 총대장으로 하여 도요토미 측 다이묘가 다수 참가한 도요토미군은 아이즈 정벌을 개시하였다.
이에야스는 후시미성에 남겨둔 신하 도리이 모토타다(鳥居元忠)의 보고를 시모쓰케국(下野国) 오야마(小山)에 이르러 접하고는 즉시 행군을 중지하고 따르던 다이묘들에게 이후의 동향을 물었다. 우에스기 토벌은 중지되어 사나다 마사유키와 다마루 다다마사 등의 다이묘는 이에야스 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그대로 이에야스를 따르기로 결정하고 군을 되돌려 서쪽으로 향하였다.
한편 이에야스의 아이즈 정벌은 이시다 미쓰나리를 거병시키기 위해 이루어진 책략이라는 견해도 있다. 기나이에서 모습을 감추면 미쓰나리를 유인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설을 따른다면, 도리이 모토타다는 이에야스 측이 미쓰나리를 공격하기 위한 구실을 만들기 위해 죽음을 맞이하는 임무를 맡은 것이었다.
이 경우 때문에 히데이에가 먼저 궐기하고, 미쓰나리는 이것을 받아들이면서 거병을 결정했다는 측이 최근의 연구에서 매우 유력시되었다. 유력한 미쓰나리파 무장인 사나다 마사유키가 미쓰나리의 협력 요청에 대해 “어째서 사전에 알려주지 않았는가!”라고 적은 편지가 전해지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이끌려서 궐기했기에 전투 준비가 졸속적으로 이루어졌고, 사타케 요시노부, 쓰가루 다메노부(津軽為信) 등 미쓰나리와 친밀한 무장들이 서군에 참가하지 못하고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 빠진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요시노부는 아버지 요시시게의 반대에 부딪혀 중립을 지키지 못하였고, 다메노부는 히데요시에게 영지를 인정받았을 때 미쓰나리가 많은 도움을 받은 큰 빚이 있었지만 주위 모두가 동군 측에 있다 보니 자신도 어쩔 수 없이 이에야스 측에 섰다. 대신 다메노부는 전투 후 미쓰나리의 아들 시게나리와 사에요시를 보호했다. 또 고다이인의 양녀가 된 미쓰나리의 3녀 다쓰히메(辰姫)는 후에 다메노부의 아들이자 2대 번주였던 쓰가루 노부히라(津軽信牧)에게 시집가서 훗날 3대 번주가 되는 맏아들 쓰가루 노부요시(津軽信義)를 낳았다.
7월 12일사와야마성(佐和山城)에서 미쓰나리는 오타니 요시쓰구, 마시다 나가모리, 안고쿠지 에케이와 비밀 회동을 모리 데루모토을 서군 총대장으로 삼기로 결정했다. 같은 날 아이치가와(愛知川)에서 동군에 참가 예정이던 여러 장수를 저지하기 위해 관소(関所)[10]를 설치했기에, 조소카베 모리치카, 나베시마 가쓰시게 등이 움직일 수가 없어 결과적으로 서군에 참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동군은 에도에서 머물던 이에야스를 제외하고 도카이도(東海道)를 따라 서쪽으로 진군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 이케다 데루마사가 선봉에 선 동군은 8월 22일 고우다(河田)[11] 서 기소가와(木曽川)를 건너 고메노무라(米野村) 부근에서 서군과 격돌, 이를 격파하고 진군을 계속해 다음날 오다 히데노부가 성주로 있던 기후성을 함락했다. 이에야스는 에도에서 여러 무장에게 편지를 보내었다. 도도 다카토라, 구로다 나가마사 등을 사자로 삼아 도요토미 측 다이묘의 저항을 막고, 서군을 내부로부터 무너뜨리려 하였다. 기후 성이 함락되었음을 안 이에야스는 중대한 결심으로 약 3만의 군사를 이끌고 오사카 방면을 목표로 진군했다.
이에야스의 3남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약 3만 8천의 병력을 이끌고 나카센도(中山道)를 따라 전진했으나, 도중에 사나다 마사유키가 지키던 우에다성을 공략했다가 발목을 잡혀 세키가하라 전투에는 참전하지 못했다. 이에야스는 결전 전날인 9월 14일, 아카사카(赤坂)의 오카야마(岡山)에 본진을 세웠다. 미쓰나리는 가신인 시마 기요오키(島清興)의 진언에 따라 아카사카 부근을 흐르던 구이세가와(杭瀬川)에 병사를 내보내 동군의 일부를 유인해 이들을 격파했다(구이세가와 전투).
9월 15일 동서 양군은 세키가하라에 집결했다. 동군 82,000명, 서군 104,000명, 도합 18만이 넘는 병력이 좁은 세키가하라의 분지에 집결했다고 한다.[12]
메이지 시대 군사고문으로 일본을 찾았던 독일의 클레멘스 메켈 소령은 세키가하라에서의 양군의 포진을 접하고 서군의 승리를 장담했다고 한다. 그만큼 서군 측은 미쓰나리가 있던 사사오 산(笹尾山), 우키타 히데이에가 있던 덴만 산(天満山),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가 있던 마쓰오 산(松尾山), 그리고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가 포진한 난구 산(南宮山)을 연결하는 전선으로 동군을 감싸 안은 학익진(鶴翼の陣)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형적 이점을 차지하고 있었다. 반면 동군은 골짜기에 갇혀 꼼짝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서군은 승리를 자신했다. 하지만 동군 역시 이럼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장담했는데 그것은 서군쪽의 다이묘들간의 불화가 극심하다는 것을 동군측에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였다. 분명 정상적인 군대간의 전투였다면 동군이 이길 수 없는 상황이였으나 서군의 조직력은 이미 군대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와해된 상태였다. 물론 이 점을 염려한 오타니 요시쓰구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 명망이 없는 이시다 미쓰나리 대신 명망이 있는 모리 데루모토를 총대장으로 옹립하여 보완책을 강구했으나 결과적으로 별 소용이 없었다.
