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대전이 끝나기 전에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급사하면서 취임한 트루먼은 원폭 투하를 결정했고 공산주의 확대를 막기 위해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했으며 마셜 플랜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전후 경제 정책에 대한 불만과 대규모 파업의 영향으로 1946년에 치러진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은 상·하원 주도권을 모두 상실하였다. 한편 듀이는 1944년 대선에서 예상외의 선전을 거둔데다 1946년에 치러진 주지사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재선에 성공하면서 대선 후보로 입지를 굳혀나갔다. 이런 가운데 월리스와 서먼드가 동시 출마하면서 민주당 계열 후보는 3명이 되었다.
이런 가운데 갤럽과 엘모 로퍼 등 여러 여론 조사 기관들은 듀이가 트루먼을 앞선다고 발표하였다. 트루먼은 이 가운데서 전국 순회 유세를 돌면서 공화당 주도의 의회를 공격하였다. 또한 그는 공화당이 대공황을 불러일으켰다고 비난하였다. 그럼에도 대다수가 듀이의 당선을 사실화하자 NBC는 개표방송 도중에 공화당을 상징하는 코끼리만을 선거 상황판에 설치하고 민주당을 상징하는 당나귀는 설치하지 않았다. 또한 트루먼은 투표 종료 후 선거운동 본부에 들리지 않고 인디펜던스에 있는 저택으로 들어가 취침하였다.
개표가 시작되면서 트루먼이 앞서가는 상황이 중반을 넘어서도 이어지자 트루먼은 새벽 4시에 저택에서 일어나 참모진을 모았다. 듀이는 패배 선언을 미루다가 다음날 오전 11시 14분에 패배를 선언하였다. 트루먼은 북동부 지역에서 대부분 졌지만 오하이오주와 캘리포니아주, 일리노이주에서 초접전 끝에 승리하면서 303명을 확보, 접전끝에 승리하였다. 선거 후 여론 조사 기관들은 조사 기법을 다시 점검해야 했다. 이 선거는 역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가장 이변으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