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에는 "주색에 빠져서 놀고 즐기는 데에 절도가 없다"라고 그의 행실을 비판하고 있는데, 조선의 문인 이현일은 그의 저서 《갈암집》에서 "당 의종은 직간하는 신하에게 화를 내고 유배보냈다"고 기록하였다. 의종이 즉위한 뒤에는 환관이 조정을 좌지우지했으며, 번진(藩鎭) 세력의 할거뿐 아니라 농민 반란도 빈번하게 일어났다(특히 그가 죽고 2년 뒤에 발생한 황소의 난도 실은 의종 시대의 악정이 원인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즉위한 해에 이미 구보(裘甫)가 절동(浙東)에서 민란을 일으키는가 하면, 함통(咸通) 9년(868년)에는 서사(徐泗) 지역을 지키던 번진의 수병(戍兵)들이 계림(桂林)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불교를 신봉했던 의종은 함통 14년(873년) 봄에, 대신들의 반대도 듣지 않고 엄청난 비용을 들여 불골(佛骨)을 맞아오는 행사를 벌였다. 그것은 아버지 선종이 쌓아올렸던 성과들을 모조리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당시 한림학사(翰林學士) 유윤장(劉允章)은 《직간서(直諫書)》를 인용해 「국가를 무너뜨리는 아홉 가지 요소(國有九破)」[1]를 언급하며 당시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한편 전기소설인 《당인전기(唐人傳奇)》나 북송 시대의 《태평광기(太平廣記)》에는 저묵(著墨), 즉 조정의 날인도 거치지 않은 편법적인 매관매직이 성행했다고 전하고 있기도 하다.
함통 14년 7월, 재위 14년만에 향년 41세로 사망한다.
존호, 시호, 묘호, 능호
초기 존호는 예문명성효덕황제(睿文明聖孝德皇帝)이며, 이후 추가와 개정을 거친 존호는 예문영무명덕지인대성광효황제(睿文英武明德至仁大聖廣孝皇帝)이다.
↑즉, 해가 다하도록 군사를 모으는 것(終年聚兵), 오랑캐들이 발흥하게 내버려두는 것(蠻夷熾興), 권세가들이 사치를 부리는 것(權豪奢僭), 군부의 대장들이 조회하지 않는 것(大將不朝), 불사(佛寺)를 크게 일으키는 것(廣造佛寺), 공적인 일에 뇌물을 받는 것(賂賄公行), 관리들이 잔인하고 난폭하게 구는 것(長吏殘暴), 부역이 고르지 못한 것(賦役不等), 먹고 놀기만 하면서 녹만 받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食祿人多), 세금을 부담할 사람이 줄어드는 것(輸稅人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