세키가하라는 이른 아침부터 깊은 안개가 생겨 근처 아군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이에야스로부터 선봉의 약속을 받은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곧바로 개전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전투 개시
짙은 안개 속에 양군은 2시간 정도 대치가 계속되었다. 서서히 안개가 걷힐 때쯤 후쿠시마 부대의 옆을 마쓰다이라 다다요시의 소부대와 이이 나오마사가 박차고 나갔다. 이에야스로부터 선봉을 맡고 있었던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급히 그들을 저지하고 이유를 묻자, “정찰”이라고 말하면서 후쿠시마 부대 전방으로 나아갔다. 마쓰다이라 다다요시의 소부대는 돌연 서군의 주력인 우키타 히데이에 부대를 향해 발포하고, 여기서 세키가하라 전투의 서막이 열리었다.
이 공격에 대해 우키타 부대는 즉시 응사했고, 세키가하라는 순식간에 격전의 장소로 변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 부대 6,000명과 우키타 히데이에 부대 17,000명은 치고받으면서 양쪽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고, 구로다 나가마사 부대 5,400명, 호소카와 다다오키 부대 5,100명 등은 일제히 미쓰나리를 향해 공격에 나섰다. 미쓰나리 부대도 휘하의 시마 기요오키와 가모 사토이에(蒲生郷舎)의 분전으로 공격해온 적을 격퇴했다.그리고 서군의 오타니 요시츠구는 동군의 도도 타카토라와 맞붙게 된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이미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등에게 배신을 약속받은 데다가 서군의 다이묘들간에 불화가 극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특히 서군의 다이묘 중 불화의 중심이 되는 이시다 미쓰나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계속되는 패배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확신했다. 그래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계속 패배를 당함에도 불구하고 병력을 뒤로 물리지 않고 그냥 싸우도록 내버려 둔 것이였다.
미쓰나리는 전투를 시작한 후 2시간을 경과할 때쯤 아직 참전하지 않은 무장들에게 전투에 참여할 것을 촉구하는 노로시(狼煙; 말하자면 봉화)를 올렸다. 거기에 시마즈 부대에 응원 요청의 사자를 보냈다. 서군의 총병력 중 전투를 벌이던 병력은 겨우 35,000명에 불과했기에 전투 상황을 유리한 상황으로 옮길 수 있었다. 여기서 마쓰오 산(松尾山)의 고바야카와 부대와 난구 산의 모리 부대가 동군의 측면과 배후를 공격한다면, 정확하게 말하자면 고바야카와 부대 등이 임진왜란 당시 보여준 무능한 모습만 보이지 않는다면 서군의 승리는 확정적이 될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사실 행주산성 전투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한강으로 몰아넣은 일본군(이 전투 당시 일본군의 지휘관은 가토 기요마사를 제외한 모두가 서군)이였으나 권율에게 일방적으로 패퇴한 전력이 있었다.
그러나 시마즈는 응원 요청을 거부했다. 또한 모리 히데모토는 깃카와 히로이에(吉川広家)에게 길이 막혀 참전할 수 없었다. 깃카와 히로이에는 모리 가문 소유의 영지를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이에야스 측과 내통하고 있었다.
고바야카와 부대는 오타니 요시쓰구 부대 우익을 공격하였다. 요시쓰구는 히데아키의 배반을 예측하여 온존하게 남아 있던 500명의 직속부대로 맞서 싸워 15,600명의 고바야카와 군을 300미터 정도 후퇴시켰다. 이때 고바야카와 군 무장인 마쓰노 시게모토(松野重元)는 “방패 속의 반역은 무사로써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면서 한 부대를 이끌고 방관했다. 이것이 고바야카와군의 후퇴의 원인이었다. 그런데 도도 다카토라 등의 모반책에 따라 그때까지 관망하던 와키자카 야스하루, 오가와 스게타다, 아카자 나오야스, 구쓰키 모토쓰나 등의 서군 여러 부대도 고바야가와 군에 호응하여 동군으로 돌아섰다. 사실 동군으로 돌아서기 이전 이미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이시다 미쓰나리를 저울질하고 있었다. 사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이시다 미쓰나리가 행주산성 전투에서 자신의 부대를 똑바로 지휘하지 못하고 무능한 모습을 보인 끝에 대패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같이 임진왜란에 참전한 바 있는 와키자카 야쓰하루로서는 이시다 미쓰나리를 신뢰할 수가 없었다. 이시다 미쓰나리 수준의 무능함이면 자멸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였다. 예측하지 않았던 4부대의 배신으로 치열한 난전이 순식간에 동군의 압도적인 우세로 변하게 되었다. 서군은 유리한 학익진을 형성하였고 동군을 골짜기에 가둬놓았지만, 학익의 날개 부분에 해당하던 상당수의 무장이 배신하거나 방관하는 자세로 일관하게 되어 전투는 서군 내에서의 내분과 동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인해 순식간에 전황이 역전되었고, 거기에 시마즈 요시히로와 모리 데루모토 등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는 서군 측 다이묘들이 따로 놀면서 엉뚱한 행동들을 했기 때문에 종국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이 대승을 거두었다.
서군의 패배
서군의 자멸 속에서 시마즈 요시히로 부대는 일제히 사격을 퍼붓고는 곧장 이에야스 본진을 통과하면서 철수하는 이른바 “전진철수”[13]를 개시했다. 이 행동에 후쿠시마 부대는 그대로 그들을 보내주었으나, 이들을 쫓았던 부대 중 이이 나오마사와 마쓰다이라 다다요시는 저격을 당해 부상을 입었고, 혼다 다다카쓰는 타던 말이 총에 맞아 낙마했다. 시마즈 부대는 시마즈 도요히사(島津豊久)와 아다 모리아쓰(阿多盛惇)[14]의 희생으로 약 80기 전후의 소수만이 살아남아 철수에 성공했다. 모리아쓰는 요시히로가 히데요시에게 선물 받았던 진바오리(陣羽織)[15]를 몸에 걸치고, 요시히로 대신 “효고두[16], 무운이 다하여 여기서 최후를 맞이하겠다.”라고 말하면서 할복했다고 전해진다. 다른 서군 부대는 괴멸하여 패주했다.
