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민족유일당 운동'이 실패하자 공산진영을 필두로 한 좌익진영은 한국유일독립당 촉성회를 일방적으로 해체하고 1929년10월 26일 유호한국독립운동자동맹(留滬韓國獨立運動者同盟)을 조직하고 기관지 《앞으로》를 발행했다. 이들은 상해한인청년동맹과 통합해 상해한인반제동맹(上海韓人反帝同盟)이 되었다. 민족진영은 공산진영에 대응하고자 임시 정부를 강화하고 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한국독립당 조직을 계획하였다.[1]
한국독립당 결성의 주역은 이동녕을 비롯한 임시 정부의 핵심세력과 흥사단의 안창호였다. 이동녕 등의 임정 핵심세력은 임정의 기능강화와 이에 따른 독립 운동의 활성화를 도모코자 했고, 안창호는 임정을 해체하고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을 수립코자 했다. 그러나 임정을 어렵게 고수해 온 이동녕·김철을 비롯한 임정의 간부들은 과거 10여년이란 역사를 가진 정부를 해산함은 불가하며, 설령 새로운 기관을 설립한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이보다 유리하다고는 할 수 없다고 했다. 이러한 상반된 견해가 좌파세력에 대응한다는 대의 하에 조정되어 한국독립당이 결성되게 되었다.[1]
한국독립당은 위의 두 당과 합당을 논의하여 1937년 8월 1일에 우익계열 독립운동 단체들의 연합체인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하였다. 1939년 9월에는 한국독립당을 포함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산하 단체들과 좌익계열 독립운동 단체들의 연합체 조선민족전선연맹 산하 단체들 간의 통합 논의가 진행되어 좌우익을 아우르는 독립운동 단체들의 연합체 전국연합진선협회가 결성되었다.
민족진영 3당이 한국독립당으로 통폐합 (1940)
이후 중일전쟁 도중인 1940년5월충칭으로 옮겨온 뒤 우익 3당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간의 통합을 이루어 김구를 중심으로 한 한국독립당으로 개편되면서 임시정부의 여당이 되었다.
한국민주당과 함께 양대 우익정당으로 알려지며 활동하였다. 다만 1945년 한국독립당의 강령을 보면 사회민주주의자였던 조소앙의 삼균주의에 많은 영향을 받아 기본강령엔 계획경제, 민주공화국, 국비교육이 명시되었고, 행동강령에도 토지 국유, 극빈 농민 우선권, 적산 국유 등이 명시되어있어 사실 당시 반공 세력이면 죄다 우익으로 분류해서 그렇지 현대식 구분으로 보면 우익정당이라고 보기엔 어려운 측면도 있다.
하여튼 냉전 당시 우익진영의 적대세력은 공산 진영이였으나, 친일청산 문제 때문에 한국독립당은 한국민주당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1947년6월초 김규식 및 여운형과 노선을 같이하던 한독당 내의 안재홍, 박용희, 조헌식, 이의식, 이승복, 장지필, 엄우룡 등 구 국민당 세력은 김구 등의 반탁 노선에 반기를 들고 미소공위의 성사를 위해 한독당을 탈당하였다. 이들은 '우리 민족의 총의인 자주독립을 쟁취키 위해서는 기동성 있는 총명 과감한 발전적 투쟁을 요한다' 면서 미소공위에 지지를 보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5][6] 1947년 6월 미소 공위의 참석에 찬성하는 혁신파와 민주파는 한독당을 이탈하여 신한국민당과 민주독립당을 결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