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이고, 조선 시대의 제2대 임금 정종(이경)의 서얼왕자덕천군 이후생(德泉君 李厚生)의 후손으로, 호조판서 석문 이경직(石門 李景稷)의 현손(玄孫)이고, 예조판서 이진검(李眞儉)의 넷째 아들이다. 조선 시대의 양명학자(강화학파)로 육진팔광(六眞八匡)중의 한 사람이며 서예가로서 원교체(圓嶠體)를 완성하였다. 바로 이 서체는 중국 서체의 범주에서 벗어나 조선화(朝鮮化)가 되었다는 의미에서 동국진체(東國眞體)라고 불린다. 자는 도보(道甫), 호는 원교(圓嶠), 수북(壽北). 장남은 실학자 연려실 이긍익(李肯翊)이다.
생애
경종 1년(1721) 부친 예조판서 이진검은 노론 4대신을 탄핵하던 중 경상도밀양으로 유배(이광사는 당시 17세)되었다가 죽었고, 영조 31년(1755) 전라도나주괘서사건으로 백부 이진유(李眞儒)가 처벌을 당할 때 이에 또한 연좌되어 함경도부령(富寧)으로 유배(51세)되었다. 사건 당시 이광사가 옥중에서 사사되었다는 소문이 돌아, 이 소식을 들은 부인 문화 류씨가 자살하였다. 이후 부령에서 재지의 문인에게 글과 글씨를 가르쳐 선동한다는 죄목으로 전라남도 신지도(薪智島, 지금의 대한민국 전라남도 완도군 신지면 금곡리)로 이배(58세)되었으며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향년73세). 이광사가 죽은 이듬해 2월 아들 형제가 선조들이 묻혀있는 경기도 장단 송남(長湍 松南) 거창지에 어머니 류씨와 동분합장하였으며, 현재 그의 묘역이 군사분계선비무장지대(DMZ)의 수풀 속에 있어 사람들의 발길을 막고 있다.
작품
일찍 전(前) 공조판서 백하 윤순(白下 尹淳)에게서 글씨를 공부하여 진서(眞書), 초서, 전서, 예서에 모두 능했고 원교체(圓嶠體)라는 독특한 서체를 이룩하여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림은 산수와 인물, 풀과 벌레를 잘 그렸다. 인물에서는 남송원체화풍(南宋元體畵風)의 고식(古式)을 따랐으나, 산수는 새롭게 유입된 오파(吳派)의 남종화법(南宗畵法)을 토대로 하여 소박하면서도 꾸밈없는 문인 취향의 화풍을 보였다. 대표작(代表作)으로는 <행서 4언시>(行書四言詩, 서울대 박물관 소장), 1746년 오대(五代)의 인물화가 왕제한(王齊翰)을 흠모하여 그렸다는 <고승간화도>(高僧看畵圖, 간송미술관 소장), <산수도>(국립 중앙박물관 소장) 등이 있다. 한편 저술을 통해 후진을 위한 귀중한 자료(資料)들을 남겼는데, 서예의 이론을 체계화시킨 <원교서결>(圓嶠書訣) <원교집선>(圓嶠集選) <동국악부>(東國樂府)가 바로 그것이다. 작품(作品)으로는 '영의정 리경석(李景奭) 표(表)', '우의정 정우량(鄭羽良) 지(誌)', '병조판서 윤지인(尹趾仁) 비', '김이원(金履元) 신도비', '형조판서 이신의(李愼儀) 표(表)' 등이 있다.
이광사는 <서결>에서 "예를 들어 사람 마음속에 일어나는 사랑, 기쁨, 노여움, 상쾌함, 답답함, 속임, 뉘우침 따위 감정이 순간에도 변하는 것이므로 이게 바로 조화이고 자연이니 문장도 이와 같은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 "마치 자연의 조화가 사물에 따라 형태를 이루되 처음부터 일정한 체제가 없음과 같다." 이것이 그의 예술론인 것이다.| (문화재청, 글 장진영, 2013.1.22., 묵향에 취하다, 빛과 그림자의 일생-이광사 행서 화기(李匡師 行書 畵記)-)
을해옥사(乙亥獄事)에서 이진유(李眞儒)의 조카로서 윤광철(尹光哲)과 교통하였다는 죄로 이광정(李匡鼎)과 함께 심문을 받고, 제주(濟州)에 유배되다. ○ 제주(濟州)가 인척이 있는 해남(海南)과 가깝다는 이유로 부령(富寧)으로 이배되다. ○ 부인 유씨(柳氏)가 자결하다. ○ 12월, 부인 권씨(權氏)의 묘지명을 짓다.
↑한국학자료포털의 고지도검색을 활용하여 대략적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먼저 메뉴에서 [고지명용례]→[지역별]을 선택하거나 "松南"을 직접 검색하여 결과에서 "고대지도"아이콘을 선택하면 고지명코드="DYD_13_04_0165" 값을 갖는 지도를 볼 수 있다. 대략 판문점에서 북동쪽 근처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