지역별 파급 효과
세키가하라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전국 각지에서도 동군, 서군을 각각 지지하던 센고쿠 다이묘들 사이에 교전이 벌어졌다.
도호쿠
아이즈 정벌에 관해선 호리 히데하루의 참언 때문이라는 게 정설이었으나, 근년에 들어 히데하루가 서군 측에 가담하려는 의사를 표시한 편지 등이 발견되었다. 이에야스는 미쓰나리 거병으로 인해 회군할 때 유키 히데야스를 주력으로 남기고, 우에스기 영지와 맞닿아 있던 모가미 요시아키와 그 주변의 히데하루, 다테 마사무네에게 가게카쓰의 감시를 명령받았다.
이때 바다가 욕심나던 모가미 요시아키는 이것을 호기로 보고 우에스기 영지에 대해 마사무네와 모의하여 침공하려고 기도했으나 이를 알아챈 우에스기가의 중신 나오에 가네쓰구로부터 선제 공격을 받았다. 9월 9일 요네자와성(米沢城) 방면에서 모가미 영지를 압박해 들어간 나오에 가네쓰구 군은 수일 만에 모가미 요시아키의 거성 야마가타성을 고립시켰다.
다테 마사무네는 동군에 가담하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전투에 승리한 후에는 마사무네의 옛 영지 7군(郡)을 더해 100만 석의 영지를 내려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다테 군은 우에스기 영지인 시로이시성(白石城)을 공격해 점령했다. 모가미 요시아키는 빠른 침공에 놀라 마사무네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다테 가문 내에서는 “우에스기 군과 모가미 군을 서로 싸우게 한 뒤 피로해진 우에스기 군을 공격하면 쉽게 물리칠 수 있고, 그 다음엔 야마가타도 힘들이지 않고 손에 넣을 수 있다.”라고 중신 가타쿠라 가게쓰나가 진언하였으나, 모가미가 괴멸은 우에스기 가게카쓰의 위협을 그대로 받게 되는 것이었기에(일설에는 야마가타 성에 살던 모친을 마사무네가 걱정했다는 말도 있다) 루스 마사카게을 총대장 대리로 내세워 9월 17일 원군을 보냈다. 마사무네의 원군이 가세하고, 가네쓰구 군이 사케노베 히데쓰나(鮭延秀綱)의 용맹에 눌려 시무라 미쓰야스(志村光安)가 소수 병력으로 수비하던 하세도 성(長谷堂城)을 공략하지 못하자 전황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으나, 9월 29일 세키가하라 전투의 소식이 양군 진영에 전해지자, 흐름은 일거에 모가미 군에게 기울었다.
가네쓰구는 즉시 철수를 명령했고, 자신은 후군을 맡아 철수는 개시했다. 한편 요시아키는 곧바로 추격을 명령하고 직접 맹공에 나섰다. 이 추격전은 대혼전이 벌어져, 요시아키는 투구에 총탄을 맞을 정도로 크게 고전하였으나, 모가미 요시야스 등의 군세가 달려와 어려움을 벗어났다. 가네쓰구 군은 10월 4일 요네자와 성으로 귀환했다. 이 전투를 하세도 성 전투라고 부른다.
호쿠리쿠
마에다 도시나가는 우에스기가 공격을 지원하기 위해 7월 26일 가네자와(金沢)를 출발해 8월에 야마구치 무네나가(山口宗永)가 지키던 다이쇼지성(大聖寺城)을 포위하고 3일 만에 함락시키고 아오키 가즈노리(青木一矩)의 기타노쇼성(北ノ庄城)을 포위했다. 그러나 “오타니 요시쓰구의 대군이 후방에서 다가온다.”라는 헛소문(요시쓰구 자신이 흘려보냈다는 얘기가 있다)을 듣고 놀라서 급히 가네자와로 회군하였다.
도시나가는 도중 군대를 둘로 나눠 니와 나가시게(丹羽長重)가 지키던 고마쓰성(小松城)에 별동대를 보냈다. 8월 9일 나가시게는 농성군을 이끌고 별동대를 기습해 별동대를 격파하고 뒤이어 도시나가의 본대도 기습을 가해 도시나가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교착상태에 빠진 나가시게는 서로 화친을 맺고, 고마쓰 성을 다음날 도시나가에게 넘겨주었다. 겨우 가네자와에 돌아온 도시나가는 급히 군을 재정비하고 9월 12일에 다시 가네자와를 출발했으나, 결국 세키가하라에 도착하지 못했다. 이때 다이쇼지 성 공격에 참가했던 동생 마에다 도시마사는 거성인 나나오성(七尾城)에서 농성하며 움직이지 않고, 동군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도시마사는 계속 서군에 참가할 것을 주장했기에 결과적으로 전투 후 영지를 몰수당하는 불행한 일을 당한다.
