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 말년에는 워싱턴 세너터스에서 3년을, 뉴욕 양키스에서 1년을 뛰었고 1928년 시즌 후 유니폼을 벗었다. 은퇴 후 인디애나주사우스벤드에서 살다가 1984년에 세상을 떠났다. 코벨레스키는 씹는 담배 등을 이용해 스핏볼을 던지며 선발로 활약했던 투수였다. 그가 현역이던 1920년부터 이러한 투구가 금지되었으나, 예외적으로 17명의 투수들에게 스핏볼을 던질 수 있도록 허용되었고 그도 이들 중 한 명이었다.
어린 시절
스탠 코벨레스키는 1889년 스터니슬로스 앤서니 코왈레브스키(영어·폴란드어: Stanislaus Anthony Kowalewski)라는 이름으로 펜실베이니아주샤모킨의 탄광촌에서 8자녀들 중 한 명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앤서니 코왈레브스키(영어·폴란드어: Anthony Kowalewski)와 어머니 앤 레이시츠 코왈레브스키(영어·폴란드어: Ann Racicz Kowalewski)는 1870년 초에 폴란드 입헌왕국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간 폴란드계 미국인들이었다.
스탠은 야구를 하는 다섯 형제들 중 막내였으며 큰형 제이콥은 미국-스페인 전쟁에 참전해 요절했고 둘째 형 프랭크와 셋째 형 존은 야구를 했지만 메이저 리그의 벽을 넘지 못했다.[1][2] 바로 위의 형 해리 코벨레스키는 후일 메이저 리그에서 세 시즌 연속 20승 이상(1914년 22승(20선발승), 1915년 22승(18선발승),1916년 21승(20선발승))을 따내며 활약했다.[3][4]
당시 샤모킨 지역에서는 석탄 채굴이 성업을 이루었고, 다른 또래들처럼 스탠도 12살 때부터 탄광에서 브레이커 보이로 일했다.[1] 임금은 한 시간당 5센트 가량으로, 일주일 내내 72시간 동안 일하면 3.75 달러를 벌었다.[5] 나중에 어린 시절을 회고하면서, 그는 "당시에는 열두 살짜리 폴란드 아이가 한 시간에 니켈 동전 하나를 벌기 위해 일주일 동안 72시간을 일하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돈을 벌지 않고) 다른 데 가있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라고 이야기했다.[5] 당장 먹고 사는 게 급했기 때문에 스탠에게 야구는 그저 꿈에 불과했다.[1]
하지만 스탠은 날이 저물고 일이 끝나 조금 여유가 생길 때면 혼자서 야구 연습을 했다. 깡통을 50피트정도 되는 거리에 놓고서 돌을 던져 맞추곤 했다.[6] 18살이 되던 해에 그가 살던 지역의 한 세미 프로팀에서 스탠에게 관심을 보이며 한번 와서 뛰어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손에 깡통 대신 공을 쥐어본 그는 "야구공을 던지는 건 (돌을 던지는 것보다) 훨씬 쉬운 일이었다. 깡통을 맞추는 것에 비하면 홈플레이트는 훨씬 넓었다."고 나중에 당시의 느낌을 이야기했다.[6] 그에게 샤모킨에서의 야구 경력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 곳에서 다섯 경기만을 뛰고 근처의 랭커스터에 있는 야구팀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6]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와 마이너 리그
코벨레스키는 1909년 트라이스테이트 리그 소속의 마이너 리그 팀 랭커스터 레드로지스와 첫 프로 계약을 맺었다. 계약을 앞두고 머뭇거렸던 코벨레스키는 형 존도 같이 계약하자는 조건으로 구단의 제안에 응했다. 그 무렵에 이름을 폴란드식의 '코발레브스키'에서 영어식인 '코벨레스키'로 바꾸었는데, 이후 선수 시절 내내 그 이름을 달고 뛰었다.[2] 나중에 그는 랭커스터로 처음 오던 날을 이야기하면서, "평생 기차를 처음 타본 날이었다. 너무 부끄러웠던 나머지 팀원들과 같이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고 이야기했다.[7] 랭커스터에서 첫 시즌을 뛰면서 272이닝을 던져 23승 11패, 1.95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8] 이후 랭커스터에서 2년을 더 뛰었고, 이 곳에서의 세 시즌 동안 109경기에 출전해 53승 38패를 기록했다.[7]
