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광복이 되자, '우리의 바다는 우리의 손으로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1945년 11월 11일 해군의 모체인 '해방병단'을 창설하였다. 그 후 초대 해군참모총장, 제 5대 국방부장관, 초대 서독대사 등을 역임하였다. 국방부 장관 재임 2개월차 시절이던 1953년 8월 28일을 기하여 대한민국 해군 중장 예편하였으며 1980년 2월 15일 서울특별시마포구 공덕동 자택에서 서거하여 서울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특히, 손 제독은 해군참모총장 재임기간 중 한국 전쟁 시기 인천 상륙 작전과 9·28 서울 수복 작전에 참전하였으며, 한국 최초의 전투함인 백두산함을 미국에서 도입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또한 해군병학교(現 해군사관학교), 대한민국 해병대 등을 창설하였으며, 전사편찬실 및 해군음악대 등을 발족하여 군 사기 진작과 조직체계 개선에도 앞장섰다.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라 불릴만큼 대한민국 해군의 발전에 커다란 공적과 영향을 남겼다.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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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일은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낸 독립운동가 겸 기독교목사 손정도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평안남도강서에서 출생하였으며 지난날 한때 평안남도평양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고 그 후 젊은시절 일제치하 조선에서 일제에 고문을 받은 바 있다. 이후 상해로 건너가 의사가 되기위한 공부를 하였으며, 그 아버지는 상해임시정부에 근무하였다.
손원일은 상해시절 상해에서 본 각국 해군들의 모습에 해방된 한국에도 그러한 해군을 건설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해방이 되자 손원일은 조선에 건너온 뒤 민간인 신분임에도 해군의 모태가 되는 해방병단을 만들었다. 이후 해방병단은 미군정에 의해 해군까진 아니지만 해안경비대로 공식적인 정부 조직이 되었으며 미국에 직접 편지를 하여 도움을 요청하여 해군 양성을 위한 미 해군 교관 15명을 한국에 모시기도 했다.[4] 손원일 제독은 푼푼히 모은 성금과 아낀 돈으로 최초의 해군 전투함인 백두산함을 미국에서 구입해 마련하였으며, 해군사관학교의 전신인 해군병학교를 건설했고, 해병대도 창설하였다. 해병대 창설식에 해병대 사령관을 빛내기 위해 해군참모총장이던 손원일 본인이 참가하지 않은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백두산함은 도입 후 3달 만에 부산에 침투하던 북한특수부대 600명을 실은 북한함을 격침시켰고(6.25발발) 이는 부산이 최후까지 북한에 점령되지 않은데 공을 세운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가 창설한 해병대는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에 최선봉으로 참가해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한 바로 그 부대이다. 또 제독은 그 부인과 함께 일본군가를 사용하던 해군군가를 전부 새로 만들었다. 한국 최초의 항공기 해취호[5]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나중에 그 인간성의 폭넓은 이끌림이 높이 평가되어 유럽에 대사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해방 이전
평양 광성고보(光成高普)를 졸업하고 상하이로 건너가서 상하이 국립중앙대학 항해과를 1930년 6월에 우등으로 졸업하였는데 마침 중국 해군부에서 해군보관(補官)을 양성하기 위하여 전국에 항해지식이 있는 자에게 시험 자격을 주어 그중 수재 다섯명을 선발하였는바, 그 중에 한사람으로 당선이 되어 1930년 7월 21일에 상하이를 떠나 세계를 일주한 후 독일에서 약 3년간 항해학술을 연구하였다.[6]
1935년 출옥 후 매부인 윤치창과 합작으로 남계양행이라는 상점을 5년간 공동운영하였다.[7]
1940년 동화양행 사장의 부탁으로 동화양행에 입사, 상하이 지점장으로 파견나가 엄청난 돈을 벌었다.[7]
팬아메리칸 비행기로 호놀룰루에 도착하여 기자들께 말하되, 자기와 몇몇 남한 각원들이 사직한 것은 이승만 박사와 의향 충돌이 있어서 사임한 것이 아니요 다른 유자격한 분들께 기회를 주려함이라 하였고, 또 공산당들은 오늘 형세로 보아 내부의 결렬이 되어 위미부진(萎靡不振)하고 있으니 자유국들은 이런 기회를 잃지 말고 강경한 태도를 취하여 공산당을 제어함이 온당하다 하며, 자기는 언제나 이승만 박사를 후원하겠다 하였고, 또 세계일주 후에 환국하여 무엇을 할는지 지금 말할 수 없으나 하여간 나이 아직 48세에서 넘지 않는 청년이라 하였다.