기나이
단고다나베성에는 호소카와 유사이가 아들 다다오키가 출진한 뒤 병사 500명과 함께 성을 지키고 있었다. 이곳을 서군 측에 가담한 후쿠치야마성(福知山城) 성주 오노키 시게카쓰(小野木重勝)를 총대장으로 한 고이데 히데마사(小出秀政), 요시마사(吉政) 부자, 아카마쓰 히로히데(赤松広秀) 등이 15,000여 병력을 이끌고 와서 다나베 성을 포위했다. 양쪽의 전투가 벌어졌으나, 서군 측 여러 무장 중에는 유사이에게 와카(和歌)의 배웠던 다니 모리토모(谷衛友)란 자도 있어, 격렬한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전황은 서서히 유사이에게 불리한 상황이었다. 죽음을 각오한 유사이는 비전의 “古今伝授”의 증서를 제자인 하치조노미야 도시히토 친왕(八条宮智仁親王)에게 의탁하기로 결심하고, 증서 일체를 하치조노미야에 헌상했다. 이 일이 하치조미야에서 고요제이 천황의 귀에 들어가자 유사이의 상실을 두려워한 고요제이 천왕은 마에다 겐이를 통해 서군 측에 성을 넘겨주라는 칙명을 보냈다. 그러나 서군 측에는 그런 의사는 없었고, 또한 유사이도 성을 넘겨주는 것을 거절했다. 9월 12일쯤에 이르러 고요제이 천황은 나카노인 미치카쓰(中院通勝), 가라스마루 미쓰히로(烏丸光広), 산조니시 사네키(三条西実枝)등 세 명을 칙사로서 다나베 성으로 보내 유사이에게 화의에 응하도록 설득해 9월 18일 오노키에게 성을 넘겨주고 퇴거했다.
그러나 유사이 퇴거 직후, 시게카쓰는 세키가하라 전투의 패배 소식을 전해 듣자, 시게카쓰는 후쿠치야마 성으로 돌아갔으나, 순식간에 승리의 여세를 몰아 달려온 타다오키와 배반한 다니 등의 군대에 포위당해 시게카쓰는 목숨을 탄원했으나 11월 18일 자결하고 말았다.
시코쿠
이요에서도 동군에 가담한 가토 요시아키라의 마쓰마에성(松前城)을 모리 군이 공격을 가했다. 무라카미 다케요시(村上武吉), 무라카미 모토요시(村上元吉) 등 이요에 인연을 가지고 있던 모리 가신들은 옛 영지 회복을 목표로 히라오카 나오후사(平岡直房), 소네 다카후사(曽根高房) 등이 미쓰하마(三津浜)에 상륙해 진지를 구축했다. 마쓰마에 성에 항복을 요구했다가 가토가의 수비대장인 쓰구다 가쓰나리(佃十成)의 야습을 받고, 무라카미 모토요시, 소네 다카후사가 전사하고 말았다. 그 후에도 모리 측이 불리함이 계속돼 세키가하라의 서군 측 패배를 접하고 모리 군은 후퇴했다.
규슈
규슈에서는 구로다 조스이, 가토 기요마사, 나베시마 나오시게 등이 본국에 머물고 있었고, 기요마사와 나오시게는 당초 중립을 지켰기에 적극적으로 움직인 사람은 동군에 가담한 조스이뿐이었다. 조스이는 나카쓰 성(中津城)에 모아둔 금과 병량을 아끼지 않고 풀어서 이것을 미끼로 모은 낭인을 중심으로 약 3,500여 명의 군대를 만들었다.
한편 서군 측에서는 동서 대결의 상황을 지켜보지 않고 데루모토의 지원을 받아 분고 탈환을 노리던 오토모 요시무네가 있었다. 9월 9일 요시무네는 추방된 이래 오랜만에 분고의 땅을 밟고, 오토모 옛 신하들을 모아 이시오키하라(石垣原)[17]에서 조스이 군과 대치했다. 9월 13일 양군이 격돌하여 격전을 벌여 요시무네 군의 용장이 전사하는 등 패색이 짙자 9월 15일 요시무네는 출가하여 모리 다헤에(母里太兵衛)의 진지에 출두하여 조스이 군에 항복했다. 조스이 군에 가담하기 위해 구마모토성을 나온 기요마사는 조스이 군이 승리했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돌려 서군 측의 고니시 유키나가의 영토를 침공했다.
조스이 군은 이후에도 기타큐슈 여러 성을 함락하고, 세키가하라에서 귀환한 다치바나 무네시게가 지키던 야나가와성(柳川城)을 기요마사, 나오시게와 더불어 포위하여 무네시게를 항복시켰다. 조스이 연합군은 마지막으로 시마즈가 공격을 계획하고, 유키나가의 영지에 남아있던 수비대장이 시마즈 요시히사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요시히사는 이에 응하여 군대를 파견하는 등 규슈의 긴장은 최고조에 달했으나, 시마즈 공격 직전 이에야스로부터 전투 중지 명령이 내려와 시마즈 공격은 중지되었다.
기타 지역
간토
사타케 요시노부는 아버지 사타케 요시시게의 “동군에 가담해야 한다.”라는 의견과 자신과 미쓰나리의 친교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어서 애매한 태도로 일관했다. 휘하의 다가야 시게쓰네(多賀谷重経)와 작인 세력 야마가와 도모노부(山川朝信), 소마 요시타네(相馬義胤)는 가게카쓰와 손을 잡고 있었다.
이세
세키가하라에서 진출하여 북상하던 모리 군은 도중에 있던 아노쓰성 등 이세의 여러 성을 공격했다. 아노쓰성의 도미다 노부타카(富田信高)는 항복하여 출가하고, 마쓰사카 성의 후루다 시게카쓰는 화친을 맺어 시간을 끌었다.
전후 처리 및 논공행상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투에서 승리 후 서군 측 다이묘의 처벌 및 동군 측 다이묘의 포상을 하였다.
우키타 히데이에는 세키가하라 전투 후 사쓰마로 도망쳤다가 1603년 말 시마즈 다다쓰네(島津忠恒)가 이에야스에게 끌고갔다. 다다쓰네와 아내의 친가인 마에다 도시나가가 구명 탄원하여 죽음은 면했으나, 스루가 구능산에서 유폐된 후, 하치조시마(八丈島)에 유배되어 사망할때까지 장장 50년동안 하치조시마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4대 쇼군 이에쓰나의 치세 때까지 살았고, 그의 자손은 마에다가의 지원을 받아 메이지 유신 때까지 가문을 지켰다.