1912년 랭커스터에서 연고지를 옮긴 애틀란틱시티 랭크스 소속으로 40경기(선발 30경기)에 등판, 20승 14패, 2.53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8] 한편 그를 눈여겨 보던 메이저 리그 팀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의 코니 맥 감독이 구단에 그를 추천했고, 그 해 9월 코벨레스키는 애슬레틱스와 계약을 맺었다. 1912년 9월 10일 코벨레스키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의 경기에서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고,[9] 그 해 애슬레틱스에서 5경기(선발 2경기) 2승(1선발승) 1패 3.43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10] 시즌 후 코니 맥 감독은 경험을 쌓게 하기 위해 코벨레스키를 노스웨스턴 리그의 스포캔 인디언스로 보냈다.[2] 코벨레스키는 그 곳에서 첫 해 17승 20패 2.82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8] 그 즈음 그는 메리 스티베츠라는 이름의 여자와 결혼했다. 이듬 해인 1914년에는 300이닝 이상 던지며 20승 15패, 탈삼진 리그 1위를 기록했다.[2]
코벨레스키가 애슬레틱스에 처음 발을 들였을 당시 팀에는 이미 에디 플랭크, 치프 벤더, 잭 쿰스 등 여러 실력 있는 투수들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그 사이를 비잡고 주전을 꿰차기는 매우 힘들었다. 나중에 당시 상황을 이야기하며 그는 "내가 과연 저 선수들과의 경쟁에서 싸워 이겨 내 자리를 획득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11] 그런 와중에 1914년 시즌이 끝나고 퍼시픽 코스트 리그에 소속된 마이너 리그 팀 포틀랜드 비버스가 코벨레스키를 강하게 원했고, 비버스는 스포캔에 다섯 명의 선수를 내주면서까지 그를 데리고 왔다.[2] 코니 맥 감독은 코벨레스키를 내려보내면서 그를 마이너 리그에서 일정 기간 뛰게 한 뒤 메이저에 올리기로 스포캔 구단과 약속했었다. 하지만 1913년 애슬레틱스 구단의 소유가 바뀌면서 팀이 코벨레스키에 갖고 있던 권리도 사라졌고, 코벨레스키가 이적할 당시 애슬레틱스 구단은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12] 한편 코벨레스키는 이적한 팀에서 스핏볼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씹는 담배를 가지고서 했지만, 나중에는 명반을 이용했다.[2] 포틀랜드에서 1년 동안 뛰면서 17승 17패 평균자책점 2.67을 기록했다.[8] 시즌 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가 포틀랜드에서 코벨레스키를 사갔고, 1916년 시즌이 개막하면서 인디언스는 메이저 리그 선수 명단에 그의 이름을 올렸다.[2]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는 코벨레스키를 메이저 리그로 올리면서 구원 투수로 활용하려고 했다. 그러나 선발로 내정되었던 투수 에드 클렙퍼가 시즌 초 부상을 당하자, 코벨레스키가 그를 대신해서 마운드에 섰고 곧 선발 자리를 꿰찼다.[13] 시즌 개막 첫 주에 형 해리 코벨레스키와의 선발 맞대결이 예정되었지만, 해리가 이를 거부하면서 없던 일이 되었다.[2] 그는 시즌 중반에 편도염에 걸리고, 한 경기에서는 39 °C의 고열 상태에서도 등판을 강행하는 등, 여러 가지 건강상의 문제로 힘든 시즌을 보냈다.[14] 이 해 45경기(선발 27경기)에 나서서 15승(13선발승) 13패, 3.41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10] 시즌 중에 건강 문제로 4.5kg정도 살이 빠졌지만, 오프 시즌에 살을 그 두 배로 불렸고 다음 시즌을 앞두고서는 이전보다 더욱 건강한 모습으로 나타났다.[15]
