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4월 1일, 모노군(桃生郡) 모노 정(桃生町), 가난 정(河南町), 가호쿠 정(河北町), 기타카미 정(北上町), 오가쓰 정(雄勝町) 및 오시카 군(牡鹿郡) 오시카 정(牡鹿町)과 통합하여 새로운 이시노마키 시가 발족했다.
긴카 산 바다(산리쿠 바다)는 쿠로시오 해류(난류)와 쿠릴 해류(한류)가 만나 세계 3대 어장의 하나가 되고 있어 어장에 가까운 이시노마키는 일본에서도 유수한 수산 도시가 되고 있다. 시내의 만고쿠우라에서 굴의 양식법이 개발되어 전 세계로 퍼졌다.
지리
시의 거의 중앙을 (구) 기타카미강이 남북으로 종단하고 대체로 구 기타카미강을 경계로 토지 이용이나 제1차 산업의 구조에 변화를 볼 수 있다.
구 기타카미강의 우안에서 서쪽의 가난, 모무노후 지구는 센다이 평야의 동단부에 위치하고 넓은 평지(이시노마키 평야)와 기타카미강이 가져온 비옥한 토양 덕분에 벼농사를 중심으로 한 농업이 번성한다. 구 기타카미강 좌안에서 동쪽 지역은 기타카미 산지와 리아스식 해안에 의해서 복잡한 지형을 하고 있어 평지가 적기 때문에 농업은 서부와 비교해서 비율이 낮다. 동부에서는 어업과 만내에서의 양식업 등이 번성하고 시의 중앙부의 조힌 산에는 목장이 있어 주변에서는 축산업도 행해지고 있다.
에도 시대의 이시마키 항은 기타카미강 수운에 의해서 난부 번령 하에서 하천 교통과 해운의 결절점으로서 동해측의 사카타 항과 나란히 오우 2대 무역항으로서 전국적으로 유명했다. 또 히가시마와리 항로의 기점으로서 센고쿠 선에 의한 에도(도쿄)와의 교역도 번성하고 에도 시대에 오랫동안 이시마키 항으로부터 에도로 보내진 쌀은 에도 시중에서 유통되는 쌀의 절반을 차지했다고 한다. 번정시대에는 명실 공히 센다이번의 경제 중심지였다. 또 구 센다이 번내에서 유일하게 화폐의 주조가 허용되어 현대에도 주전장(鋳銭場)이라는 지명이 이시마키 역 앞에 남아 있다.
보신 전쟁에서 패전한 센다이 번이 메이지 원년에 오모테다카(表高, 에도 시대에 다이묘의 공식적인 녹봉) 62만 석에서 28만 석으로 지행역이 줄여졌을 때 이시노마키와 그 주변은 센다이 번으로부터 분리되어 다카사키 번을 거쳐 이시노마키 현이 되어 메이지 정부의 직할이 되었다. 이때 정부는 이시노마키를 도호쿠 지방을 관할하는 거점으로 삼을 예정으로 도산도 진다이(鎮台, 옛날 지방을 수비하기 위해 주둔했던 군대)를 이시노마키에 설치했다. 그러나 폐번치현으로 센다이 번이 이시노마키와 함께 센다이 현이 되면서 곧 진다이는 센다이로 이전했고 이후에도 국가의 파견 기관 등은 센다이에 놓였다.
고도 경제성장기에 이르면서 선운이 철도나 트럭 유통으로 옮겨갔기 때문에 항구의 기능은 연안 어업으로부터 원양 어업까지 대응하는 어항으로서 발달했고 이시마키 공업항의 건설로 2차 산업도 발달했다. 이러한 산업기반에 의해서 도시화가 진행되었고 상업 등의 3차 산업 노동자가 대부분을 차지해 미야기 현 동부의 상업 거점이 되었다. 도시권 인구도 버블 경기 때까지 계속 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