시마즈 요시히로의 처벌은 여러 방면의 회유 끝에 1602년4월 이에야스는 “요시히로의 행동은 당주가 인정한 것으로 나쁘지 않다.”라며 요시히로의 형 시마즈 요시히사에 대해 영지를 인정해주고, 가문을 시마즈 다다쓰네에게 물려주는 것으로 죄를 용서했다. 이는 시마즈 가문에서 시마즈 요시히로를 고의로 정신병자라고 하면서 "사실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서군에 붙은 것도 시마즈 요시히로가 미쳐서 그런 것이니 용서를 바랍니다"라면서 탄원을 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다이묘가 시마즈 요시히로에서 시마즈 요시히사로 바뀌는 것으로 일단락 되었으며 석고의 삭감은 면제되었다.
모리씨에 대해서 모리씨의 당주 모리 데루모토가 서군의 총대장으로 오사카성에 있었기 때문에, 깃카와 히로이에의 영지 안전의 약속은 파기되었고, 모리 가문의 영지가 몰수되는 대신 히로이에에게는 스오와 나가토의 2개 구니가 영지로 내려졌다. 이에 놀란 히로이에는 이에야스에게 자신의 영지를 모리 가문의 것으로 해달라고 요청했다. 히로이에의 간청은 수락되었으나 결과적으로 많은 영지를 삭감당한 것이 되어, 깃카와 히로이에는 모리 가문으로부터 본가를 팔았다는 비난을 받고 운신의 폭이 좁아지게 되었다.
다치바나 무네시게와 마에다 도시나가를 격파했던 니와 나가시게도 영지를 몰수당했으나, 나중에 무네시게와 시게나가는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계획에 따라 다이묘로 복귀하고, 무네시게는 옛 영지까지 돌려받게 되었다. 특히 무네시게의 경우 시마바라의 난을 진압하는 데 큰 무훈을 세우게 되어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서군에 섰던 과거를 완벽하게 상쇄했다.
조소카베 모리치카는 사죄했지만, 오해와 가신의 참언이 원인이 되어 형 쓰노 지카타다(津野親忠)를 살해하여 이에야스의 분노를 사서 영지를 몰수당했다.
우에스기 가게카쓰는 아이즈(会津) 120만 석에서 나오에 가네쓰구의 영지였던 요네자와 30만 석으로 크게 삭감되었다. 참고로, 요네자와는 아이즈의 일부이며, 아이즈 최북단에 위치해 있다.
사타케 요시노부도 히타치(常陸) 미토(水戸) 54만 석에서 데와(出羽) 아키다(秋田) 18만 석으로 크게 삭감되었다.
서군을 배신하고 동군으로 돌아섰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지쿠젠(筑前) 나지마(名島) 36만 석에서 비젠(備前) 오카야마(岡山) 57만 석으로 증감하여 옮겼다. 그러나 히데아키는 1602년에 겨우 21살의 젊은 나이로 미쳐서 죽었고, 후사가 없어 가문은 단절되었다.
히데아키의 배신에 호응하여 돌아섰던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구쓰키 모토쓰나는 영지를 그대로 인정받았으나, 오가와 스케타다와 아카자 나오야스는 영지를 몰수당하고, 히데아키, 야스하루, 모토쓰나 이외의 배신한 자들에 대해선 이에야스는 엄중히 처단하였다. 스게타다는 배신한 과거가 많았고, 거기에 아들이 미쓰나리와 친했던 일 때문이었고, 나오야스는 “총성에 놀라서 배신했다.”라고 말한 이유가 원인이었다. 스게타다는 전투 후 다음해에 죽고, 나오야스는 마에다 도시나가를 섬기다가 1606년엣추(越中)에서 익사했다.
소 요시토시의 경우는 비록 서군에 가담했고 특히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인 점이 있었으나 요시토시는 평소에 임진왜란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나자마자 요시토시는 스스로가 고니시 유키나가의 딸인 마리아와 이혼한 데다가 이에야스에게 항복과 동시에 순종을 선언했으며, 특히 이에야스의 입장에서 요시토시는 그 해당되는 번이 쓰시마 후추 번인 관계로 조선과의 외교적 문제때문에 요시토시라는 인물이 반드시 필요해서 요시토시에 대한 상벌은 생략하고 그대로 쓰시마 후추 번주의 직위를 유지하고 석고의 삭감도 없었다. 그 대가로 요시토시는 1607년까지 조선과의 관계 회복에 힘을 써서 조선과 일본간의 국교를 정상화시켰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한 사쓰마번(薩摩藩)의 시마즈 가문과 조슈번(長州藩)의 모리 가문은 도쿠가와 가문에 대한 원한이 그대로 남아 250년 후 막부 말기에 이르러 막부 타도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일컬어진다. 그리고 그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을 침략 및 복속 시켰다.
다만 여기서 보더라도 도요토미 측과 인연이 있던 다이묘에 대해서 이에야스는 영토를 늘려주는 대신 서쪽 지역으로 이동시켰다.
쓰가루 다메노부는 동군 측에 가담하기는 하였으나, 그 맏아들 노부타케가 오사카성에서 도요토미 가문에 봉사했고, 전쟁 후에는 노부타케와 함께 온 이시다 미쓰나리의 아들을 보호해주는 등 양측에 모두 발을 대는 듯한 모습을 보인 탓인지 별다른 포상이 주어지지는 않았다. 다만, 다메노부와 셋째 아들 노부히라가 군영에 참여한 것에 대하여 고즈케국의 2천 석 영지가 약간의 은상으로 내려졌다.
이에야스 자신의 직할령에 대해서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에는 250만 석인 것을 400만 석으로 대폭으로 늘려 전국에서 제일 많은 영지를 가진 다이묘가 되었다. 이것은 일본 전토의 1380만 석의 30%에 달하는 대단한 비율이었으며 도쿠가와 자신의 절대권력의 크기를 과시하여 다른 다이묘들이 절대적으로 복종하게 만들기 위한 도구이기도 했다. 도쿠가와는 다른 다이묘들에 비해 최하 4~6배 이상의 석고를 짊어지고 있었으므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힘은 막강했다고 볼 수 있다.[18]
도요토미 씨의 영토에 대해선 히데요시 시대 222만 석에서 65만 석으로 크게 삭감했다. 도요토미 씨의 재정을 지탱하던 사카이와 나가사키의 교역항 등도 도쿠가와 씨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것으로 인해 완전히 도쿠가와 씨와 도요토미 씨의 입장은 역전되고 말았다.