1917년 시즌 개막전이 열리는 4월 11일, 팀의 에이스로서 선발 등판했고, 팀이 6-4로 승리하면서 코벨레스키는 시즌 첫 승을 따냈다.[16] 9월 19일에는 뉴욕 양키스를 상대로 1피안타 완봉승을 거두었다. 유일하게 맞은 안타는 7회 프리츠 마이셀이 때려낸 것이었다.[17] 기록적으로 예년보다 향상된 모습을 보여주면서 시즌 19승(18선발승) 14패, 1.81의 평균자책점, 그리고 커리어 하이인 133개의 탈삼진을 기록했다.[10]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1918년 시즌은 예년보다 축소되었지만, 코벨레스키는 변함없는 활약을 이어갔다. 시즌 중 양키스를 상대로 선발 등판한 한 경기에서는 정규 이닝의 두배가 넘는 19이닝을 던지면서 2실점으로 틀어막아 최종 점수 3-2의 완투승을 거두었다.[18] 이번 시즌 최종 기록은 38경기(선발 33경기) 출전, 311이닝, 22승(21선발승) 13패, 평균자책점 1.82이다. 아메리칸 리그 투수들 가운데 다승과 평균자책점 부문에서 월터 존슨 다음으로 2위를 기록했다(21선발승으로 칼 메이스와 선발승 공동 1위, 월터 존슨은 3구원승 포함이라 20선발승으로 선발승 공동 3위).[2][10] 1919년 시즌에는 43경기(선발 34경기)에 나서 24승(23선발승) 12패, 2.61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10]
1920년 시즌부터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스핏볼 투구가 금지되었다. 하지만 당시 스핏볼을 던지던 선수들에게는 조부 조항을 적용하면서 코벨레스키도 그 대상에 포함되었고, 이후 은퇴할 때까지 스핏볼을 던졌다.[11] 이번 시즌 개막 이후 선발 7연승을 내달렸으나, 5월 28일에 아내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2주간 잠시 고향에 내려가 있다가 복귀했다.[2] 8월 16일 뉴욕 양키스를 상대로 선발 등판한 경기에서 희생 플라이를 치면서 팀의 4-3 승리에 일조했고, 자신 또한 승리를 따냈다. 하지만 이 날 경기는 다른 사건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경기에서 양키스 투수 칼 메이스가 레이 채프먼을 공으로 맞추었는데, 그로 인해 채프먼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는 메이저 리그 역사상 투수가 던진 공에 맞아 선수가 사망한 처음이자 마지막 사건이었다.[19] 1920년 시즌, 코벨레스키는 24승(23선발승) 14패, 평균 자책점 2.49, 133탈삼진을 기록했다. 아메리칸 리그에서 탈삼진 부문 1위, 평균자책점은 밥 쇼키에 이은 2위를 차지했다.[10]
1920년 시즌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는 아메리칸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코벨레스키도 이에 한몫을 했다. 인디언스는 월드 시리즈에 진출해 브루클린 로빈스와 맞붙었다. 1920년 월드 시리즈의 스타는 세 경기에서 완투승을 거둔 코벨레스키였다. 1차전에서 루브 마쿼드와 선발 맞대결을 벌여 5피안타 1실점하며 팀의 3-1 승리를 이끌었다.[20] 나흘 뒤 치러진 4차전에서는 5피안타 1실점했고 팀은 5-1로 승리했다.[20] 시리즈 마지막 경기 7차전에서 다시 선발 등판해 스핏볼러 벌리 그라임스와 맞대결을 펼쳤고, 5피안타 완봉승을 거두면서 팀의 3-0 승리를 이끌었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는 프랜차이즈 역사상 첫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20] 코벨레스키는 이번 시리즈에서 0.67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는데, 이는 월드 시리즈 기록으로 남아있다.[11]
