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종순문숙무경인창효대왕실록》(顯宗純文肅武敬仁彰孝大王實錄) 또는 《현종실록》(顯宗實錄)은 1659년 음력 5월부터 1674년 음력 8월까지 조선현종 시대의 사실을 기록한 실록이다. 총 22권 23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조선왕조실록》의 일부를 이룬다. 《현종대왕실록》(顯宗大王實錄)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남인에 의해 작성된 《현종실록》은 숙종 때 기사가 급하게 작성되었고 내용이 편파적이라는 이유로 서인에 의해 다시 한 번 편찬되었으며, 이를 《현종순문숙무경인창효대왕개수실록》(顯宗純文肅武敬仁彰孝大王改修實錄) 또는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이라고 한다. 총 28권 29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역시 《조선왕조실록》의 일부를 이룬다. 《현종개수실록》에 대한 내용도 본 항목에서 함께 기술한다.
개요
《현종실록》
1659년(현종 즉위년) 음력 5월부터 1674년(현종 15년) 음력 8월까지 총 15년 3개월에 걸친 현종 시대의 국정 전반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한 실록이다. 총 22권 23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조선왕조실록》의 일부를 이룬다. 정식 명칭 및 권두제는 《현종순문숙무경인창효대왕실록》(顯宗純文肅武敬仁彰孝大王實錄)이며, 표지에는 《현종대왕실록》(顯宗大王實錄)으로 쓰여 있다.
1675년(숙종 1년) 음력 5월 춘추관의 건의로 편찬 작업이 시작되었다.[1] 우선 3방을 설치하여 춘추관 사관이 기록한 사초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정리하고, 이를 토대로 하여 당상 및 낭청이 사초, 《승정원일기》, 《비변사일기》, 《의금부추안》 등 여러 자료를 참고하여 편찬하였다.
그러나 1677년(숙종 3년) 음력 2월, 실록청 설치 3년째가 되도록 편찬이 절반도 되지 않자, 숙종이 추고를 명하였다. 당시 숙종은 실록청에 별감을 보내어 알아봤는데, 실록청 당상 및 낭청 중에 나와있는 사람이 없었다.[2] 이렇게 실록의 편찬 작업이 더뎠던 것은,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정권을 잡는 시기였던 때인데다가 실록청 관원들이 다른 직책까지 겸직했기 때문이다. 한편 이러한 숙종의 독촉으로 실록청 당상 및 낭청을 증원하고, 묘사유파법[주 1]을 설치하였다. 이에 따라 이해 음력 5월 초고가 완성되고, 음력 9월 11일 총 22권의 《현종대왕실록》이 완성되었다.[3] 총 편찬 인원은 총재관에 허적과 권대운, 도청당상 6명, 도청낭청 11명, 3방의 당상 및 낭청 47명 등 총 66명이다. 이들은 대부분 남인이었다.
훗날 서인들이 내용 상의 문제점을 지적하여 《현종개수실록》이 편찬되었다. 그러나 《현종개수실록》이 편찬된 후에도 《현종실록》 역시 전부 보존되었다.[4]
일제강점기 때인 1920년대 이후 전 실록을 영인하면서 《현종실록》도 함께 영인본으로 간행되었다. 한편 《현종실록》은 정족산본과 태백산본이 있으며, 정족산본은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소에, 태백산본은 정부기록보존소에 보관되어 있다.[5][6][7]
《현종개수실록》
정식 명칭은 《현종순문숙무경인창효대왕개수실록》(顯宗純文肅武敬仁彰孝大王改修實錄)이며, 표지에는 《현종대왕개수실록》(顯宗大王改修實錄)으로 쓰여 있다. 총 28권 29책이며, 역시 《조선왕조실록》의 일부를 이룬다. "개수"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일부만 수정하거나 추가한 것이 아니라, 전면적으로 재편찬하였기 때문이다.[4]
현종 시대에 정권을 잡았던 이들은 주로 서인이었으나, 《현종실록》의 편찬관은 총재관 허적, 권대운 등 대부분 남인이었다. 이후 1680년(숙종 6년) 경신환국으로 인해 남인이 밀려나고 서인이 재등용됨에 따라, 서인들이 《현종실록》의 내용에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현종실록》의 편찬에도 참여했던 김석주는 이 해 음력 7월, 본인이 편찬했던 부분을 총재관 허적이 마음대로 고쳤고, 또 빨리 완성하기 위해 생략한 내용도 많다고 하였다. 다른 신하들도 대체로 실록의 개수에 동의하면서,[8] 결국 《현종개수실록》이 편찬되기에 이른다.
1681년(숙종 7년) 음력 5월 실록 개수 담당자를 임명하였다. 이때 총재관에 김수항, 당상에 김석주, 이단하, 이민서, 김만중을 두었으며, 한성부에 국을 설치하고 도청랑 및 등록랑 각 8명씩을 두었다.[9] 원래 실록청을 설치하면 사초 정리 작업을 하는 3방을 두어야 하나, 《현종실록》을 편찬한 후 사초를 모두 세초하였기 때문에 3방은 두지 않았다. 이후 1683년(숙종 9년) 음력 3월 11일 《현종개수실록》이 완성되었다.[10]. 총 편찬 인원은 총재관 김수항, 도청당상 6명, 도청낭청 15명, 등록낭청 53명 등 총 75명이다
《현종개수실록》 역시 일제 강점기 때인 1920년대 이후 영인본으로 간행되었다.[7][11]
특징 및 평가
《현종실록》
《현종실록》의 인쇄를 위해 민간에서 "낙동계자"[주 2] 35,830자를 빌려오고, 여기에 40,825자의 동활자를 새로 만들었다. 이 중 새로 만든 활자는 "현종실록자"라고 한다. 한편 민간에서 빌려온 "낙동계자"는 후에 만들어진 "현종실록자"와 구분을 할 수 없어 결국 반환하지 못 하고, 대신 《전한서》와 《후한서》 1벌씩을 준 후 "낙동계자"는 교서관으로 이관하였다. 따라서 "낙동계자"와 "현종실록자"는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로 유사한 특징을 가진 것으로 판단된다. "현종실록자"는 활자 주조 솜씨는 그다지 좋지 못 하나, 글자체가 매우 단아하고 획이 바르다. 이후 여러 왕의 실록과 서적 인쇄에 사용되었다.[12][13]
1675년 《현종실록》의 편찬과정을 기록한 의궤인 《현종대왕실록찬수청의궤》(顯宗大王實錄纂修廳儀軌)가 1책 81장 분량으로 간행되었다. 이 의궤는 태백산, 오대산 등에 보관되었으며, 현재는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보관되어 있다.[14]
《현종실록》은 현종 시대의 사실 뿐 아니라 조선 후기의 역사 및 문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6]
《현종개수실록》
1680년 음력 7월 《현종개수실록》의 편찬과정을 기록한 의궤인 《현종대왕실록개수청의궤》(顯宗大王實錄改修廳儀軌)가 1책 118장 분량으로 간행되었다. 이 의궤는 오대산에 보관되었으며, 현재는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보관되어 있다.[14]
《현종개수실록》은 《현종실록》과 마찬가지로 현종 시대의 사실 뿐 아니라 조선 후기의 역사 및 문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