한참 후대에 이르러서 도쿠가와 막부는 이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오사카 전투로 멸망시킨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자신이 직접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를 완전히 단절시키고 그 영지를 모두 몰수하며 끝없는 영지개발을 통해 기어이 500만 석을 채우고야 만다. 도쿠가와 히데타다 치세기간에 이르러서는 시마바라의 난을 진압하고 도쿠가와 직할령과 그 나머지 영지 총합이 대등한 수준까지 도달해 모든 다이묘들이 전부 힘을 합쳐야 도쿠가와 가문과 대등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 관련된 논점
서군의 대장 격이던 이시다 미쓰나리와 그 외 장수들이 오가키성에 머물지 않고 세키가하라로 전진한 것은 “오가키 성을 무시한 채, 사와야마 성을 함락한 뒤 오사카로 나가겠다.”라는 소문 때문이라고 한다. 이 소문은 이에야스가 퍼트렸으며, 이 소문에 미쓰나리가 걸렸다는 설이 보편적이지만, 의문점이 많다.
혹시라도 이에야스가 위의 말처럼 거짓 정보를 흘렸다고 본다면 부대의 통솔이 가장 취약한 행군 중 적의 습격을 받는다는 말이 된다. 이에야스가 유리한 상황에서 공격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부자연스럽고, 또 미쓰나리가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에 오사카에 있는 도요토미 히데요리에게 출진을 여러 번 요구했었다. 이것은 결속력이 부족한 서군의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한 것이라 말할 수 있겠지만, 이에야스가 오사카로 향한다면 미쓰나리에게는 절호의 기회로 오사카 부근에서 이에야스의 배후를 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부근 하천의 범람으로 여러 번 수해를 입었던 오가키 성을 이에야스가 수공으로 공격하면 서군의 수뇌와 세키가하라 부근에 포진한 모리 히데모토,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등과의 연락이 끊어지는 일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이 설은 세키가하라, 마쓰오 산에 설치된 축성 공사가 새로운 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대규모로 이루어졌음을 전제로 미쓰나리의 전략을 아래와 같이 추정할 수 있다.
세키가하라 서쪽의 마쓰오 산-사사오 산(笹尾山) 라인에 야전 축성을 실시해 동군의 진격을 저지한다.
동군이 오사카로 향하기 위해 오가키 성을 무시하고 세키가하라로 진격한다면 오가키 성의 이시다 미쓰나리, 우키타 히데이에, 난구 산의 모리가 동군을 추격해 1번 라인의 군과 함께 동쪽과 서쪽에서 협공한다.
동군이 오가키 성을 공격한다면 1번 라인에서 포진하던 오타니 요시쓰구, 모리 히데모토가 오가키 성을 공격하는 동군의 배후를 쳐 오가키 성의 군과 협공한다.
결국 이 전략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더라도 서군은 동군을 협공할 수 있다.
그러나 세키가하라 서쪽의 마쓰오 산-사사오 산 라인의 중요한 곳인 마쓰오 산 성채에는 거취가 불분명한 고바야카와 군이 서군의 조반(城番)[19]을 절반이나 몰아낸 형태로 주둔한 일, 또 오가키 성이 수공에 취약하기 때문에 수공을 당한다면 이미 성이 공격당하여 4번에서와 같이 오타니, 모리 군이 배후를 칠 수 없어, 이 전략은 깨지고 만다. 그 때문에 미쓰나리는 세키가하라에 잠행한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는 것이 이 설의 요지이다.
서군은 대장을 잘못 선택해서 패했다. 시마즈 요시히로나 고니시 유키나가가 총지휘를 했더라면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대패를 당하진 않았을 것이며 적어도 동군과 백중지세를 유지했을 것이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용맹한 다이묘였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임진왜란으로 많은 경험을 쌓은 백전노장인 반면 이시다 미츠나리는 행주대첩에서 권율에게 크게 패한 것 말고는 딱히 전투라고는 경험한 게 그리 많지도 않았다. 서군은 순전히 이시다 미츠나리 혼자만의 잘못으로 패배한 것일 뿐이며 이시다 미츠나리가 이 전투에서 저지른 실책들은 다음과 같다.
시마즈 요시히로를 귀빈으로 대우해줬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시마즈 요시히로가 이끌고 온 병력이 1,500명밖에 안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시마즈 요시히로를 푸대접했다.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가장 이시다 미츠나리를 심하게 의심하는 다이묘였다. 그렇기 때문에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에게 만큼은 죽을 힘을 다해 비위를 맞춰서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마음에 쏙들었어야 했는데 정작 이시다 미츠나리는 그런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에게는 종이로 된 서약서 한 장만 달랑 써 주고 아무것도 안 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 전투에서 엄청난 첩보전을 감행했다. 이에 따라 이시다 미츠나리 역시 도쿠가와 상대로 맞첩보전을 벌였어야 했지만 이시다 미츠나리는 그렇게 하지 않고 방관했다.
이시다 미츠나리가 평소에 행동을 똑바로 하지 못했다. 특히 호소카와 가라샤를 죽게 한 일로 세간의 분노를 크게 산 상태였으며 이 때문에 이 전투에서 본인이 직접 지휘를 하지 못한 채 모리 데루모토의 이름을 팔아서 지휘를 해야만 했다.