시즌 후에는 스모키 조 우드와 사냥을 다니며 휴식을 취했다.[21] 이듬해 1921년 시즌에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뉴욕 양키스 두 팀이 시즌 내내 아메리칸 리그 1위 다툼을 벌였다. 시즌 막판이던 9월 26일에 두 팀이 만났고, 코벨레스키가 선발 등판했지만 3이닝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이 경기에서 인디언스는 양키스에게 7-8로 패배하며 순위 다툼에서 패배했다.[22] 이번 시즌 코벨레스키는 지난해와 같은 커리어하이 315이닝을 던지며 23승(모두 선발) 13패, 3.37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10] 다음 시즌에 코벨레스키는 전 아내의 자매였던 프랜시스 스티베츠와 결혼했다.[2] 1922년 8월 23일 양키스와의 경기에서 등판해 팀의 4-1 승리를 이끌었고, 양키스는 2위로 내려앉았다.[23] 이 날 경기는 코벨레스키의 시즌 마지막 등판이었다. 시즌 최종 기록은 17승(모두 선발) 14패, 평균자책점 3.32이며, 1917년 이후로 이어오던 20승(선발 20승 이상으로 치자면 1918년부터)을 거두지 못한 첫 시즌이었다.[10]
1923년 시즌 초반, 27이닝 연속 무실점을 하면서 그 기간에 3연승을 거두었다.[24][25] 하지만 시즌이 진행될 수록 점차 따내는 승수가 줄어들었고, 8월 중반에는 3연패를 기록했다. 시즌이 한 달 가까이 남은 상황이던 8월 15일에 시즌 마지막 등판을 했다.[25] 이번 해 기록은 13승(모두 선발) 14패로 처음으로 패가 승보다 더 많았다. 하지만 평균자책점 2.76, 완봉승 5회로 두 부문에서 아메리칸 리그 1위를 기록했다.[10] 1924년 시즌 들어서 5월 말까지 1승 4패, 평균자책점 6.49를 기록하며 부진했다.[26] 시즌 최종 성적은 15승(13선발승) 16패, 평균자책점 4.04를 기록했다.[10] 1924년 12월에 코벨레스키는 9년간 입었던 클리블랜드 유니폼을 벗고, 투수 바이 스피스와 외야수 칼 스미스의 맞상대로 워싱턴 세너터스에 트레이드되었다.[10]
코벨레스키는 클리블랜드에서 준수한 활약을 펼쳐줬지만, 뛰고 있는 도시에 대한 애정은 별로 없었다. 시간이 흐른 후 당시 이적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나는 (클리블랜드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람들은 괜찮았다. 하지만 단지 이 도시가 싫었다."고 고백했다.[2] 그리고 이러한 불만이 쌓이면서 언제부턴가 자신의 경기력에도 영향을 미쳤고, 이 팀에 오래 있는 것이 지겨워졌다고도 이야기했다.[2] 하지만 그는 그의 공을 받아준 포수에 대해서는 칭찬했다. 그는 "그 곳에서 가장 행복했던 일은 스티브 오닐에게 공을 던진 것이었다. 그는 9년간 나의 공을 받았고 나를 너무 잘 알아서 내게 사인을 줄 필요도 없었다."고 이야기했다.[11]
워싱턴 세너터스와 뉴욕 양키스
1924년 월드 시리즈 우승팀 워싱턴 세너터스는 코벨레스키의 영입 등 전력 보강으로 1925년 시즌 아메리칸 리그의 우승 유력 후보로 떠올랐다.[27] 워싱턴에서 첫 시즌을 보내면서 코벨레스키는 작년 시즌의 부진에서 벗어나 다시금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클리블랜드에서 이미 전성기가 지났다고 여겨졌던 그가 활약을 이어가자 여러 평론가들도 놀라워했다.[28] 이번 시즌 그는 20승(모두 선발) 5패를 거뒀고 2.84의 평균자책점으로 AL 1위를 기록했다.[2] 또한 그 해 MVP 투표에서 12위에 올랐다.[10] 세너터스는 이번 시즌 아메리칸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1925년 월드 시리즈에서 피츠버그 파이리츠와 맞붙었다. 한편 코벨레스키는 시즌 후반 등 근육 통증으로 고생했다.[29] 그는 월드 시리즈에 2경기 등판했다. 2차전에 빅 알드리지와 선발 맞대결을 벌였는데, 양 팀은 7회까지 각자 한 점을 주고 받았지만 8회 피츠버그에서 홈런이 터지면서 워싱턴은 최종 점수 2-3으로 패했다.[30] 5차전에서 알드리지와 코벨레스키가 다시 맞붙었는데, 코벨레스키가 7이닝 4실점을 했고 파이리츠가 6-3으로 승리했다.[31] 워싱턴 세너터스는 7차전까지 가는 승부 끝에 준우승에 머물렀다. 세너터스의 4패 중 2패를 떠안은 코벨레스키는 월드 시리즈에서 3탈삼진 5볼넷 평균자책점 3.77을 기록했다.[10]
