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명(尹致明, 1885년[1][2] 10월 27일(음력 9월 20일) ~ 1944년 양력 4월 21일)은 대한제국 말기의 관료 겸 교육자이다. 호는 남강(南岡)이다.
1903년 군부 주사에 임명됐지만 곧 사직했다. 이후 학부(學部) 주사를 지냈다.[3] 1910년 정3품으로 승진했으나 한일 합방 조약 후 관직을 버리고 낙향했다. 윤영렬의 아들이자 윤치오, 윤치소, 윤치성의 동생이며 내무부장관을 지낸 윤치영의 형이었다. 4대 대통령 윤보선의 숙부였다. 좌옹 윤치호의 사촌 동생이다. 본관은 해평.
아버지는 대한제국군 육군참장 윤영렬이고, 어머니는 청주한씨 한진숙 (韓鎭淑)이며, 관찰사를 지낸 한진창은 그의 외삼촌이다. 윤치소는 그의 둘째 형이고,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정부에서 내무부 장관, 서울특별시장을 역임한 동산 윤치영은 그의 여섯째 남동생이었다. 또한 그의 맏형 윤치오의 아들은 한국 초기 해부학자, 병리학자이며 서울대학교 해부학 교수, 서울대 부총장, 서울대 총장 등을 역임한 동오 윤일선이다. 상공부 장관과 제4대 대통령을 역임한 해위 윤보선의 숙부가 된다.
군부대신 윤웅렬은 그의 큰아버지이고, 개화파 정치인이자 계몽사상가 좌옹 윤치호는 그의 사촌 형이었다. 그의 초기 행적은 미상이다.
1903년 6월 23일 군부주사에 임명됐으나[4], 그 다음날 사직했다.[5] 구한 말 학부주사를 거쳐 관직은 통정대부에 이르렀다. 1910년(융희 4) 7월 23일 정삼품에 올랐다.[6][7]
그러나 1910년 10월 2일 한일합방과 동시에 사퇴하고 고향인 충청남도 아산으로 내려갔다. 1931년에는 만주 동포 구제 의연금을 납부했고, 1933년 5월에는 생활과 교통편의 불편을 이유로 둔포면 주민들이 영인금융회사의 지소 설치를 건의하는데 동참, 서명하였다. 1934년 8월에는 삼남지역의 수재 위문금을 기부하기도 했다. 1944년 4월 21일 향년 50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그의 아들 윤유선(尹裕善)은 의사이며, 정치인 겸 독립운동가 서상일(徐相日)의 사위이기도 하다.[3] 충청남도 출신.
충청남도 아산군 둔포면 운교리 2구(현 아산시 둔포면 운교리 2구)에 부인 용인이씨 이명숙과 합장되었다.
의사였던 아들 윤유선은 세브란스의전 졸업 후 보건계에서 활동했으며 국립의료원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장을 역임하고 후일 미국으로 이민,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