모리 데루모토의 이름은 팔았지만 정작 그 당사자인 모리 데루모토를 전쟁터에 나오게 하지 못했다. 서군 병력들은 모리 데루모토의 얼굴을 보느냐, 보지 못하느냐 만으로도 군 내부의 사기를 크게 좌우하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리 데루모토는 서군들 앞에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서군 아시가루 들의 관점에서 보면 웬 비리비리하고 왜소한 놈이 자칭 모리 데루모토에게 권한을 위임받았다고 하면서 나대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반면 동군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얼마나 소름끼치는 인물인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단 사전작업을 굉장히 많이 해뒀는데 시즈가타케의 7본창의 증오를 한몸에 받고 있던 이시다 미츠나리가 시즈카타케의 7본창과 마찰이 생기자 되려 시즈카타케의 7본창을 저지하는 척 하면서 이시다 미츠나리를 자택까지 안전하게 배웅해주는 반면 이시다 미츠나리를 오봉행에서 직위해제 시켰다. 호소카와 저택 사건은 이에야스가 딱히 손을 쓴 건 아니지만 이시다 미츠나리가 먼저 침범해 호소카와 가라샤를 인질로 잡으려다 가라샤가 이 과정에서 사망하는 바람에 이게 이에야스에게는 이득이 되었다. 게다가 서군에 가담한 다이묘들 중 일부는 계속 회유작전을 벌였으며 그 결과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를 필두로 한 여러 다이묘들이 연달아 배신하게 만들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자신의 진영을 그렇게 짠 것은 다른 다이묘같으면 변명의 여지없이 산밑에서 포위당해 몰살당할 것이 뻔했지만 이시다 미츠나리의 무능한 군재를 맹신해서 고의로 그렇게 진영을 구축했으며 실제로도 이시다 미츠나리의 군재는 너무나 무능했다. 결과적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시다 미츠나리의 무능함을 최대한 쥐어짜가면서 활용한 것이다.
세키가하라 전투도 병풍(6곡 한 척) 기후 세키가하라 옛 전장 기념관 수장 (에도 시대 후기)
세키가하라 옛 전장
세키가하라정, 기후현은 옛 전장을 관광에 활용하기 위한 PR활동이나 정비했으며[20], JR 세키가하라역에서는 동군과 서군 주요 무장의 이름이 적힌 '옛 전장의 마을 세키가하라'라는 제목의 간판이 걸려 있다.[21]. 가마타구미의 유명한 전쟁터인 게티즈버그(미국)이나 워털루(벨기에)와 '자매 옛 전장 협정'을 맺고 있다.[22].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조선왕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진술로 일본의 사항을 알려주고 있다.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쳐 돌아온 하동(河東)의 교생(校生) 강사준(姜士俊)과 여진덕(余進德) 등의 초사(招辭)는 다음과 같다.
“
대체로 적정(賊情)은 병신년부터 천재(天災)가 자주 있고 지진이 너무 심하여 공사(公私)의 가옥이 무수히 파괴되었고, 심지어는 산릉(山陵)과 천택(川澤)이 이동하고 균열되어 압살(壓殺)당한 민간과 가축이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무술년 8월 18일에 평수길(平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이 병사(病死)하면서 그의 폐노(嬖奴) 석전 치부경(石田治部卿: 이시다 미쓰나리)·증전 우문승(增田右門丞: 마시타 나가모리)·장속 태장승(長束太臟丞: 나쓰카 마사이에) 등 3명에게 유언하기를 ‘너희는 어린 수뢰(秀賴: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보좌하라. 나의 말을 저버리지 말라.’ 하고, 또 내부 가강(內府家康: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관동북(關東北)[23] 33주(州)를 네가 진복(鎭服)시켜야 어린 아이를 보호할 수 있다.’ 하고, 다음으로 중납언 휘원(中納言輝元: 모리 데루모토)에게 ‘관서(關西: 간사이 지방)의 남쪽 30여 주에서는 네가 우두머리이니, 모름지기 나의 아들을 부탁하는 근심을 가련히 여겨 삼가 후사(後事)를 보존하도록 하라.’ 했다고 하였습니다. 그해 겨울 가등청정(加藤淸正가토 기요마사[*])과 갑비수(甲斐守: 구로다 나가마사) 등이 풍신수길(豊臣秀吉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살았을 때에 석전 치부경이 권세를 잡고 자기들을 야박하게 대한 것에 앙심을 품고 가강에게 아부하여 석전 치부경을 강주 좌우성(江州佐祐城)으로 내쫓았는데, 기해년 가을에 가강이 또 수뢰(秀賴)의 유부(乳父) 시전비전수(蒔田肥前守:마에다 도시나가)를 가주(加州가슈[*])로 내쫓고서 자신이 복견성(伏見城: 후시미성)으로 들어갔으며, 동년 9월에 수뢰를 문안한다는 핑계로 또다시 수뢰가 있는 대판성(大坂城: 오사카성)으로 들어가 그대로 웅거(雄據)하고 있으면서 군국(軍國)의 모든 일을 제맘대로 하였으므로 상하가 마음이 떠났습니다.