1926년 시즌에도 워싱턴 세너터스에서 뛰었다. 8월 31일 경기에서 보스턴 레드삭스를 상대로 선발 등판해서 경기 시작 78분만에 2-0 완봉승을 거두었다.[32] 이번 시즌 36경기에 등판, 14승(3완봉승) 11패, 3.12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10] 1927년 시즌 개막전에서 팀 에이스 월터 존슨의 부상으로 코벨레스키가 대신 레드삭스를 상대로 한 개막전에 선발 등판했고, 팀은 6-2로 승리했다.[33] 그러나 이번 시즌 만성적인 팔 통증 때문에 거의 투구를 하지 못했다.[34] 결국 1927년 7월 17일 팀에서 방출되었다.[2] 이 해 다섯 경기에만 나서서 2승 1패, 평균자책점 3.14를 기록했다.[10]
1927년 12월 21일 뉴욕 양키스와 계약하며 복귀를 알렸다. 시즌 성적은 12경기에 등판해 5승 1패, 5.74의 평균자책점에 그쳤고, 이 해가 프로 마지막 시즌이 되었다.[34] 더 이상 자신의 폼을 되찾지 못한 코벨레스키는 8월 3일 마지막 등판을 가졌다. 양키스 구단이 톰 재커리와 계약 후 밀러 허긴스 감독은 그를 방출했다.[35] 그 해 말 은퇴했다.[10]
말년과 평가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고 코벨레스키는 1929년 인디애나주사우스벤드에 가서 살았다. 주유소를 잠시 운영하기도 했지만 대공황이 불어닥치면서 문을 닫았다. 자기 집 차고 뒤쪽 공터에서 동네 아이들에게 무료로 야구 교습을 해주면서 마을 지역 사람들에게 유명해졌다.[36] 현역에서 물러난 뒤 자신의 성 'Coveleskie'에서 끝의 'e'를 뺐는데, 그 이유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잘못 적어서 다시 고치는 일을 반복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었다.[37] 1969년에 베테랑 위원회의 추천을 통해 1920년대 투수 웨이트 호이트와 함께 야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축하 연설을 하는 자리에서 코벨레스키는 "머잖아 이 곳에 들어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매 해마다 내가 여기 서 있는 사람이 되기를 희망했다."고 이야기했다.[2] 말년에 건강이 나빠지면서 지역 양로원에 들어가서 살다가 1984년 3월 20일 9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2]
그는 야구 명예의 전당 입성과 더불어,[34] 1976년에는 폴란드계 미국인 스포츠 명예의 전당에도 이름을 올렸다.[38] 1984년에 인디애나주 사우스벤드에 지어질 마이너 리그 경기장의 명칭을 코벨레스키를 기념해 스탠리 코벨레스키 리저널 스타디움이라고 붙이기로 했다.[36] 야구 기자 로런스 리터가 20세기 초에 활동했던 선수들의 인터뷰를 모아 1966년에 내놓은 책 《더 글로리 오브 데어 타임스》(The Glory of Their Times)에는 코벨레스키의 인터뷰가 포함되어 있다.[2] 선수 시절, 코벨레스키는 등판하는 날이면 말수가 적어지고 성질도 급한 모습을 보였지만, 그 때를 제외하고는 평소에 동료와도 친하게 지내고 유머 감각도 있었다고 한다.[2]
코벨레스키의 통산 기록은 14시즌 450경기(선발 385경기) 출전, 3,082이닝, 216승 142패, 평균자책점 2.89, 224완투, 38완봉, 981탈삼진이다.[10] 그의 제구력은 아주 뛰어났다고 한다. 스스로 자신이 한번도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내는 투수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던 그는, 완투할 때면 대부분 투구수가 95개 이하일 정도로 효율적인 투구를 했다.[2] 어떤 경기에서는 7이닝 동안 자신이 던진 공이 안타를 맞거나 스트라이크가 되거나 둘 중 하나였다.[39] 2001년 야구 통계학자 빌 제임스가 선정한 역대 메이저 리그 투수 순위에서, 스탠 코벨레스키는 58위에 이름을 올렸다.[40]
Kashatus, William C. (2002). Diamonds in the Coalfields: 21 Remarkable Baseball Players, Managers, and Umpires from Northeast Pennsylvania (영어). McFarland. ISBN978-0-7864-117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