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노비반란(晋州-奴婢叛亂)은 고려 신종 때인 1200년 진주에서 일어난 노비들의 반란이다.
평소에 주리(州吏 : 주의 관리)의 부패와 학대에 불평을 품고 있던 진주의 공사노비(公私奴婢)들은 각지에서 일어나는 민란에 자극돼 신종 3년(1200) 난을 일으켜 주리의 주택 50여 동(棟)을 불살랐다. 이에 주리들은 진주목사(牧使)에게 알려 모두 체포하였다.
정방의(鄭方義)는 진주 노비 반란으로 자신이 집이 불타자 관리를 만나러 활을 메고 갔다가 반란 혐의로 투옥된다. 그 뒤 아우 정창대(鄭昌大)의 구출을 받은 뒤 노비반란을 일으켰던 무리와 합세하여 주리(州里)로 다니며 평소에 원한이 있던 자들을 모조리 죽였다. 조정은 그 세가 치열하여 위무(慰撫)하지 못하고 방관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때 진주에서 정방의와 사이가 좋지 못한 20여 명이 합주의 노올부곡(奴兀部曲)의 적당(賊黨)에게 응원을 청하여 정방의를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대파(大破)되었다. 그러나 정방의도 진주 사람들이 일어나 그 무리와 함께 패몰되어 난은 1년 만에 진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