그리고 중납언 경승(中納言景勝: 우에스기 가게카쓰)이란 자가 있는데 3주(州)를 거느린 장수로서 동북(東北: 도호쿠 지방) 지역에 있으면서 가강이 수길의 부탁을 배반한 것을 매우 싫어하여 비로소 가강을 따르지 않을 뜻을 두어 가강이 재삼 불렀으나 끝내 그에게 복속하지 않았습니다. 경자년 9월에 가강이 5∼6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그의 본진(本鎭)인 월주(越州)[24]와 능등(能登노토[*]) 지역에 달려가 그의 얼자(孽子) 삼하수(三河守: 유키 히데야스)라는 자를 보내 5∼6만의 군사를 거느리게 하여 선봉(先鋒)으로 삼아 경승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일곱 번 싸워 다섯 번 패하여 다시 어떻게 해볼 수 없게 되었을 때, 석전 치부경 등이 가강이 수길을 저버리고 국사를 제맘대로 농락하는 것을 증오하고, 병권(兵權)을 가지고서도 온유(溫柔)한 휘원(輝元)을 사모하여, 대소(大小)가 모두 휘원을 권하여 허점을 틈타 입성(入城)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어 증전 우문승으로 부장(副將)을 삼아 수뢰가 있는 곳에 머물도록 하고, 석전 치부경은 비전주 중납언(備前州中納言) 평수가(平秀家: 우키타 히데이에)와 소서행장(小西行長고니시 유키나가[*])·살마 도주(薩摩島主) 도진(島津: 시마즈 요시히로) 등의 군대 4∼5만 병력을 거느리고서 중로병(中路兵)이 되어 미주(尾州비슈[*])·농주(濃州노슈[*]) 지역 대원성(大垣城: 오가키성)으로 가서 진을 치고 장속 대장승(長束大藏丞)과 안국사(安國寺: 안코쿠지 에케이) 2인을 군총(群總)으로 삼아, 휘원(輝元)의 양자(養子) 예주 재상(藝州宰相) 수원(秀元: 모리 히데모토)과 용장사(龍藏寺)·운주 시종(雲州侍從: 깃카와 히로이에) 등의 4만 3천의 군사를 거느리게 하여 우로병(右路兵)으로 삼아 이세주(伊勢州이세슈[*])로 가서 진성(津城: 쓰 성)과 송오성(松鳥城)을 함락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가강에게 붙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군대를 농주(濃州노슈[*])의 관원(關原: 세키가하라정)으로 이동시키고, 대전 형부경(大田刑部卿)이 산구인 번수(山口因幡守) 등의 7천 군사를 거느리게 하여 좌로병(左路兵)으로 삼아 월후주(越後州에치고국[*])에서 항전을 하였는데, 당시 가강과 같이 일을 도모한 왜장 시전비전수의 군대가 추격하였습니다. 3로의 군대가 농주 관원에서 합진(合陣)하여 가강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가강은 휘원이 이미 대판성에 입성하여 군대를 출동하여 항전한다는 말을 듣고 자기에게 붙은 8만여 명을 거느리고 주야로 달려 농주(濃州)의 청원(靑原)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때 혹전갑비수(黑田甲斐守: 구로다 나가마사)란 자가, 휘원의 사위 축전주 중납언(筑前州中納言: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과 휘원의 종제(從弟) 운주 시종(雲州侍從)이 속으로 휘원에게 붙으려 하지 않는 뜻이 본래부터 있음을 알고서 몰래 가강에게 내통하니, 가강이 즉시 갑비수를 시켜 반간계(反間計)를 사용하였는데, 축전주 중납언 등이 그 말을 달게 여기고 약속하기를 ‘9월 14일에 정예 기병(精銳騎兵)을 정돈해서 기습해 오면 우리는 거짓으로 3로의 선봉(先鋒)이 되었다가 되돌아서서 관원(關原)을 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가강이 과연 그 약속대로 하니 축전 중납언 등이 역시 약속대로 하여 주야로 연전(連戰)하였는데 관원의 3로병이 크게 패퇴하여 수가(秀家)와 대소 형부경(刑部卿: 오타니 요시쓰구) 등은 다 전사하고, 그 나머지도 모두 궤산(潰散)하였으며 가강은 승승장구하여 근강주(近江州오미슈[*]) 세다교(勢多橋)에 도착하여 운주 시종(雲州侍從)이란 자를 불러 ‘너의 종형 휘원이 성문을 열고 스스로 물러가면 죽음은 면할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휘원이 속임수인 줄을 모르고 그 말을 믿고서 겁이나 성을 버리고 본진(本津)으로 물러가니 같은 달 27일에 가강이 다시 수뢰(秀賴)의 성으로 들어가 증전 우문승(增田右門丞) 등 자기를 배반했던 10여 인을 추격해서 체포하여 할복 자결하도록 하고, 또 석전 치부경(石田治部卿)과 평행장(平行長)·안국사(安國寺) 등 셋을 잡아다 도시(都市)를 돌면서 죄를 성토한 후 경동교(京東橋) 앞에서 효수(梟首)하였습니다. 그리고 휘원에게 협박하기를 ‘네 죄는 의당 죽여야 할 죄이나 너의 애첩(愛妾)과 자식 수취(守就: 모리 히데나리)를 볼모로 보내면 면할 수 있을 것이다.’고 하니, 휘원이 그 말대로 하였습니다. 가강은 그들을 볼모로 잡고서도 또다시 휘원의 식읍(食邑) 8주 중에 6주를 빼앗고 협박하여 중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경승(景勝)은 군대가 매우 강성하여 그 주변의 적추(賊酋) 6∼7인이 그에게 붙었고, 가강의 얼자(孽子) 삼하수(三河守: 유키 히데야스)란 자도 역시 제 아비를 배반하고 경승에게 합세하였는데, 경승은 눈이 녹기를 기다려 대대적으로 진격할 것이라고 하므로 이는 가강이 가장 걱정하는 것이며, 또 토좌 시종(土佐侍從)[25] 이란 자가 남경로(南京路)에 있는데, 가강에게 붙지 아니하고 있으며, 살마 시종 도진(薩摩侍從島津: 시마즈 요시히로)이란 자는 휘원과 같은 무리인데 가강이 지난 10월에 그의 손자 사위인 청정(淸正)으로 장수를 삼아 4만 여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도진(島津)과 싸우도록 하였으나 네 번 싸워 모두 패하자 군사를 퇴각시키고, 강화(講和)를 요청하였으나 도진이 병선(兵船) 70여 척을 준비해서 중국으로 들어가겠다고 큰소리친다고 합니다. 적의 속셈을 미리 헤아리기는 어려우나 도진이 가강과 서로 대치하여 변란을 대처하고 있으면서 필시 가강이 오는 것을 이용하기 위해서 거짓으로 중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
선조 136권, 34년(1601년: 신축 / 명 만력(萬曆) 29년) 4월 25일(임진) 11번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