1958년 8월 1일~1960년 8월 30일: 주서독 한국 대사. 서독 대사로서 임무가 막바지이던 1960년 7월, 콩고 공화국 독립식전에 참석 후 카메룬, 토고, 기니, 말리, 나이지리아, 모로코 6개국을 친선 방문하고, 상호간의 이해증진과 외교관계 수립에 관하여 원칙적인 합의를 보았다.[11]
1960년 12월 24일 상오, 정일형 외무부장관은 "해임되었음에도 귀국하지 않고 타국에서 직장을 구하여 거주함으로써 국가위신을 추락시키고 있는 해외공관장들에게 강력한 소환명령을 발하였다고"고 언명하였다. 소환해당자에는 손원일도 포함되어 있었다.[12]
↑이 당시에는 중화민국 해군에서 민간 항해사로 근무하였으며, 3년간 독일에서 마도로스 생활을 하였다.
↑손원일 제독은 중국에서 학창시절을 보내던 중 상하이에 들어와 있던 각국 열강들의 군함을 보고 감명을 깊게 받았다고 하며, 해방된 조국에도 바다를 수호하는 해군을 건설하고자 마음을 먹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항해술을 배우고자 중국 해군에 입대하려고 했지만 그 당시 조선인이 중국 해군에 입대할 방법이 없었으므로 중국 난징(南京) 중앙대학 항해학과 3학년을 마친 후 1년간 해상 실습을 이수하여서 3등 항해사 자격증을 받고 상선사관으로 임관하게 된다. 여기서 상선사관은 민간 상선의 선장, 기관장, 항해사, 기관사 등의 간부 선원을 총칭하는 말이며, 사관으로 부르는 이유는 상선을 운용하는 간부들이 전시에 예비역 해군 장교의 의무를 진 데서 유래하기 때문에 상선사관의 수장과 견장, 정복 역시 해군 장교와 동일하게 제작된다. 여담으로 초대 해군참모총장인 손원일 제독부터 제 5대 해군참모총장 이성호 제독까지 상선사관 출신이며, 제 6대 해군참모총장인 이맹기 제독부터는 전원 해사 출신 해군 장교가 임명되고, 역대 해군참모총장은 전 인원이 수상함 출신 항해장교였으나 2023년 10월 30일 前 잠수함 사령관인 양용모 제독이 최초로 해군참모총장에 취임하게 되어서 그 기록이 깨졌다.
↑“英女王戴冠式參席 韓國特使一行決定”. 경향신문. 1953년 5월 21일. 오는 오월 二일에 거행되는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대관식전에 참석할 한국사절단일행은 다음과 같다 特別代表國務總理 白斗鎭 代表 國會議長 申翼熙 代表 駐英公使 李卯黙 隨員 國會議員 金東成 隨員 企劃處 豫算局 第二課長 李漢빈 그리고 대관식 후 六월 十四일부터 十七일까지 거행예정인 영국해군 관함식전에는 해군 총참모장 孫元一 중장이 부관원 元鍾赫 대위를 대동하고 참렬할 것이며 전기 사절단 일행은 일간 영국으로 향하여 출발하게 될 것이다 )
↑사실 손원일 제독은 해군참모총장 취임 시 대장 진급이 확정되었지만 "전투함정이 1척도 없는 대한민국 해군에서 대장급 해군 군인이 나오면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우리 대한민국 해군에 전투함정이 갖춰지거든 그때 대장 계급을 달겠다."라고 본인 스스로 진급을 고사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